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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06)화 (107/582)

제106화. 특별한 이유 (1)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아니, 어쩌면 도현의 마음이 특히 그런지도 몰랐다.

하루빨리 샌디에고에 돌아가고 싶었던 게 무색하게도, 정말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워지자 아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현은 어느새 이곳에 정을 붙였다는 걸 깨달았다.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변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도현은 책 한 권을 들고 집 마당에 있는 정원에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정원 한쪽에 설치된 그물막에 앉아 쿠션을 하나 배에 대고 책을 펼쳤다.

팔락.

바람이 부는 소리, 정원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그리고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도현은 얼마 남지 않은 이 평온한 시간을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언뜻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도현아, 다 챙겼어?”

“네!”

도현이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는 게 익숙해질 정도는 되는 시간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건 일상의 일부가, 삶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것과 같았다.

도현은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놓고 가기로 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테니까.

“이제 가요.”

도현이 부모님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공항으로 차가 끊임없이 달려갔다.

“은혜가 많이 서운해하겠네.”

“아….”

롤러스케이트장에 간 이후로, 은혜와는 한 번 더 공원에서 만났다.

도현은 공원에서 은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은혜는 그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딱 한 가지는 알아들었다.

- 그럼 이제 못 노라?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도현은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도현이 대답하지 않자 은혜의 입술이 삐쭉빼쭉 튀어나오더니.

- 시러! 가지 마!

도현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현은 가지 말라는 은혜의 말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떨어트리지도 못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펑펑 눈물을 쏟아내다 못해 콧물까지 흘리는 은혜를 토닥이는 게 전부였다.

도현은 은혜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안쓰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하늘이 떠나가라 운 은혜한테는 미안하지만, 울 정도로 나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충만감이 들었다.

브로콜리를 볼 때와 비슷하면서 다른, 묘한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람이한테는 인사도 못 했네.’

서로의 연락처를 모르다 보니,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와서 은혜 말고 유일하게 인연을 맺은 또래인 만큼, 조금 각별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도현이 착잡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서혜나가 말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한 게,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더라.”

“다시 만날까요?”

“그럼. 인연을 완전히 잊지만 않는다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12시간의 비행으로 기운이 쭉 빠진 세 가족이 공항을 나왔다.

“로마다!”

이장혁이 조금 기운을 차렸다.

세 사람은 영화제에 참석하는 김에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해 일주일 먼저 로마에 도착했다.

“와. 로마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두 사람이 추억에 젖은 눈을 했다. 그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와보신 적이 있어요?”

“엄마 아빠가 이탈리아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냈거든. 그때,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지.”

그러고 보니 Marine가 이탈리아 브랜드였다가, 부모님이 인수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랑 인연이 깊은 곳이구나.’

그리 생각하자 로마가 조금 달리 보였다.

“일단 테르미니역으로 이동하자. 그 주변에 숙소 잡아놨어.”

서혜나가 성큼성큼 앞장섰다.

‘길을 알고 계신 건가?’

도현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서혜나를 보았다.

그러나 도현은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자 그 생각을 짐작했는지, 이장혁이 웃으며 설명했다.

“이 공항에서 내린 사람들은 거의 다 테르미니역으로 이동하거든. 그래서 그냥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돼.”

마치 무리를 지어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로마는 도현이 지금껏 봐왔던 그 어느 곳과도 달랐다. 한국에 있다가 로마에 오니, 완전히 다른 세계라도 온 것 같았다.

주변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아빠의 말대로 테르미니역이 보였다.

“아, 저긴가 보다.”

서혜나가 먼저 앞장섰다.

밤이라서 호텔에는 불빛이 들어와 있었는데, 호텔이 아니라 유명한 명소나 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다.

제주도에서의 현대적이고 깔끔한 호텔과는 완전히 다른 멋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 궁전의 기둥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벽과 하나하나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가구들이 보였다.

도현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나가자.”

“네.”

12시간 동안 비행기를 탄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저번에 1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탔던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로마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었다.

* * *

이튿날 아침.

세 가족은 호텔에서 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테르미니역 주변에 있는 산타마리아 마조네 대성당에 들렀다.

“와아….”

“여기가 로마 4대 성당 중 하나야.”

도현은 4대 성당 중 하나라는 사실에 납득했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성당에 들어가며 이장혁이 성당에 관한 전설을 설명해 주었다.

“리베리오 교황이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아 지어진 건물이, 이 성당이야. 그때가 8월 5일이었는데, 성모 마리아가 교황의 꿈속에 나타나 눈이 내린 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했대.”

“네?”

오늘 아침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8월의 로마 더위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믿기 어려워하는 도현의 표정에 이장혁이 웃으며 말했다.

“당시 교황은 정말 에스퀼리노 언덕에 하얗게 눈이 내린 장소를 발견했고, 그게 바로 이 성당이 세워진 자리인 거지.”

낭만적이긴 하지만, 다분히 비현실적이었다. 도현은 당연히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전설이니까….

도현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비현실의 산증인이 자신 아니던가?

도현은 잠깐 혼란을 겪었다.

‘내가 겪은 일보다는 현실적인 거 같은데….’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장혁은, 도현이 전설 이야기에 푹 빠졌다고 생각해 작게 웃었다.

실내에 들어가자 넓고 높은 복도가 반겼다. 도현은 그 화려함에 잠시 압도되었다.

재단 부분은 아치 형태로 되어 있었고, 벽은 모자이크처럼 격자무늬가 반복되어 있었다.

“화려하지? 천장은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어. 콜롬버스가 잉카 제국에서 가져와 교황에게 바친 황금을 녹여 장식한 거야.”

왠지 그 색이 남다르다 했다. 황금이라고 하니,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경건해 보였다.

도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저게 뭔가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말구유 조각이래.”

“네?”

도현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봐도 나무 조각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그 형체가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한차례 혼란을 겪었던 도현은 섣불리 가짜일 거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라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된 도현이었다.

이후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의 무덤이나, 나폴리옹의 여동생 빠올리나 보르게제의 무덤 등.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인물들의 무덤까지 구경한 후 밖으로 나왔다.

점심은 적당히 걷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먹었다. 딱히 알아보고 간 곳은 아니었는데 상당히 맛있어서 모두가 만족했던 점심이었다.

이후, 세 가족이 향한 곳은 로마 여행의 꽃이라고 불리는 콜로세움이었다.

그 유명한 원형 경기장이 눈앞에 있으니 상당히 신기했다.

콜로세움에 들어가기 위해 걷던 순간이었다.

“Hey! Chinese? American? Japanese?”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남성에 도현이 당황했다.

“가족이야? 콜로세움 구경 가?”

그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도현처럼 당황한 기색의 이장혁이 쩔쩔맸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남성이 집요하리만치 이장혁에게만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 좋지? 로마는 처음 온 거야?”

날아오는 질문 폭탄에 이장혁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처음은 아니고….”

이장혁이 대답하는 모습을 본 서혜나가 이마를 짚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대화하던 이장혁의 손에 눈 깜짝할 사이에 팔찌 하나가 끼워졌다.

억지로 팔찌를 채워놓고 당당히 손을 내미는 남성에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는 이장혁의 모습에 서혜나는 기가 찼다.

“당신은 어째 옛날이랑 변한 게 없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손목에 팔찌를 찬 이장혁이 어색한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그때, 갑자기 남성이 도현의 손을 확 잡아챘다.

아까까지 허허실실 웃던 이장혁의 표정이 굳고, 서혜나의 눈매가 날카롭게 섰다.

“내 아들한테 손 떼.”

“아들도 콜로세움에 온 기념으로 팔찌 하나….”

“아니. 필요 없어.”

한순간에 공격적으로 변한 두 사람에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장혁이 도현의 손을 잡고 남자의 손에서 빼내었다.

남자가 양손을 올렸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

“아이한테 함부로 손대는 게 나쁜 일이죠.”

이장혁이 단호히 대답했다.

남자가 더 무어라 떠들었지만, 부부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도현을 이끌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도현은 당황한 낯으로 눈만 깜빡이며 엄마 아빠를 따라갔다.

서혜나는 몹시 불쾌한 기색이었다.

“어디 남의 집 자식을 함부로 건드려!”

엄마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평소에 유하기 그지없던 이장혁도 서혜나의 말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기분 나쁘다는 듯이 팔목에 찬 팔찌를 벗기까지 했다.

낯선 부모님의 모습에 도현은 절로 눈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현이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

“응? 우리 아들! 많이 놀랐지!”

서혜나의 눈매가 급격하게 온화해졌다. 아까 날 섰던 분위기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괜찮아, 도현아?”

이장혁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그 태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씩씩하기도 하지. 그래도 앞으로 저렇게 함부로 건드는 사람 있으면 곧장 뿌리치고 도망쳐야 해. 알겠니?”

“네.”

도현에게 몇 번 더 걱정 어린 당부를 하고서야, 서혜나와 이장혁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러면 이제 콜로세움 안에 구경하러 가자!”

“넓어서 다 보려면 시간 꽤 걸리니까, 부지런히 걸어야지.”

두 사람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 나갔다. 사이에 도현을 끼운 채였다.

‘조금 과보호 아닌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도현아! 저기 좀 봐!”

시침 뚝 떼고 밝게 웃는 부모님에,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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