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15)화 (116/582)

제115화. 특별한 이유 (10)

때때로 운명은 더없이 비정해서, 소년의 작은 몸과 영혼은 그것을 견뎌내기엔 너무도 여리고 미약했다.

유의 시선이 못 박힌 듯,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이 소년의 시선을 따라 초점을 이동했다.

희게 긁은 자국이 남은 나무 바닥. 손톱이 부서져 피가 엉겨 붙은 손끝, 침대 밖으로 내뻗은 팔.

처참한 광경이었다.

“살아 있었어.”

유의 말이 나옴과 동시에 관객석은 저 흔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누군가는 기민하게, 유의 말이 과거형임을 눈치챘다.

이제껏 버텨왔던 것이 무색하게도 유는 이 순간 쉽게 흔들렸다. 그대로 모든 게 부서질 것 같았다.

그때,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유, 기억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카인과 아벨 이야기 말이야.”

더없이 다정히 말했다.

유의 눈이 어느 한 시점을 더듬었다. 어째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몰랐지만, 의문은 금방 사라졌다.

오후의 햇살을 닮은 목소리와 기억은 부서지려는 영혼을 붙잡아 주었다. 숨통이 트였다.

유는 숨을 쉬기 위해서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내가 본 소설책에서는 카인의 표식이 강함의 증명이라고 했어. 카인은 저를 둘러싼 세계를 부수고 나와 운명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전에 소년이 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해석에 혼란에 물든 눈이 이사야를 향했다.

그 눈을 마주하면서도 이사야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그들을 묶어놓았던 규율을 깨고 나아가기로 했다. 이 한 걸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라도.

“유. 교리에 새겨진 선도, 악도 떠올리지 마. 나는 이제 네게 증명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내게 고해하지 마.”

소년이 사슬을 풀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너는 그저 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거야. 거기엔 아무런 증명도, 고해도 필요 없어.”

에드워드는 지금 와서야 영화의 제목을 떠올렸다.

방랑자.

운명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결국에는 그 운명조차 제 손으로 풀고 나와 삶을 방황하는 두 소년은 방랑자들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거친 소용돌이에 휩싸여 간신히 버티는 사람처럼, 혹은, 너무 눈이 부신 것을 보아 찡그린 사람처럼.

투둑.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레바퀴에 속절없이 밀려왔던 두 소년은, 이제는 제 발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 발걸음이 어딜 향할지라도.

지직. 직.

천이 나무 바닥에 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 소년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깃든다.

이곳만 나가면.

무사히 벗어나기만 한다면.

늘 그랬듯, 시련 앞에서 소년의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 * *

텅! 터덩!

천 뭉치 사이로 튀어나온 손에 남성이 기겁했다.

“망할! 이게 뭐야!”

낭패감을 느낄 새도 없이, 유가 이사야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대로 다른 이가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갔다.

“쫓아! 저 새끼들 쫓아!”

뒤에서 그들을 쫓는 소리가 들렸다.

추격전은 긴박하게 이어졌다.

“으윽!”

“샨!”

이사야가 비틀거리며 두 소년의 손이 떨어졌다. 이사야가 도로 중심을 잡으며 소리쳤다.

“괜찮으니까 그대로 달려!”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짓씹은 유가 앞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 이사야가 따라서 달렸다.

타닥, 탁.

밤거리를 달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그저 그대로 두고자 했다.

네 말처럼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고, 그렇게. 그러면 네 말처럼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너의 다정함에 기대어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너는 나랑 엮이면 안 됐어, 이사야.”

유가 자조했다.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유는 이사야가 자신을 원망하리라고 생각했다. 뱃속이 저며 드는 통증이 일었지만 감내할 일이었다.

그런데 왜 너는.

“내 탓이야, 유.”

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삼킨 것 같았고 부드러운 봄 햇살이 심장 부근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의미 모를 아득한 감정이었다.

“내가 시작이었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든 거야.”

왜 너는, 그렇게 서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걸까.

이사야.

* * *

“이사야!”

샨, 어딜 간 거야. 어디를.

유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연신 이사야를 불렀다.

손을 놓으면 안 됐다.

그때 손을 놓으면 안 됐다!

유의 눈에 붉게 핏발이 섰다.

관객들은 긴장감에 숨을 죽였다.

이사야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유의 행동은 분명 무모했지만, 그 누구도 유에게 어리석다고 하지 못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관객들은 초조함에 주먹을 쥐었다. 제발 도망쳐,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닿은 건지, 유가 허름한 건물의 철 계단으로 튀어 올라갔다.

탁, 타닥.

유가 한 층 정도 올라갔을 때, 건물 밑에 남성들이 지나갔다.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들이 떠나갔음에도 유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철컥!

거칠게 옥상의 문고리를 잡아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옥상 문이 열리며 달빛이 쏟아짐과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었다.

벽에 붙어 서서 주변을 살피는 이사야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이사야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유.”

이사야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사야의 시선이 하늘 위에 홀로 뜬 달로 향하고.

하늘로 향했던 화면이 다시 아래로 내려오며, 달빛 아래서 난간을 잡은 유로 장면이 바뀌었다.

유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확장된 검은 눈동자에,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 이사야가 들어왔다.

“샨!”

난간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외쳤다. 목이 쉬어 터질 듯이 외쳤지만, 소리가 닿질 않았다.

이사야를 향해 다가가는 무리가 보였다.

으득.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지친 낯으로 숨을 고르던 이사야가 굳게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찾으러 갈게, 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한 이사야가 손으로 벽을 짚었다. 또렷한 푸른 눈이 앞을 향했다.

이사야의 발이 한 걸음 나아갔다.

“아, 안돼….”

간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축축하게 젖은 유의 얼굴이 보였다.

“하느님, 제발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온통 쉬어서, 차라리 흐느낌에 가까웠다.

이사야를 향해, 남자들의 무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사야가 조금씩 움직이는 방향과 같았다.

유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빌어보아도, 소년의 바람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 유일한 사람은 저기에 있었으니까.

그 순간.

소년의 눈에, 급박한 상황에 내내 잊고 있었던 바이올린이 들어왔다.

미친 사람처럼 허겁지겁 바이올린 가방을 열고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 * *

소년은 방랑자였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부수고 나와, 제 삶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방랑자였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삶은 늘 그랬다.

* * *

바이올린을 쥔 손이 공중에서 덜덜 떨렸다.

악마의 속삭임이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이대로 눈을 감는 거야.

눈을 감고 귀를 막자.

달이 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툭.

식은땀이 이마에서 턱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소년이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소리가 멎는다.

에드워드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악마는 소년이었으니까.

한계 끝까지 몰린, 벼랑 끝에 선 소년의 절박함과 혼란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 압도적인 연출 앞에서 관객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부정하고, 부정하며 방황하던 소년은.

“이사… 이사야.”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듯이, 이사야의 이름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희미한 바이올린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유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휘날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떠올랐다가, 사르륵 흩어져 내렸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누그러진 눈매가 보였다. 잔디가 물결치는 곳에서 한 소년이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사각, 사각.

종이에 글을 적는 소리가 들렸다.

시를 옮겨 적는 손과 종이가 클로즈업되었다가, 화면이 이동하며 그 옆에서 팔을 베고 엎드려 있는 소년을 보여주었다.

깜빡, 깜빡.

소년이 평온함에 젖어 속눈썹을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나른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사각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 감았던 눈이 떠졌다.

화면이 멀어지며 얼굴을 온전히 비추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넋이 나간 채로 제 손에 쥐어진 바이올린을 응시했다. 화면도 소년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 바이올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손에 힘이 풀리고.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화면이 다시 멀어지며 성당의 교리실을 비추었다.

소년은 창가에 서 있었다.

무수히 많은 상처가 새겨진 손을 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 맞은편에서 한 소년이 즐거운 얼굴로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짝짝짝!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쳤다.

하얀 벽과 웃는 소년들, 온화한 공기가 맴도는 풍경이 이지러지고.

환한 빛 속에서 기쁨으로 별처럼 반짝였던 푸른 눈이, 반쯤 어둠에 잠겨 서러움을 담고 일그러졌다.

좁고 초라한 골목길이었다. 어둑한 공간에서, 달빛에 희게 너울진 푸른 눈을 한 채로 말했다.

- 내가 시작이었어.

다시, 소년은 홀로 남았다.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가득한 낡고 허름한 건물 옥상에 홀로 서서,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잔잔한 독백이 극장 안을 울렸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 * *

유가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관객들은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보았다. 숨이 막힐 만큼 긴장감이 몰아쳤던 순간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다.

누군가는 바이올린을 드는 소년의 모습에서 성당에서 연주하던 모습을 겹쳐 보았다.

활이 내리그어졌다.

부드러운 선율이 밤공기를 타고, 나아가 관객석까지 은은하게 감쌌다.

검은 눈동자가 내리뜬 눈꺼풀에 가려졌다.

무섭지는 않았다.

바이올린 소리가 있을 때면, 유는 언제나 이사야와 함께 있었으니까.

이 곡을 온전히 연주하게 되면 네게 전해질까, 이사야?

* * *

검푸른 하늘에 희미한 달빛이 은은하게 소년을 밝혔다.

<달빛>이 물밀듯, 쏟아져 내렸다.

부드러웠던 연주가 거칠어지고, 이내 격렬해졌다. 소년의 심정을 토해내는 것처럼, 듣는 이의 영혼까지 모두 헤집어 놓을 듯 폭발적인 연주였다.

푸른 달빛을 닮았으면서도 붉고 뜨거운 열기를 품고 밀려드는 바이올린 연주에 관객들은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텅 빈 옥상에서 홀로 연주하는 소년의 모습과 여럿의 발소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까만 밤하늘과 그 위에 달을 보여주다가 빛이 꺼지듯 검게 물들었다. 화면이 검게 물든 후에도 연주가 조금 이어졌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극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이올린 소리는 멎었는데 사람들은 소리를 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 뒤.

누군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려던 때였다.

‘뭐지?’

관객들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까맣게 변했던 화면이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눈을 뜨는 것처럼, 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던 화면이 점점 선명해지며,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이 보였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화면으로 아직은 모습을 감추지 않은 달이 희미하게 보였다.

푸른빛과 주홍빛이 섞인 하늘의 한편에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듯이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잠시 후.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왔다.

* * *

CAST

Yu  Do-hyun Lee

Isaiah  Mc Buckler

Joan  Avery Lush

(…)

Directed by Liam Hoff

Produced by Liam Hoff

Written by

Liam Hoff and Do-hyun Lee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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