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특별한 이유 (12)
리암의 인사처럼, 그들은 스크리닝 일정을 끝낸 후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뜬금없는 로잔나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을 때.
“영화 등급이 R로 판정된 덕분에, 같이 영화를 볼 수 있었잖아요.”
“아.”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최종적으로 받은 등급은, R 등급이었다. 17세 미만은 부모나 성인 보호자가 동반해야 볼 수 있는 등급이었다.
물론, 보호자가 동반해도 6세 미만은 관람할 수 없었으나 도현의 나이는 미국 나이 기준 7세로 아슬아슬하게 그 기준선을 넘겼다.
“아무래도, 잔인한 부분은 모두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니까.”
리암의 말대로였다.
‘The Wanderer’는 유가 조안을 찌르는 장면이나 시체를 옮기는 장면에서 전신을 모두 보여주지 않고, 나이프 날이 빛나는 모습이나 피를 뿜는 얼굴, 그리고 튀어나온 손만 비추어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간접적으로 나와서 더 무섭던데.’
이장혁은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보여주면 그렇구나 할 텐데, 손이나 잔뜩 긁힌 바닥을 보여주니 오히려 심장이 떨렸다.
이장혁이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도현이 들뜬 얼굴로 과일 하나를 오물오물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았을 땐 무표정한 얼굴이라고 하겠지만, 이장혁의 눈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눈동자와 얕게 상기된 뺨이 보였다.
‘유가 내 아들이라니….’
보고 또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건 그의 아내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서혜나는 내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에 걱정도 되고 화도 났지만….
“맥, 이것도 먹어봐요. 맛있어요.”
“웩. 풀떼기잖아.”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 그의 욕심인가 싶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결국, 아이가 연기하고 싶단 소리에 어떤 배역인지 자세히 묻지 않은 그들의 탓이었다.
묻지 않은 게 아니라 묻지 못한 것이라 해도 다를 것 없었다. 그 또한 그들의 업보였으니까.
일단, 오늘은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며 축하하는 게 우선이었다.
“도현아, 이것도 먹어.”
이장혁이 도현의 접시에 초콜릿으로 장식된 디저트를 올려주었다. 도현의 귀가 조금 쫑긋했다.
‘잘 먹네, 우리 아들.’
이장혁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 * *
“이제… 이제 어딜 가야 하더라?”
“기자 회견이요.”
전날, 스크리닝을 마치고 그들만의 파티를 즐기며 여유로이 자축했던 것과 다르게.
다음 날 그들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다.
막 포토콜을 마치고 온 리암이 지친 낯을 했다. 로잔나가 그런 리암을 달래듯이 말했다.
“기자 회견만 마치면 오늘은 쉬잖아요. 빨리 일어나요.”
“끙… 그래, 그렇지.”
잠시 늘어졌던 리암이 벌떡 일어났다. 사실, 힘들어하는 것도 일종의 엄살에 불과했다.
힘들다는 사람이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 있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기자 회견장에서 안내해준 사람은 안젤라였다. 도현 일행은 익숙하게 안젤라와 대화를 나눈 후, 기자 회견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검은 커튼이 쳐진 출입구 앞에서 들어갈 준비를 했다. 회견장 안을 슬쩍 들여다본 리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간에 상영이 끝난 탓에 기자 회견이 다음 날 이뤄졌는데도, 많은 수의 기자들이 찾아온 탓이었다.
새삼, 어제 그 열렬한 반응이 꿈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기자 회견장에 발을 들인 건 리암이었다.
리암은 몇 걸음 가다가 멈칫해야만 했다. 그가 등장하자 박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로잔나도 올라가고,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도현아, 잘하고 와!”
이장혁이 도현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 편하게 해. 하고 싶은 대로, 알지?”
“네, 그렇게 할게요.”
부모님의 응원 속에서 도현은 기자 회견장에 발을 디뎠다.
기자 회견장 벽은 자주색으로 되어 있었는데, 벽 곳곳에 사자 그림과 68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그 앞에 붉은색으로 ‘La Biennale di Venezia’라고 써진 흰색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자리마다 마이크와 물병, 그리고 컵이 있었다.
맥까지 올라오고 나서,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표가 적힌 자리에 착석했다. 휘파람과 환호, 그리고 박수 소리가 울리다가 잦아들었다.
한쪽에 자리한, 진행을 도와줄 영화제 측 사람이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한 후, 한 사람씩 이름을 불렀다. 한 명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박수 소리와 환호 소리가 기자 회견장을 메웠다.
맥이 목이 타는지 물병을 따서 마셨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앞에 놓인 물컵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진행자가 감독인 리암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에 리암이 대답하면서 기자 회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데미안>에 관련된 질문도 들어왔다. 혹시 유가 싱클레어를 새롭게 해석한 캐릭터냐고 묻는 질문에, 리암이 웃으며 답했다.
“유는 싱클레어보다는 크로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네, 싱클레어를 어린 시절 괴롭혔던 불량배요.”
여기서 잠시 웃음이 터졌다.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꾀어내어 궁지로 빠트리는 인물이죠. 어린 싱클레어에게는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데미안>에서는 궁지에 빠진 싱클레어를 데미안이 도와주면서,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크로머는요?”
리암이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선의 세계에 속했던 싱클레어와 달리, 크로머는 악의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싱클레어가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했듯이 크로머에게도 데미안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이야긴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데미안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인가요?”
“이사야는 데미안을 닮기도 했고 싱클레어를 닮기도 했죠. 어쩔 땐 데미안처럼 한없이 신비스럽게 느껴지고 어쩔 땐 싱클레어처럼 나약한 인간처럼 느껴지니까요. 이사야의 존재는,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로도 편집 방식이나, 촬영 구도에 대한 몇 가지 질의응답이 있었다.
한 기자가 도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영화 시나리오를 감독과 공동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도현과 맥이 무척이나 어렸기에 질문들은 주로 리암과 로잔나에게만 쏟아졌던 터라, 이 질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도현이 마이크에 고개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우연이었죠. 공원에 갔는데, 벤치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며 고민하는 사람이 보였어요. 종이가 땅에 떨어졌길래 주워주려고 했는데, 그게 시나리오였어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집중했다.
“너무 궁금해서 읽어 보았는데, 리암이 갑자기 어떻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죠.”
도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재미없다고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아이라서 떨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여유롭고 재치 있는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리암과 서로 의견이 맞질 않았죠. 서로 의견을 내며 대화하다 보니, 어느 순간 둘이서 시나리오를 궁리하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공동 저자에 이름이 올라간 건 제게도 꽤 놀라운 일이었어요.”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리기에는 배우가 너무 어리지 않나요?”
입으로 꺼내진 않았을 뿐, 다들 하는 생각이었다. 그에 리암은 어제 바네사에게 했던 대답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되풀이했다.
“영화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나이는 도현의 앞에서 무의미합니다. 그건 그저 숫자일 뿐이에요. 도현은 제 생각보다 더 뛰어난 배우였고, 믿음직한 동료였습니다. 같이 촬영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제 말에 동의할 겁니다.”
리암의 단호한 대답에 회견장이 조금 술렁였다. 그때, 한 기자가 도현에게 물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 건가요?”
“네, 시나리오를 완성한 리암이 제게 출연하겠냐고 물었어요.”
이에 리암이 마이크를 잡았다.
“원래 설정했던 유의 나이는 십 대 중후반의 백인이었습니다. 도현을 제 배우로 삼기 위해서 주인공의 인종과 나이까지 바꿔서 새로 써야 했죠.”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두드러지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로잔나가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유려한 대답을 하고, 이사야에 관한 질문에는 맥이 몇 번 더듬긴 했어도 훌륭한 답변을 내놓았다.
아직 어린 도현에게 이해하기 어려울 만한, 그리고 잘못 대답하면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질문도 들어왔으나.
“도현 리 배우에게 유라는 캐릭터의 설명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영화에서 유는 악에서 선으로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처한 상황 때문에 실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현실에서도 이처럼 취약 계층에 놓인 사람들이 자아실현에 제약을 받고 있을 텐데,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유는 고아에 동양인, 소매치기까지. 미국 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어요. 하지만, 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단 취약 계층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적 약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어떤 선택을 따라야 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삶은 답을 찾아서 방랑하는 과정인 거겠죠.”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답을 내어놓았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오히려 질문을 건넨 기자가 놀랐다.
기자의 표정이 아니었더라면, 혹시 미리 대본을 연습한 게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성숙한 대답이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기자 회견의 주역인 팀밖에 없었다. 그들은 은은히 웃으며 ‘도현이 도현했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왜 감독이 ‘도현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도현의 눈은 누구보다 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영화의 마지막에,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이듯이 새벽하늘이 보였는데, 이게 유의 시선이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유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기자님은 누구의 시야일 것 같으신가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슬기로움까지 보여주었다.
기자 회견장에 자리한 사람들은, 이 어린 배우의 영특함과 총명함에 너 나 할 것 없이 빠져들었다.
당당한 확신을 가지고 동그란 눈으로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어린아이를 싫어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자 회견이 끝난 후, 인터넷은 다시 한번 ‘The Wanderer’에 대한 기사로 떠들썩해졌다.
* * *
[“공원에서 만난 인연으로 공동 집필에서 출연까지” ‘The Wanderer’ 이도현 배우, 베니스 기자 회견]
[경쟁 부문 초청작, ‘The Wanderer’ 기자 회견 현장!]
[베니스를 사로잡은 배우 이도현, 사랑에 빠진 베니스 영화제]
[(사진 = ‘The Wanderer’ 기자 회견 현장)
베니스 국제 영화제는 지난 8월 29일부터 개최되어 11일간 열린다. 아쉽게도 한국의 초청작은 없었지만, 한국의 배우 이도현이 주연으로 출연한 독립 영화 ‘The Wanderer’가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공식 스크리닝 행사 이후, 호평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한 기자 회견이 성공리에 끝이 났다.
리암 호프 감독은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리기에는 배우가 너무 어리지 않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도현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대답을 하며 무한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질문은 이도현 배우에게도 돌아갔는데,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도 기자들의 질문에 여유롭게 답하며, 주연 배우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공동 집필을 하고 출연을 하게 된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기자 회견장에 있는 모두가 그 어린 배우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유와 닮은 점이나, 공감되었던 부분이 있는 것 같냐”라는 질문에 “유는 굉장히 감정적인 캐릭터다. 이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닮은 점이라면, 끊임없이 흔들리는 부분이지만, 이건 다른 분들과 같을 것 같다.”라고 답하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공감되었던 부분은 유가 처음 바이올린을 받았던 장면이었다. 그건 유에게 있어서 그 이상의 의미였다.”라고 말하며 “유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 혹은 징검다리의 의미였을 것 같다. 나도 소중한 사람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갔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도현 배우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차분한 목소리와 또렷한 발음, 그리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면 누가 이 배우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커뮤니티에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이도현 기자 회견 풀 영상 (Feat. 영어 실력)]
(영상 링크)
9살 애가 나보다 더 영어를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