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특별한 이유 (2)
이탈리아 로마, 3일 차.
판테온 신전을 구경하고 나온 세 가족은 길거리에서 산 젤라또를 각자 하나씩 들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제각각 선글라스를 끼고 걷는 모양새가, 어디로 보나 여행 온 관광객이었다.
세 사람은 트레비 분수에 도착했다.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가 한가운데에 서 있고 거대한 조개껍데기 형태를 한 트레비 분수는 바로크 시대 양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젤라또를 먹고 있는데도 덥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던 서혜나가 말했다.
8월 한낮의 로마는, 태양이 너무 높이 떠 발밑의 그림자조차 안 보일 지경이었다.
화창한 하늘에 그림자 한 점 없는 땅은 보기엔 멋있었지만, 막상 그 땅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죽어난다는 게 소소한 문제점이었다.
트레비 분수 앞으로 걸어가자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옛날에 여기에 동전을 던졌는데. 정말 소원대로 됐네.”
“그러게.”
두 사람의 눈이 잠깐 아련해졌다가, 되돌아왔다. 서혜나가 도현에게 동전을 건네주었다.
“도현아! 여기 등지고 서봐.”
도현은 엄마의 말을 따라 분수를 등지고 섰다. 오른손에는 동전을 쥔 채였다.
“오른손으로 동전을 왼쪽 어깨 위를 향해 던지고 로마로 다시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한번 던져봐.”
“엄마 아빠도 로마에 다시 왔으니까, 도현이도 다시 올 수 있을 거야.”
도현이 동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다시 올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오게 된다면….
휙!
동전이 하늘로 떠올랐다. 햇빛을 받은 동전이 별처럼 반짝, 빛이 났다.
퐁당!
동전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파동이 인 물결이 보였다.
“잘했어!”
서혜나와 이장혁이 도현을 칭찬했다. 그저 동전을 던졌을 뿐인데 과도하게 돌아오는 칭찬에 도현이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이어 서혜나와 이장혁도 동전을 던지고.
세 사람은 잠깐 분수대 주변을 거닐었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관행이 어쩌다가 생긴 거예요?”
도현의 질문에 이장혁이 답했다.
“영화 때문이야.”
“영화요?”
“응. 1954년에 개봉한 한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이렇게 동전을 던졌거든. 그때부터 이렇게 동전을 던지는 게 관행이 되었대.”
이장혁의 설명에 서혜나가 덧대었다.
“이 분수가 유명해진 것도, 그 이후에 나온 이탈리아 영화 때문인걸? 그때 두 주인공이 분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트레비 분수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
도현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을 본 이장혁이 말했다.
“문화 예술은 삶에 밀접해 있으니까. 영화도 마찬가지지.”
“혹시 알아? 나중에는 도현이가 영화를 찍은 장소가 세계적인 명소가 될지!”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 돼. 엄마는 될 것 같은데?”
엄마는 가끔, 자신의 일에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을 때가 있었다.
도현은 서혜나의 일상과 같은 주접으로 받아들이고 넘겼다.
세 사람은 느긋하게 걸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
“저 여자 어때? 돈 많을 것 같은데.”
삼인조 소매치기단이 도현의 가족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과 명품 브랜드가 확실한 가방은 남들 눈에는 세련되어 보이겠지만, 그들의 눈에는 돈 덩어리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비리비리해 보이는 동양인인 데다가 아이를 데리고 있기까지.
이 정도면 지갑을 헌납하러 온 수준이었다.
소매치기 중 시선 분산을 맡고 있는 잭이 말했다.
“내가 저 앞에 지나갈 테니까, 시선 돌린 틈을 타서 애니, 네가 저 여자 지갑을 가져와.”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부른 여성,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자연스럽게 망을 보았다.
꽤 오래 소매치기단으로 활동하며 익힌 환상의 호흡이었다.
잭이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낸 후, 도현의 가족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가, 도둑질을 하려는 사람답지 않게 느긋했다.
이윽고.
그가 세 가족 앞을 지나쳐 갔다. 미묘하게 가까운 거리감 탓에, 세 사람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잭에게 쏠렸다.
‘됐다!’
잭이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내자, 애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니를 영입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 누가 임신한 여성을 소매치기범이라고 보겠는가? 의심이 되더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작은 틈이 주어지면, 도망을 가거나 지갑을 다른 곳으로 숨길 자신이 있었다.
애니의 손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망설이면 안 된다.
그저 빠르게!
애니의 손이 서혜나의 가방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엄마, 저기로 가요.”
“응? 그래!”
스윽.
가까워졌던 가방이 도로 멀어졌다.
애니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차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존이 다시 시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어떻게 다시 하란 말인가?
한 번에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애니가 안 된다고 하려던 때였다.
“헤이! 잭!”
존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며, 약속을 잡은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잭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번 서혜나의 시선이 그쪽에 쏠렸다.
지금이구나!
애니는 직감했다.
천운이 따른 것인지, 지금 애니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니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아까보다 더 신속한 손놀림이었다.
관자놀이에 땀이 맺혔다.
애니의 손이 서혜나의 가방에 닿으려는 순간!
‘닿았…!’
그때.
반 박자 더 빠르게 작고 하얀 손이 애니의 손과 가방 사이를 파고들었다.
도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너무 티 나잖아.’
시선이 따가워서 모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보다 노골적이었다.
부모님께 말할까 싶었지만, 어제 일을 떠올리니 썩 좋은 선택지 같지는 않았다.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았다.
즐겁게 놀러 나와서 기분이 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현은 소매치기 여성이 손을 뻗을 때,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말을 걸어 실패하게끔 유도했다.
한 번 실패하면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 소매치기범들은 도현의 생각보다 좀 더 집요했다. 왜 그런 집요함을 소매치기에 발휘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도현은 애니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어설퍼.’
유라면 이미 손에 지갑이 쥐어졌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유라면 첫 번째 실패에서 영리하게 몸을 사렸을 것이다.
도현의 눈에 애니의 소매치기 기술은 너무 어설프고 조잡했다.
‘소매치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애니는 몸의 동작이 너무 쓸데없이 컸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로로 뻗을지도 눈에 선했고, 속도도 그만큼 느려졌다.
도현이 적당한 타이밍에 팔을 뻗었다. 가볍게 뻗은 손만으로, 애니와 가방 사이를 가로막았다.
내내 상황을 곁눈질로 파악하며 모른 척하고 있었던 도현이 살짝 몸을 틀었다.
애니와 도현의 눈이 마주쳤다.
애니는 아이답지 않게 차분한 검은 눈동자에 몸을 움찔, 떨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애니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다. 그동안의 경험이 헛되진 않아서,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이내 뜀박질을 하며 최대한 멀어졌다.
“도현아, 왜? 뭐 찾아?”
“아니에요. 가요.”
도현이 태연하게 답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서혜나와 이장혁이, 다음 코스로 어디에 갈지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리고 삼인조 소매치기단은.
“왜 안 훔치고 그냥 온 거야?”
잭이 애니를 비난했다. 애니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거기 있는 애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하마터면 걸릴 뻔 했어!”
애니가 존을 확 돌아보았다.
“네가 망보기 담당이잖아! 대체 뭘 한 거야?”
“뭐?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잭, 애니, 존은 서로서로에게 책임을 미뤘다. 애초에 소매치기를 하는 이들이 책임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있었다면 진즉에 건실하게 벌어 먹고살았을 테니까.
삼인조 소매치기단의 완벽한 호흡에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들의 파국을 모르는 도현은 발걸음도 가볍게 곳곳을 놀러 다녔다.
다음 날.
그들은 로마에서 피렌체로 장소를 이동했다.
도현은 피렌체라는 도시가 흥미로웠다.
조각조각 이어진 붉은 지붕과 그 사이에서 우뚝 선 성당 건물들.
피렌체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르네상스 시대의 중후함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된 도시였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곳 여기저기에 단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테의 생가를 지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단테가 평생을 사랑했다던 베아트리체가 잠든 산타 마리게타 교회가 보였다.
도현은 원래 단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들, 그리고 한없이 추상적이게만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표현까지.
그 모든 것들은 도현의 이해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맥베스가 좋았다. 도현의 영혼은 사랑보다는 절망에 붙들려 있었으니까. 끝없이 파멸해가는 맥베스의 모습에 얼룩진 안정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단테의 <새로운 인생>의 첫 문장이었다.
단테는 아홉 살에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순간을, 새로운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낯설고 거북하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야 와닿기 시작한다.
왜 단테가 그토록 환희했고, 그토록 괴로워했는지. 그의 마음을 이해한 순간부터, 단테의 소네트는 도현의 마음속 깊이 박혔다.
산타 마리게타 교회를 지나 아르노강 위를 가로 짓는 베키오 다리에 갔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였다.
도현의 기억은 자연스레, 병원 앞 공원을 떠올렸다. 도현은 베키오 다리 위에 서 있었지만, 동시에 가로등이 고장 난 공원에 서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베아트리체와 단숨에 사로잡혔던 단테.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비틀거리던 남자와 다급히 다가가던 소년.
소년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도현은 웃었다.
마치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반발하는 듯, 형의 감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그의 바람처럼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났을까?
지중해의 선명한 파란 하늘과 그 위에 하얀 유화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은 구름이 아르노강 위로 고스란히 비쳤다.
양옆으로 늘어선 황톳빛의 건물들도 강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 명화 속 한 장면 같은 광경을 눈에 담았다. 조금씩 하늘에 번져가는 노을처럼 도현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번져갔다.
보고 싶다.
작은 중얼거림이, 아르노강을 타고 흘러갔다.
* * *
“야! 도리토스!”
도현이 활짝 웃었다.
“맥!”
베니스 영화제 개막식 이틀 전.
도현이 현재 있는 곳은 마르코 폴로 공항이었다.
리암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겨우 두 달 지났을 뿐인데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도현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맥,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맥도 도현을 만난 게 반가운 것 같았다. 잠깐 해후를 즐긴 도현이 리암과 로잔나를 보았다.
“리암, 로잔나. 잘 지냈어요?”
그때였다.
“…어?”
도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발이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리암이 도현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었다.
“흐하하하! 잘 지냈지! 아주 잘 지냈고말고! 다 네 덕분이다, 도현!”
리암이 웃을 때마다 도현의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벼워! 밥, 밥 먹이러 가야겠다!”
“…방금 먹은 거예요.”
“엥? 그럴 리가.”
리암이 희한한 것을 보듯 도현을 보았다.
“일단 내려주세요.”
도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서 몹시 부끄러웠다.
“그래, 그래! 배우님이 내려 달라는데 내려 드려야지!”
도현을 땅에 내려놓은 리암이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현재 기분이 대기권을 뚫고 위로 올라갈 정도로 좋은 상태였다.
그 베니스 영화제에 경쟁 부문으로 초청받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금 리암의 눈에는 도현이 하늘에서 나팔을 불며 내려온 아기 천사쯤으로 보였다.
리암이 도현을 보며 배부른 사람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그 부담스러움을 넘어 느끼하기까지 한 시선에 도현이 거북함을 느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거리를 좀 두고 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