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특별한 이유 (5)
“후, 하. 후, 하…!”
맥이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앞에 있던 Lexus 차량 한 대가 빠져나가고 그들이 타고 있는 차의 순서가 되었다.
차가 멈춰 서자, 정장을 입은 채 대기하고 있던 영화제 진행 요원이 차량의 뒷좌석과 앞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가장 먼저 리암이 내리고 그 뒤로 줄줄이 따라 내렸다.
찰칵!
도현은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영화제 관계자인지, 아니면 기자인지.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이가 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깐 그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포즈를 잡다가, 진행 요원을 따라서 레드 카펫 대기 줄에 섰다.
“번쩍번쩍하네.”
리암이 혀를 내둘렀다.
레드 카펫 포토 라인에 설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수십 명의 기자 외에도, 그 다섯 배는 될 법한 수의 기자들이 펜스에 달라붙어서 셀레브리티들을 찍기 위해 쉼 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쉴 틈 없이 플래시가 터지는 광경은, 그가 한순간 압도될 정도로 박력 있었다.
게스트들이 레드 카펫을 오르는 반대편에는 마이크를 설치한 채 생중계를 하는 리포터도 보였다.
모든 게 생생했고, 분위기는 들끓고 있었다.
“이게 베니스구나….”
이장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감탄하다가 말했다.
“도현이 덕분에 우리가 레드 카펫을 밟아보네.”
“그러게.”
서혜나도 이장혁의 말에 동의했다. 전번에 Marketing manger로 등록된 덕분에, 레드 카펫에 오를 권한도 갖게 된 두 사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서혜나가 조금 신기한 투로 말했다.
“보통 레드 카펫이라고 하면 유명한 사람들이 리무진에서 내려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던데. 줄을 서니까 신기하네요.”
“저렇게 말이죠?”
로잔나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행사장에 들어서는 차량에 꽂혔다.
매끄러운 몸체의 리무진이 부드럽게 멈춰 서자, 진행 요원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이어, 선글라스를 낀 한 남성이 내렸다.
그 순간.
와아아아!
함성이 터졌다.
에드워드 녹스!
사람들이 저마다 남성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다. 남성의 쪽으로 인파가 몰려들어, 진행 요원들이 통제해야 할 정도였다.
에드워드가 요원의 안내에 따라 레드 카펫 위를 올랐다.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셔터 소리가 울렸다.
“에디! 이쪽도 봐줘요!”
“에드워드 씨!”
에드워드는 여유롭게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부르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도중에 선글라스를 벗자 다시 한번 함성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로잔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렇게 리무진을 타고 와서 멋지게 등장하는 건 할리우드 스타나 유명한 감독들만의 특권이죠.”
“확실히, 엄청나네요.”
“우리도 원한다면 저렇게 등장해도 되지만… 저런 반응이 나오긴 어렵겠죠.”
서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리무진에서 나왔던 이들이 차례대로 레드 카펫을 밟고는 건물에 들어갔다.
흥분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진정을 되찾아갔다.
줄이 가까워지자, 첫날 그들을 에스코트 했던 매니저, 안젤라가 보였다. 안젤라가 그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신가요?”
“멋지군요.”
안젤라의 말을 리암이 받았다. 짧게 대화를 나눈 후, 안젤라가 본론을 꺼냈다.
“다 같이 올라가실 건가요, 한 분씩 올라가실 건가요?”
“보통 다른 팀들은 어떻게 하나요?”
로잔나가 물었다.
“유명하신 분들은 한 명씩 가는 경우가 많고, 이제 유명해지실 분들은 다 같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죠. 아무래도 여럿이 올라가는 편이 기자들의 이목을 끌기 쉬우니까요.”
“이제 유명해질 테니, 저희는 다 함께 올라가야겠네요.”
로잔나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선택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안젤라가 몸을 돌렸다.
때마침 레드 카펫을 밟고 포즈를 취하던 이가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올라가실 차례네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다음으로 레드 카펫에 올라올 이들에게로 향했다.
‘정말이군.’
리암은 자신이 베니스 영화제에 왔다는 것이, 이제야 확 실감이 났다.
그가 심호흡을 했다.
그의 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광된 순간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일 수도 있었다.
굳은 눈빛으로 레드 카펫에 첫발을 디뎠다. 그 뒤를 로잔나가 따랐다.
도현은 그들을 따라 올라가기 전, 맥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차에서부터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라 걱정했는데, 지금은 거의 혼이 나간 것 같았다.
도현이 맥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맥이 쳐다보자, 가볍게 싱긋 웃었다.
“맥, 가요.”
그대로 레드 카펫 위로 올랐다.
“어, 어어….”
맥이 완전히 넋 나간 얼굴로 도현이 가는 대로 딸려 왔다. 아이들까지 올라가자, 서혜나와 이장혁이 서로를 한번 쳐다본 후 동시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내내 담담했던 도현조차 조금 놀랄 정도였다.
‘왜 이렇게 많이 찍지?’
대기 줄에 서서 관찰한 결과, 기자들이 레드 카펫에 오르는 인물들을 모두 열심히 찍는 건 아니었다. 카메라 소리 크기로 그 인물의 인지도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감독도 배우도 모두 무명이었으니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격렬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는 이들이 생각지 못한 부분 때문이었다.
백인 셋과 동양인 셋.
어른 넷과 아이 둘.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기자들이 거의 처음 보는 수준의 기묘한 조합이었다.
심지어 한 아이는 채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어려 보였다.
저 어린아이가 다른 관계자일 리가 없으니,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배우라는 뜻이었다.
베니스 영화제 최연소 동양인 배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만한 소재였다.
기자들의 관심에 당황한 리암 일행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애매하게 레드 카펫 위에 서 있었다.
리암, 로잔나, 맥은 익숙지 않은 상황에 허둥댔고, 부부는 매니저로 참여한 것이라 눈에 띄게 굴지 않았다.
도현은 그들을 기민하게 살피곤, 너무 혼자만 튀지 않도록 적당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번쩍번쩍 터지는 플래시에 맥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건물 앞에서 서 있던 진행 요원이 이제 되었다는 듯이, 들어오라고 말했다.
‘살았다!’
맥의 얼굴이 확 펴졌다.
조금 미숙하고 어리숙하긴 했지만, 그렇게 첫 개막식 레드 카펫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
한편.
영화 전문지 무비데일리의 저널리스트, 전하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번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는 한국의 영화가 하나도 초청받지 못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인으로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이고 일은 일.
그녀는 이번에 황금사자상의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작품들을 취재하기 위해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게 실수였을까.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개막식 레드 카펫 행사가 진행되는 도중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레드 카펫에 올랐다.
처음에 나온 백인 남성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어, 신인이나 무명인 감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나온 인물들은 단연코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신기한 조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하리는 조금 호기심이 든 정도였다. 그 호기심으로 인해 취재가 예정되어 있는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주연 배우 이름에 선명하게 적힌 Do-hyun Lee라는 이름을!
레드 카펫에 참여한 동양인 중, 전하리가 이름을 모르는 이는 방금 건물로 들어간 이들밖에 없었다.
동양인이 외국 감독의 작품에 참여해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대체 왜 한국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알려야 해!’
전하리가 빠르게, 첨부 사진과 함께 회사로 메일을 보냈다.
메일이 국경을 타고 넘어갔다.
한국.
무비데일리 미디어 부문 취재 팀 사무실.
베니스 영화제로 취재를 간 팀원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한 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베니스! 베니스 영화제에 경쟁 부문 초청작 정보 모아! 당장!”
“네?”
갑작스러운 외침에 팀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취재 팀 팀장이 전하리에게서 받은 메일을 공유해 주었다.
“이도현이라는 배우가 저 중에서 누군지 알아내야 해, 빨리!”
팀장이 닦달하던 차였다. 사진을 유심히 보던 한 사람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요즘 아역 미모 수준’이라는 글로 한참 핫하게 인터넷을 달궜던 인물!
그는 확신했다.
“팀장님! <불량경찰> 1화에 나온 적 있는 아역입니다!”
“당장 관련 사진 받아서 기사 써!”
사무실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리고.
[‘불량경찰’ 가출 소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한 기사가 조용히, 인터넷에 올라왔다.
* * *
Palazzo del Cinema의 홀.
넓은 홀 안의 자리를 사람들이 하나둘씩 채워갔다. 리암 일행도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입장이 모두 끝났는지, 짧은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어.
의자가 가득 놓인 단상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올라왔다.
박수 세례와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작년 황금사자상 작품의 OST네.”
“정말요?”
로잔나의 말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화의 OST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장엄하고 화려한 연주였다.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는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고.
짝짝짝!
한차례 박수 소리가 울리고 스태프들이 단원들의 의자를 치웠다.
잠시 후.
단상 위에 한 여성이 올라왔다.
이탈리아 유명 배우이자,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다.
“올해에도 베니스 국제 영화제를 찾아주신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위원장의 인사말과 연설이 이어지고.
영화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그 공로를 인정받아 평생공로상을 수여받았다.
나오는 면면들이 모두 유명한 인물이라 그런지, 맥의 입이 연신 벌어졌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연설이 한차례 지나간 다음, 다시 단상에 오른 심사위원장이 올해의 초청작들을 소개했다. 경쟁 부문은 21편의 작품이 초청되었다.
이어, 심사위원장이 작품과 감독 이름을 한 번씩 호명했다. 호명된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리암은 긴장 때문에 호명을 놓쳤다가, 로잔나가 일어나라고 알려준 후 어정쩡하게 일어났다가 앉았다.
베니스 영화제 관계자들이 나와서 몇 번의 연설을 한 후 개막식이 끝이 났다.
리암은 감독 인터뷰를 하러 따로 이동했고 남은 이들은 Lexus에서 운영하는 칵테일 라운지에 앉아서 리암을 기다렸다.
저녁 시간대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지중해의 하늘에 낙조가 들어 붉은빛이 번졌다.
“뭐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맥이 허탈한 얼굴을 했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곁에서 도현이 발을 동당거리고 있었다.
‘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레드 카펫 앞에 서자 완전히 몸이 굳어버렸다.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했다.
맥의 시선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니야.”
말을 꺼내기도 애매해서 맥이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 의아한 눈빛을 하다가, 다시 하늘을 감상했다.
칵테일을 마시던 이장혁이 문득 웃으며 말을 꺼냈다.
“한국에 가면 자랑해야겠다. 아들 덕에 베니스 영화제에도 참석했다고.”
“레드 카펫도 밟은 것도 빼먹지 말고.”
“당연하지.”
두 사람이 아무리 성인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설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레드 카펫을 밟는 경험은 그들에게도 무척이나 새롭고 재밌는 일이었다.
“도현아, 고마워. 엄마 아빠가 도현이 덕을 봤네.”
“네? 아니에요. 같이 와주셔서 제가 감사한걸요.”
한국에서 휴가도 제대로 못 즐기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도현을 위해 무리해서 이 주라는 시간을 빼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리암이 돌아올 때까지 라운지에서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인터뷰를 마친 리암이 조금 지친 기색으로 돌아왔다.
“잘하고 왔어요?”
로잔나의 질문에 리암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잔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조금 쉬다가, 시간에 맞춰서 올해의 개막작인 의 공식 스크리닝에 참석했다.
가 개막작이고 가장 유력한 황금사자상 후보인 만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렸다.
조금 늦게 와서 그런지 스크리닝 레드 카펫 행사는 이미 끝난 것 같았다.
그들은 상영관에 들어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차 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도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이윽고.
극장의 불이 꺼졌다.
기다림 끝에 에드워드 녹스 주연의 가 상영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