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특별한 이유 (9)
아주 미세한 균열에서부터 시작된 어그러짐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한번 깨지기 시작한 유리잔이 속절없이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소년이 애처로이 말했다.
“형제님, 저는 죄를 지었어요. 저는 제8계명을 어겼습니다. …저는 거짓 증언을 했어요.”
순진한 어린양의 낯을 하고선 간특하게 혀를 놀렸다.
제4계명.
제7계명.
그리고 제10계명.
소년의 입에서 자신이 범한 계명이 흘러나왔다.
문이 단단히 닫힌 교리실에서, 역광에 집어삼켜져 반쯤은 가려진 채로 소년의 죄악을 낱낱이 고했다.
유가 고개를 들었다.
내내 슬픔에 젖었던 입매에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 주세요, 형제님.”
흐릿하게 어두웠던 두 검은 눈동자가 화면에 선명히 비쳤다.
에드워드는 살짝 몸을 떨었다.
소년은 마치, 선악과를 건네는 요사스러운 뱀 같았다.
유가 재차 말했다.
“증명해줘, 이사야.”
“…어, 어떻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유의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것을 억누르려는지, 애써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관객석은 어느새 쥐 죽은 듯이 정적만이 가득했다. 숨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릴 정도였다.
* * *
이사야는 제7계명을 어겼다.
유와 함께였다.
골목길에서 두 소년이 열기에 취해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이사야가 웃다가 푸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찰칵.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 * *
이사야가 집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창고까지 찾아간 끝에, 소년은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콜록, 콜록!”
이사야가 기침하며 먼지를 털어냈다. 훌훌 털어내고 나서 제 모습을 찾은 그것은, 이젠 쓰지 않는 연습용 바이올린이었다.
이사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유를 쿠키로 꾀어낼 때 짓던 미소도 신부님과 대화할 때 짓던 미소도 아닌, 온전하게 기뻐하는 순수한 미소였다.
* * *
“있잖아, 유. 나는 너와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네 덕분에 내가 얼마나 멍청한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거든. 널 원망하지도 않아. 널 더 알게 된 게 기쁘니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일까.
유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알려주고 싶어졌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유, 내가 약속했잖아. 네게 증명해 주겠다고.”
관객들은 지금 상황이 고해 성사 할 때와 완전히 반대의 구도임을 깨달았다.
독사처럼 이사야의 발목을 물고 밑바닥으로 끌어당기던 유는, 그가 도저히 폄하할 수 없는 감정에 맞닥뜨렸다.
“네가 먼저 증명해 달라고 했으니까, 거절은 안 돼.”
찰칵.
운명의 수레바퀴가 속절없이 굴러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끼긱, 끽!
바이올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살려달라고 단말마의 외침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아씨, 이게 왜 이래!”
유가 괜히 성을 냈다.
“천천히 해야지. 자, 팔목에 힘을 너무 줬잖아.”
“으윽….”
유가 바이올린을 눈으로 뚫기라도 할 듯이 매섭게 노려보다가, 다시 홱 하니 잡았다.
끼기긱, 끼긱!
다시 한번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음악 소리가 고조되며, 일상이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성당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집에서 홀로 손짓으로 우스꽝스럽게 연습을 했다.
점점 유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꽃피어 갔다.
악마의 비명 같았던 소리가 점점 처음 성당에 발을 딛게 만들었던 연주와 닮아가는 것을 보며, 관객들은 희열과 전율을 느꼈다.
길거리에서 남의 지갑을 훔치던 고아는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마냥 그 변화를 즐길 수 없었다. 관객들은 저마다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며 탄식했다.
처음에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던 소년의 현실이.
“씨이발! 제대로 가져오라고!”
와장창!
조안이 손에 쥐었던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고함을 지르는 조안을 유가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몸에 남은 화인처럼 따라붙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고즈넉한 성당의 한 곳에서 아름다운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이 천천히 성당 건물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첫날 성당에 발을 들였던 유처럼 창문을 통해서 소리의 근원지를 훔쳐보았다.
한 소년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와아….”
이사야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연주하고 있는 소년은, 다름 아닌 유였다.
“너 진짜 재능 있다. 천재인가 봐.”
“뭔 헛소리야?”
유가 코웃음을 쳤다.
“진짠데….”
“아직 멀었어.”
유가 단호히 말했다.
유가 연주하고 있는 음악은 드뷔시의 <달빛>.
이사야가 영화가 시작할 때 짧게 연주했던 곡이자, 유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었던 곡이었다.
유가 바이올린을 다시 잡았다.
이 곡을 온전히 연주하게 되면….
유의 눈이 처음으로 미래를 그렸다.
* *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소매치기 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안이 갱단과 손을 잡았다는.
소매치기 아이들을 희생해 마약을 유통하기로 약속하고, 갱단에서 높은 자리와 돈을 받기로 했다는.
그런 소문이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너 요즘 눈에 띄잖아. 그리고 수금도 좀 줄지 않았어?”
제이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를 보았다. 유는 속이 콱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거대한 그림자는 소년이 달린 거리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길어져 계속해서 따라왔다. 뿌리치고 떨쳐내도 결국은 그림자 아래였다.
“내가… 알아서 할게.”
유가 시선을 회피했다.
유는 평소처럼 성당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숙제하는 이사야의 옆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 불길한 평화에 관객들 사이에 불안함이 전염병처럼 퍼져갔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오히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주어진 짧은 유예 같았다.
에드워드는 감탄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 주면서도 이토록 불안감을 선사하다니. 아역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감독의 실력도 대단한 것 같았다.
그가 긴장된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로 인한 흥분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력만으로도 감탄을 넘어 경악스러웠지만, 에드워드는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았다.
저 소년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안녕?”
탕!
유의 경계심 어린 눈이 히죽, 웃고 있는 조안을 향했다. 이미 보았을 텐데 어떻게든 숨기려고 바이올린 가방을 등으로 가리고 있었다.
조안이 장황하게 헛소리 늘어놓았다. 굳은 낯으로 조안의 말을 듣던 유가 긴장으로 창백하게 질린 채로, 가운뎃손가락을 보란 듯이 치켜올렸다.
“꺼져, 약쟁이 새끼야.”
몇몇 관객들이 감탄했다. 초반부터 느꼈지만,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맞서는 모습이 유가 그동안 고된 삶을 얼마나 잡초처럼 버텨왔을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로 바로.
“넌 자꾸 기어올라서 문제란 말이야!”
컥!
유의 얼굴이 거칠게 돌아갔다. 유가 얻어맞아 붉어진 볼을 잡고선 독기 어린 눈으로 조안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근데 아까부터 뒤에 숨긴 건 뭐야?”
조안의 말에, 유의 몸이 일시적으로 뻣뻣해졌다. 유의 반응에 조안이 씨익, 꺼림칙하게 웃었다.
“어? 내가 약을 먹었다고 해서 그것도 안 보일 줄 알았어? 내가 얼마나 잘 보는데! 봐! 네 얼굴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그리 말하면서 무어가 재밌는지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가진 광기가 화면 밖으로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유는 바이올린을 지키려고 했지만.
퍽, 퍼억!
폭력 앞에서 소년의 의지는 무참히 짓밟히고, 빼앗겨 버렸다.
조안에게 바이올린을 빼앗기면서도 끝까지 손가락에 힘을 빼지 않는 유에 관객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차라리 바이올린을 포기하지.’
유에게 바이올린이 어떤 의민지 봐왔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면에서 조안이 욕심에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깜짝 선물도 받았으니, 난 이만 갈게. …아! 제, 제, 제… 제이콥! 제이콥한테는 비밀이야! 말해서 도망가면 그 자리는 네가 채우는 거야. 알았지?”
결국 빼앗기는구나.
관객들이 안타까움을 느낄 때였다.
기묘한 침묵이 극장 안을 감쌌다.
‘…뭐?’
에드워드가 눈을 크게 떴다.
“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지 못한 눈빛.
싸구려 백열등 아래서 유독 선명하리만치 붉은 피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시이팔, 너, 이….”
털썩!
허수아비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진 조안이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유의 발밑으로 붉은색이 퍼져 나갔다.
관객들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 들어찼다. 극장 안이 소리 없는 경악으로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화면이 힘없이 늘어진 발과 붉은 궤적을 비추었다. 침대 밑으로 밀어 넣은 유가 옷장의 옷을 모조리 꺼내 붉은 웅덩이가 고인 곳에 던졌다.
옷에 붉은색이 스며들었다.
놀라우리만치 침착한 태도에, 관객들은 이것이 계획된 살인이었나 의구심이 일었지만.
문을 닫을 때 헛손질하는 움직임과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축축하게 늘어진 옷에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문고리를 보고 있는 옆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유가 천천히, 화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관객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검은 눈동자에 한가득, 지독한 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 * *
소년은 비틀거리면서 계속해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가야만 한다는 듯이, 식은땀에 온통 젖은 채로 발을 움직였다.
소년이 하얀 외벽에 몸을 기댔다. 불안정한 숨결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몰랐다.
평소에 만나던 시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못 박힌 사람처럼 벽에 기대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유?”
간절히 기다리던, 어쩌면 오지 않기를 바랐던 목소리가 울렸다. 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 만난 날처럼, 그날보다 더.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우는 동물처럼 잔뜩 날이 선 채로 이사야를 보았다.
처음 보는 유의 모습에 이사야가 당황해서 창문을 넘어오려고 했지만, 유가 절박하게 외쳤다.
“거기 있어, 이사야!”
푸르게 질린 입술로 덜덜 떨면서,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거기 있어….”
이사야와 유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달빛이 두 소년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이사야… 내가.”
정적 끝에.
“내가… 제5계명을 어겼어.”
유의 고해가 울리자, 관객들은 교리실에서 했던 고해 성사가 떠오르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때는 이사야의 공간을 침범해서 천천히 먹잇감의 숨통을 빼앗는 뱀처럼 사특한 혀를 놀리던 소년이, 창문이라는 얄팍한 벽을 세워놓고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어스름했던 달빛이 조금 밝아지며, 유의 옷 곳곳에 튄 붉은 핏방울이 시야에 드러났다.
“내가, 내가 제5계명을 어겼어. 나, 난 악마야, 이사야. 난 악마야. 여긴 지옥이야.”
잔뜩 일그러진 낯으로.
“지옥 같아.”
모든 걸 토해냈다.
‘…완전히 미쳤군.’
의자 손잡이를 잡은 에드워드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다. 비단 핏줄뿐만 아니라, 그의 팔등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화면에서는 유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데도, 붉게 충혈된 두 눈이 악마 같기보다는 더없이 처량하기만 했다.
“하지만… 난 지옥에서 살고 싶지 않아.”
제 모든 감정을 토해낸 끝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진실된 감정을 내보였다.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막연한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이사야를 응시했다.
“어떡하지, 이사야?”
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유가 창문을 넘어 성당에 발을 디뎠던 그 어느 날처럼, 이사야가 창문을 넘어 유가 있는 곳으로 갔다.
달빛이 내리쬐는 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