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특별한 이유 (7)
상영관에 자리를 잡은 도현은,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잠시 도현의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깊게 눌러쓴 모자, 얼굴을 가린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어제도 도현이 상영관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조금도 안 보일 만치 칭칭 감싼 패션이 인상 깊어서 기억에 남았다.
‘영화를 좋아하시나 보네.’
저 사람도 도현처럼 어제오늘 빠지지 않고 영화를 관람한 것 같았다.
도현이 너무 쳐다봐서일까.
남자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언뜻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아서, 도현이 살짝 겸연쩍게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남자도 눈인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라면, 상당히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보였다.
얼굴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지만….
도현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잠시 후, 상영이 시작되었다.
* * *
“으아, 피곤하다.”
맥이 쭉 기지개를 켜며 상영관을 나왔다. 영화의 재미 유무와 별개로, 어제오늘 내리 영화를 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일행이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는데, 로잔나가 말했다.
“영화관 주변에 유명한 파스타 전문점이 있어요.”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네요.”
그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상영관에서 나올 때였다.
“잠시, 잠시만요!”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가득한 가운데, 한국어가 그 사이를 뚫고 파고들었다.
한국 사람도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도현 배우님!”
우뚝.
도현의 발이 멈춰 섰다.
“우리 도현이를 말하는 건가?”
서혜나도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달려온 것인지 안경을 벗고 땀을 닦아내는 한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헉, 저는 무비, 허억, 데일리의,”
“숨 좀 고르세요.”
도현이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건네주었다.
혹시 몰라 덧붙이기도 했다.
“새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여성이 생수를 받아 들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한결 살겠다는 표정을 지은 여성이 안경을 도로 쓰고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비데일리의 영화 전문 기자 전하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기자가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예의 바르게 인사를 돌려준 도현이었다.
“이도현 배우님 맞으시죠?”
전하리는 혹시 몰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그 질문에 도현이 맞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리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떻게 인터뷰를 따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조그맣고 까만 머리통에 혹시나 해서 불러본 게 다행이었다.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베니스 영화제 특집 기사에 특별 부록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 명함은 여기 있어요. 혹시 보호자 분이….”
“제가 엄마예요.”
서혜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무비데일리 영화 전문 기자 전하리입니다. 저희 잡지에서 이도현 배우님 인터뷰를 기사로 싣고 싶은데, 혹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도현이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보호자에게 먼저 의사를 물은 전하리였다.
그러나 서혜나는 오히려 도현을 보았다.
“도현아, 어때. 인터뷰하고 싶니?”
도현이 고민하는데, 옆에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리암이 말을 얹었다.
“어차피 스크리닝 일정 후에 기자회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 인터뷰도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
리암의 지원 사격에 전하리가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이도현 배우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불량경찰> 송하 역할 이후로, 배우님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이번에 인터뷰가 나가면, 배우님을 기다리는 팬분들이 굉장히 좋아하실 겁니다!”
“패, 팬이요?”
당황스러운 단어에 도현이 말을 더듬었지만, 전하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서는 점점 소식이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불량경찰>의 인기와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다.
도현은 그에 앨리슨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도현이 옅게 웃었다.
‘정말 그게 예행연습이 되어버렸네.’
도현이 고개를 들고는 전하리를 보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고민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뷰할게요.”
도현의 승낙이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전하리가 크게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도현이 덧붙였다.
“다만, 인터뷰는 조금 나중에 해도 될까요?”
오늘은 놀러 다니기로 한 날이었다. 인터뷰는 중요했지만, 그보다 맥이 더 중요했다.
인터뷰를 따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전하리는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했고, 그들은 공식 일정이 끝난 후 일정을 조정하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멀어지는 전하리를 보면서 서혜나가 중얼거렸다.
“우리 도현이가 이제 인터뷰도 하네.”
도현이의 촬영장에 구경 간 날부터, 아이가 높게 날아오르리란 건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게 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서혜나가 묘한 감상에 휩싸인 사이, 전하리와 도현이 한국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멍하니 듣고 있던 맥이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기로 한 거야?”
“네, 하기로 했어요.”
“오….”
맥이 도현을 약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어디서 인터뷰 제안 안 들어오나.
조금 서러운 맥이었다.
도현 일행은 리도섬에서 점심을 먹고 베네치아섬으로 이동했다.
중세 유럽에 온 것만 같은 거리를 걷고, 다양한 곳들을 구경하면서 다니다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갔다.
영화제 기간이라 사람이 많이 몰려서 한참 줄을 서고 난 후에야 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는 유독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는데,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을 전시한 곳 앞이었다.
‘다비드….’
도현은 잠시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휙휙 저으며 털어냈다.
도현이 다비드 조각상을 보았다.
가장 완벽한 남성의 인체로 평가받았다는 게 절로 납득이 될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도현이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맥이 눈가를 찡그렸다.
“저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음.
도현이 외면해왔던 것을 콕 집는 맥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술품을 감상하기에는 조금 어린 나이인 두 아이였다.
도현 일행은 일정을 빨리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야…. 자, 잠이 안 와….”
맥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자야 해요, 맥.”
“아는데… 하 씨.”
맥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축 늘어졌다.
도현은 그런 맥을 보다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을 젖혀놓았기 때문에 푸른 밤하늘에 휘영청 높이 뜬 달이 보였다.
‘내일이네.’
기다림 끝에, 도현의 첫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 다가왔다.
* * *
도현 일행은 떨리는 심정으로 리도섬의 호텔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을 픽업하러 올 차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잔나가 한숨처럼 웃고는 말했다.
“개막식 때보다 몇 배는 더 떨리네요.”
그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때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지금은 숨을 쉬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리암은 아까부터 계속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조금 익숙해진 Lexus 차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로잔나가 꽁꽁 얼어붙은 리암을 재촉했다.
“가아죠.”
“그래, 가, 가야지.”
리암이 차에 탑승하고, 이어서 남은 사람들도 착석했다.
리암의 심정도 모르고, 차량은 쭉쭉 도로를 달렸다. 상영관이 가까워질수록 리암의 낯이 해쓱해졌다.
스윽.
차가 멈춰 서고 이내 문이 열렸다.
차에서 내리던 도현은 멈칫했다.
“사람이 많네요?”
넷째 날 상영되는 영화이고 유명한 감독의 기대작도 아니니만큼, 레드 카펫 행사에 기자들이 많이 몰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의 기자들이 와 있었다.
개막식 때와 달리, 한국 기자로 보이는 이들도 드물게 눈에 띠었다.
그들 앞으로 안젤라가 다가왔다. 웃으며 인사한 그녀가 말했다.
“바로 레드 카펫에 올라가시면 되세요.”
그 말에 도현은 새삼 깨달았다.
이 순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도현이 리암을 쳐다보았다. 리암은 이미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린 잘할 거예요, 리암.”
“허.”
리암이 헛웃음을 쳤다.
어째 이 꼬마는, 그가 해야 할 일을 자꾸만 뺏어 갔다.
어린아이의 말에 긴장이 풀리는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더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지.
리암이 어깨를 쫙 폈다.
“그래, 가자.”
리암이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지 시각 오후 2시.
의 공식 스크리닝 행사가 시작되었다.
* * *
[‘The Wanderer’ 베니스 영화제 레드 카펫 & 스크리닝 현장 공개!]
[‘불량경찰’ 화제의 아역 송하! 이젠 월드스타로?]
[가출 소년, 베니스에 뜨다… 네티즌 반응 “이게 무슨 일?”]
[베니스 레드 카펫 밟은 韓 최연소 배우!]
[‘가출 소년’ 송하, 레드 카펫에서 떡잎부터 다른 미모…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기사가 쏟아져 내렸다.
[(사진 = 베니스 국제 영화제 ‘The Wanderer’ 레드 카펫 행사)
현지 시각으로 오후 2시, 한국의 배우 이도현이 영화 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고 있다.
이도현은 리암 호프 감독의 데뷔작 의 주연 배우로 제6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베니스 레드 카펫에 서게 됐다.
이도현은 현재 방영 중인 범죄 수사 드라마 <불량경찰> 1화에 부모님의 불화로 인해 가출한 소년 ‘송하’ 역할을 맡아 연기한 적이 있다.
한편, 배우 이도현은 한국 나이 기준 9살로 베니스 레드 카펫 역사상 가장 어린 배우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도현 배우가 좋은 결과를 얻어 베니스 영화제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한국의 배우가 최연소라니 자랑스럽습니다.
⌞국뽕이 차오른다.
- 와 ㄷㄷ 이거 미친 거 아님?
⌞ㄹㅇ 수상하게 되면 진짜 미친 거지
⌞설마 수상하겠음?
⌞왜 할 수도 있지.
- 굳이 수상하지 않아도, 최연소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는 듯.
⌞22 이거 진짜. 심지어 경쟁 부문임!
⌞진짜 대단하다. 나는 9살 때 뭐 했나….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뼈 때리네;;
- 나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ㅠㅠ. 베니스 영화제가 유명한 영화제야?
⌞ㅇㅇ 저기 기사에 세계 3대 영화제라고 쓰여 있는 거 안 보임?
⌞베니스 국제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영화제입니다. 한국의 어린 배우가 베니스 영화제에 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그리고 이조차도 부족하다는 듯이.
[英의 할리우드 스타 에드워드 녹스, ‘The Wanderer’ 레드 카펫에 참석… 깜짝 등장?!]
[재조명받는 강이든 배우의 기자 회견, “재능 있는 어린 배우”]
장작을 던진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이 상황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도현은.
“곧 시작하겠네요.”
가벼운 설렘을 담은 미소를 띠었다. 그 옆에서 맥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 에드워드 녹스가 왔어!”
밖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에드워드 녹스 외에도 몇몇 유명한 인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현이 그쪽을 보는데, 정면을 보고 있던 에드워드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기분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깜빡.
에드워드가 눈인사를 보냈다.
‘아, 혹시?’
도현의 눈이 살짝 커진 찰나.
안내 방송과 함께 극장의 불이 꺼졌다.
도현은 생각을 미뤄두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