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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05)화 (106/582)

제105화. 한 여름, 폭풍 (14)

“네 분이세요?”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 어른 둘 아이 둘이요.”

“두 분도 스케이트를 타실 건가요?”

“아니요. 카페만 이용할 거예요.”

“그러면 어린이 요금 두 명에 입장료 두 분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가 몇 살인가요?”

“아홉 살이랑 다섯 살이에요.”

두 시간 요금으로 결제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호 장비부터 착용할 거예요. 아이가 답답해해도 보호 장비는 벗기시면 안 돼요.”

직원이 사이즈에 맞는 보호구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서혜나가 도현의 머리에 헬멧을 씌워주었다. 도현이 헬멧이 어색한지 만지작거렸다.

차례대로 팔꿈치와 무릎에도 보호대를 차자 조금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롤러스케이트화까지 신자 균형을 잡을 수 없어 휘청였다.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처음 타보는 건가요?”

“네. 둘 다 처음이에요.”

“그럼 보조기 가져다드릴게요. 보조기로 먼저 연습하고 시작하면 아이들도 금방 잘 탈 수 있을 거예요.”

직원이 어딘가로 가더니 보조기를 들고 왔다.

서혜나가 감사하다고 하며 받아 들던 순간이었다.

“저… 그런데.”

“네?”

“혹시… 송하 맞아요?”

도현이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긴가민가했던 직원이 용기를 내서 물어보았다.

누군가 도현을 알아볼 줄 몰랐던 서혜나가 놀란 표정으로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이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있네?”

직원은 그 말에, 눈앞의 아이가 어제의 그 아이임을 깨달았다.

“헉. 저 어제 드라마 너무 잘 봤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도현을 상대로 존댓말을 했다. 도현도 상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어쩜 좋아! 진짜였어!”

직원은 간단한 감사 인사에도 굉장히 감동받은 기색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빨리 달려가더니, 음료수 네 캔을 주었다.

“이거, 서비스예요.”

“네?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제가 드리고 싶어서요! 그럼 필요한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카페는 저기서 따로 이용하시면 되시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직원은 도현을 흘깃흘깃 보다가 즐겁게 타라는 말을 남기고는 데스크로 돌아갔다.

“도현이 덕분에 음료수 받았네. 도현아, 뭐 먹을래?”

“알로에 맛이요.”

도현의 손에 알로에 주스가 쥐여졌다.

“그러면 이게 도현이가 팬한테 받은 첫 선물인가?”

서혜나가 짓궂은 어투로 물었다.

도현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텔레비전에서 보던 아이를 실제로 봐서 흥분한 정도로 보였다. 도현이 기겁하자 서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도현은 넓은 스케이트장 한가운데에 섰다. 그 옆에는 은혜가 멀뚱히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제 앞에 놓인 하얀 보조기를 보았다.

“도현아! 보조기 조금씩 앞으로 밀면서 걸어봐.”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보조기를 살짝 밀었다.

쑤욱.

발이 확 미끄러지자 도현이 바짝 굳으며 멈춰 섰다. 다시 정지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은혜는.

“엄마. 나 이거 무서어.”

“은혜야. 아직 안 해봤잖아.”

“우웅….”

망부석처럼 서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도현이 진지한 눈빛을 했다. 은혜를 위해서 모범이 되어야 했다.

쓰윽-

도현이 다시 보조기를 밀었다. 몸이 앞으로 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 참고 계속 앞으로 밀었다.

“그렇지! 도현이 잘한다!”

서혜나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곧바로 잡아줄 수 있게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도현을 응원했다. 응원에 힘입은 도현이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오빠 잘 타는 거 봐봐. 은혜도 타고 싶지 않아?”

은혜의 얼굴에 갈등의 기색이 어렸다.

도현이 간신히 멈춰 선 후 은혜를 돌아보았다.

“은혜야. 이리 와.”

“웅!”

갈등이 무색하게도 은혜가 곧바로 팔에 힘을 주었다. 윤경희가 허탈한 눈으로 은혜를 보았다.

아장아장.

도현이 움직인 것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은혜가 움직였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은근히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은혜 스케이트도 잘 타고 멋지다!”

도현이 은혜를 칭찬했다. 은혜의 어깨가 으쓱으쓱했다.

도현과 은혜는 나란히 보조기를 잡고 스케이트장을 한 바퀴 돌았다.

정확히는, 은혜의 속도에 도현이 맞춰서 돌았다.

한 바퀴를 돈 은혜는 자신감에 차올랐다.

“나 이거 안 할래!”

은혜가 보조기를 밀어내며 말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보조기를 쓰기 싫다는 말이었다.

“아직은 위험하지 않을까?”

“시러! 안 할 거야!”

은혜가 배짱을 부렸다.

“그럼 조심조심, 천천히 타야 해.”

“아랏서!”

은혜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도현이 슬쩍 서혜나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아직 보조기 쓰고 싶은데….’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럼 도현이도 보조기 없이 타볼래?”

“…네. 한번 해볼게요.”

도현이 미적지근한 손길로 보조기를 밀어내었다. 보조기에서 멀어지는 손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잠시 미련이 남은 눈길로 보조기를 보던 도현이 결심한 표정으로 발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휘청!

파닥파닥!

팔을 날개처럼 흔들며 간신히 중심을 잡은 도현이 멈춰 섰다.

'아무래도 다시 보조기를 써야겠…'

그때였다.

척. 척. 척!

보무도 당당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은혜의 용맹무쌍한 모습이 도현의 눈에 비쳤다.

도현의 눈동자에 오기가 서렸다.

그래, 그 어려운 수영조차 해낸 자신이 아니던가?

하물며 물속도 아니고 땅바닥인데 못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도현은 심기일전하며 다시 다리를 뻗었다.

은혜가 슝슝 앞으로 나아가고 도현이 불타는 눈으로 그 뒤를 쫓을 때.

서혜나와 윤경희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눈은 아이들에게로 향한 채였다.

“은혜가 정말 잘 타네요.”

“은혜가 엄살이 심해서 그렇지, 운동 신경이 좋아서 몸으로 하는 건 곧잘 하더라고요.”

그 말대로 은혜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익히고 있었다.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뒤뚱뒤뚱.

“큽!”

아들의 귀여운 모습에 서혜나가 웃음을 참았다. 손으로는 열심히 핸드폰 촬영 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

“도현이가 의외로 허당이네요.”

윤경희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인간미 있네요. 도현이가 운동까지 잘하면 그게 더 사기죠. 연기도 잘하고 잘생겼고 성격도 좋은데!”

그 말엔 서혜나도 동의했다.

‘심지어 우리 애는 바이올린도 잘 켜고 그림도 재능 있고 공부도 잘해요.’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너무 자랑처럼 들릴까 봐서였다.

물론 자랑이 맞았다.

“어제 드라마 보면서, 남편한테 도현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 거 있죠?”

윤경희의 남편은 도현을 만나본 적 없는 사이였다. 윤경희가 고개를 저었다.

“공원에서 만난 사이라고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정말요?”

서혜나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여튼. 그러니까 공원에 산책할 때 그렇게 같이 가자니까 귀찮아해 놓고서는.”

“남편이 산책을 싫어하나 봐요?”

“어떻게 그이한테서 은혜 같은 딸이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움직이는 걸 너무 싫어해요. 자식 둘 키우는 기분이라니까요.”

윤경희가 한탄했다.

서혜나는 그 말에 집에 두고 온 이장혁이 생각났다.

물론 제 남편이야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는 어디가도 안 빠지는 사람이었지만… 집에 홀로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조금 안쓰러웠다.

남편이 9살짜리 아들도 아닐진대, 집에 혼자 놔두니 왜 미안한 감정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편.

“빠리 와!”

은혜가 앞에서 볼을 퉁퉁 부풀렸다.

“자, 잠시만.”

도현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은혜가 서 있기 지루했는지 바닥에 쪼그렸다.

도현은 은혜의 앞에 도착했다.

“은혜야. 나는 놔두고 먼저 가도 돼.”

“시러!”

은혜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 의리가 고맙긴 했지만, 왤까. 눈물이 나는 기분이었다.

도현은 은혜의 스파르타식 교육에 맞춰서 낑낑 앞으로 발을 옮겨야 했다.

* * *

롤러스케이트장을 나온 네 사람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도현과 은혜의 앞에 어린이 세트가 나왔다.

도톰한 함박 스테이크에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옆에는 오믈렛도 담겨 있었다.

찹찹. 찹찹찹!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날아다녔던 은혜가 배가 많이 고팠는지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도현은 두 시간 동안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팔을 움직일 기력도 거의 안 남은 상태였다.

간신히 팔을 움직여 입에 넣고 의무적으로 씹었다.

대조되는 두 아이의 모습에 서혜나와 윤경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음에 또 보자는 약속과 함께 헤어졌다.

철컥!

“여보, 나 왔어!”

서혜나가 집에 들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쿠당탕!

어디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장혁이 달려 나왔다.

“왔어? 도현아, 잘 놀았어?”

“네. 재밌었어요.”

“그래.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와.”

이장혁의 얼굴에 웃음이 들어찼다.

서혜나가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친구랑 노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족끼리 있을 때가 제일 완벽했다.

도현은 방에 가서 씻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리고 10시가 되기 십 분 전에 거실로 나갔다.

“도현아. 여기 앉아.”

서혜나가 이장혁과 자신의 사이를 가리켰다. 도현이 서혜나가 가리킨 자리로 가서 앉았다.

몇 차례 광고가 지나가고.

급박한 느낌이 나는 OST가 흘러나온 후, <불량경찰> 2화가 시작되었다.

2화부터는 도현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볼 수 있었다.

선우강은 자신에게 생긴 능력으로,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선우강을 의심하는 동료 경찰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선우강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고, 끈질기고 집요한 관찰 끝에 곧 선우강에게 이상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가장 꽉 막힌 모범 경찰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선우강은 자신의 앞에 펼쳐질 고생길을 예감했는지 오리발을 내밀고.

선우강의 입에서 진실을 듣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동료 경찰과 그것을 능력을 사용해 쏙쏙 피해 가는 선우강의 모습이 웃음을 유발했다.

추격전 끝에 결국 단서를 얻지 못한 동료가 포기하려던 순간.

한 학생이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급하게 출동을 하게 되며 2화가 끝이 났다.

화면이 수채화처럼 물들며 엔딩을 알리는 OST가 흘러나왔다.

“벌써 끝났어?”

이장혁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바탕 웃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이장혁이 시계를 보았다.

“이제 자야겠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이장혁의 말에 서혜나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아, 안 피곤해?”

도현이 평소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후 9시에서 10시 사이였다.

그러나 이틀 동안 <불량경찰>을 시청하느라 피치 못하게 늦게까지 깨어 있게 되었다.

“조금 졸려요.”

드라마를 볼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젯밤에 기사를 본답시고 늦게 자고, 오늘 열심히 롤러스케이트를 타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얼른 가서 자. 잠 잘 오게 우유라도 덥혀 줄까?”

“괜찮아요.”

고개를 저은 도현이 두 사람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후 방으로 들어갔다.

풀썩!

도현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도현이 부드러운 이불에 뺨을 살짝 비볐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도현의 방을 슬쩍 열어 본 서혜나와 이장혁은 벌써 꿈나라에 간 도현을 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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