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특별한 이유 (13)
기자 회견만 끝나면 공식 스크리닝 전처럼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The Wanderer’가 예상치 못한 호평 세례를 받으며, 영화의 상업성을 긍정적으로 본 배급사 측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독립 영화로 제작되어 모든 걸 리암과 로잔나가 맡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이 또한 두 사람이 직접 발로 뛰며 일을 해결해야 했다. 투자자의 명목으로 함께한 서혜나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며 환하게 웃는 로잔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갈수록 조금 이상… 아니야.’
도현은 생각을 지워냈다.
맥과 도현도 스케줄이 있을 때가 조금 있었지만, 세 사람에 비해서는 노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지금.
“야! 저거 보러 가자!”
그들은 실제로 놀고 있었다.
도현은 어째서인지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내며 맥이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
맥이 가리킨 곳은 기념품 같은 물건들이 모인 상점이었는데, 신기해 보이는 물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색도, 디자인도 다양한 가면들이 벽 한 면에 가득 전시된 게 눈에 띄었다.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면이 왜 이렇게 많아요?”
“베네치아 축제 중에서 베네치아 사육제라는 게 있거든. 그때 가면 축제가 열려서, 베네치아에는 가면을 파는 상점들이 꽤 있어.”
도현의 질문에 이장혁이 답해주었다.
맥은 이 가면들이 몹시 흥미로운 것 같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보기에, 이장혁이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베네치아에 온 김에 기념품도 사 가야지.”
“그, 그래도 돼요?”
맥이 살짝 눈치를 보았지만.
“그럼. 여러 개도 괜찮아.”
“! 감사합니다!”
맥이 무척이나 신나 했다.
도현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가면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마그넷과 유리공예가 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던 도현이 고개를 돌려 이장혁을 보았다.
“응? 왜?”
“혹시 친구들 것도 사도 되나요?”
“친구까지 생각하고, 도현이는 착하기도 하지.”
이장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괜찮으니까, 사고 싶은 건 다 고르렴.”
도현이 원한다면야, 이 가게에 있는 모든 물건을 전부 구매해줄 수도 있는 이장혁이었다. 돈이 썩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로 도현이가 웃는다면 돈이 대수일까.
“네, 감사합니다!”
도현도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념품을 살폈다.
니콜라스는 의외로 심약(?)한 편이니 가면 대신 가면 모양의 작은 마그넷과 섬세하게 세공된, 금붕어가 들어간 유리공예를 골랐고 진은 수집욕이 있으니 특이해 보이는 가면과 유리로 된 예쁜 종을 골랐다.
“다 골랐어요!”
도현이 신나서 말하자, 이장혁이 물었다.
“뭐가 친구 거고 뭐가 도현이 거야?”
“어….”
도현이 잠시 멈칫했다가, 어색히 웃었다.
“생각해보니 덜 고른 것 같아요.”
도현이 어설프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본 이장혁은 곧바로 눈치챘다.
‘친구 것만 골랐구나!’
그만큼 친구들을 좋아한다는 게 기쁘기도 하고, 제 것은 고르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참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런 이장혁의 심정을 모르는 도현은 맥의 옆으로 다가갔다.
“맥, 맥은 뭘 골랐어요?”
“이 가면!”
“초승달이네요?”
맥이 고른 가면은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는데, 가면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눈을 가리는 부분만 둥글게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금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전체적으로 굉장히 고급스럽고 예뻤다.
“이거 하얀색이랑 파란색도 있어.”
과연, 맥의 말대로 여러 색이 있었다.
하얀색은 베이지빛에 가까웠는데, 초승달 부분은 톤 다운된 금색으로 신비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깔끔했다.
“저는 이걸로 할래요.”
도현이 하얀 가면을 골랐다.
그에 맥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자신은 보는 눈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맥, 그 유리잔은 선물이에요?”
“아, 이거.”
맥이 목을 한번 쓸었다.
“엄마 거야.”
“잘 골랐네요.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러냐?”
맥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들은 기념품을 결제하고 나와서 호텔로 향했다. 물건을 들고 돌아다니기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짐을 내려놓은 후에는 베네치아섬에서 리도섬으로 장소를 옮겼다.
저녁에 상영되는 영화를 본 후, 저녁을 먹고 세 사람과 함께 호텔로 귀가하면 시간이 딱 맞았다.
상영관에 막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상영관을 훑어본 도현은 한 곳에서 움찔했다.
‘저 사람은 왜… 그냥 참석하지 않고 저렇게 다니는 걸까?’
도현의 눈에 띈 것은, 나름의 분장을 한 에드워드 녹스였다.
도현은 조금 신기한 심정이 되었다.
영화를 보러 올 때마다 에드워드를 보았다는 건, 공교롭게도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게 아니라면 에드워드가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영화를 관람했다는 뜻이었다.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대단하네.’
도현은 그리 생각하며,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리닝이 시작되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스크리닝이 끝이 났다.
맥과 이장혁이 상영관을 뜨려던 때였다.
“잠깐만요.”
도현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에 맥과 이장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도현이 상영관을 나오는 사람 중 한 명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 이건 정말 반가운 얼굴이군.”
그 목소리에서 기쁨이 묻어났다. 도현도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맥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저, 저분이 혹시…?”
“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듣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부러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맥이 패닉에 빠져 있는 사이, 에드워드와 이장혁이 인사를 나눴다.
“닮은 것 같다 했더니, 도현의 아버지셨군요!”
“하하, 도현이는 저보다는 아내를 좀 더 닮았죠.”
이장혁은 할리우드 스타가 눈앞에 있어서 당황한 것 같았지만, 아들의 앞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대화 좀 나눌까요?”
할리우드 스타의 제안에 이번에는 이장혁조차 뻣뻣하게 굳어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데, 도현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혹시 시간 있으시면 같이 저녁 식사하실래요? 마침, 지금 저녁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오, 저녁에 호텔에서 이브닝 파티가 있긴 하지만….”
그 말에 도현이 사양해도 괜찮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보다는 여기 어린 배우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군요. 제가 식사에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에드워드의 말에 이장혁이 뻣뻣하게 대답했고, 맥은 얼어붙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좋군요. 제가 주변에 괜찮은 레스토랑을 알아요. 조용해서 대화를 나누기에도 좋을 겁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시원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고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에드워드가 추천하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이장혁이 조금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할리우드 스타가 안내해주는 레스토랑이라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곳일 것 같았는데, 그보다는 안락하고 아늑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단골처럼 보였다.
그런 이장혁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에드워드가 웃었다.
“괜찮죠? 리도섬에 올 때마다 들르는 레스토랑이에요. 한적하고, 셰프 솜씨가 대단하거든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닌지, 셰프가 에드워드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다. 아마, 유명인인 에드워드를 배려한 좌석인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에드워드가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를 벗고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라테가 떠오르는 부드러운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색은 푸른색이라기보다는 청록색에 가까운 어두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눈매는 깊고 진한 반면, 입꼬리는 올라가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맥은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져 반팔 위로도 드러나는 근육에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감싸고 다니려니까 덥네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에 꽁꽁 싸매고 다니니, 더울 법도 했다. 유명해도 고생인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그들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공원에서 만났다는 인터뷰가 진짜였군요.”
에드워드는 살짝 감탄하기도 하고.
“그럼 이 작품이 지금까지 촬영한 작품 중 유일한 작품인가?”
도현에게 호기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영화를 찍고 나서 잠깐 한국에 갔는데, 거기서 드라마 단역으로 한 번 출연했어요.”
“드라마! 드라마 제목은?”
“<불량경찰>이에요.”
“재밌을 것 같은 제목이군!”
돌아가면 당장이라도 찾아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에드워드가 털털하고 친근한 태도로 대하자, 맥과 이장혁도 긴장이 풀렸는지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을 만들려면 운동을 얼마나 해야 해요?”
맥이 눈을 반짝 빛냈다.
“하하하, 한 십 년 가까이 매일 운동했지.”
“시, 십 년이요?”
맥이 기겁했다.
“근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 꾸준히 한 운동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거지, 마치 연기처럼.”
에드워드와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게 있다면, 그의 말이 대부분 연기로 귀결된다는 거였다.
그때, 트레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며 음식이 등장했다. 그로 인해 대화가 잠시 소강되었다.
수프를 한 입 떠먹고 감탄을 터트린 도현이 에드워드를 향해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매번 분장하고 관람을 하는 거예요? 저번에는 공식적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잖아요.”
“아.”
에드워드가 앞에 놓인 와인으로 목을 조금 축였다.
“원래라면 스크리닝에도 공식적으로 등장할 생각이 없었어.”
도현의 얼굴에 ‘그럼 왜?’라는 뜻이 담긴 의문이 떠올랐다.
“스크리닝에서 눈이 마주친 어린 배우와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럴 땐 유명세가 도움이 되지.”
“저 때문에요?”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 이유는 그에게도 의외인 탓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거든.”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대단한 걸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지.”
에드워드가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대단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에드워드의 도 정말 감명 깊었어요.”
“를 봤어?”
“네. 마지막까지 그런 결말이 나올지 짐작하지 못했어요.”
“하하, 내게도 도전이나 다름없는 역할이었지.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내서 겁에 질려야 했으니까 말이야. 촬영 대부분을 상대 배우 없이 홀로 연기했거든.”
그 말에 도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기분이었어요?”
“음…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는데, 갈수록 마치 내가 진짜 환상을 보고 환각을 듣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었어. 촬영이 끝나면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으니.”
에드워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내용은 진실인 것 같았다.
도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금은 괜찮은지 묻자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촬영이 끝나고 햄버거를 미친 듯이 먹고 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에드워드의 눈이 잠시 아련해졌다.
“촬영 당시, 피폐한 감정을 연기하기 위해서 먹는 걸 극도로 줄였거든. 그 햄버거는 정말 천국의 맛이었지.”
“정말 맛있었겠네요.”
도현이 웃으며 답했다.
도현과 에드워드는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연기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어딘가 닮은 것도 같았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헤어졌다.
리암과 로잔나, 서혜나와 약속한 장소로 가면서 맥은 자꾸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제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내 전화번호부에 에드워드 녹스의 번호가 있다니….”
맥은 완전히 얼이 나간 기색이었다.
그리고 이장혁은.
“에, 에드워드랑 같은 에이전시…?”
에드워드가 준 명함 두 개를 든 채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도현도 제 손에 쥐인 명함을 보았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 그래서, 영화제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지?
- 학교에 가야죠.
도현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 맞는 말이네. 학교에 가야지. 그럼 학교에 간 다음엔?”
도현은 고민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런 도현을 맥이 불신의 눈으로 보았다.
그에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에드워드가 지갑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서 주었다.
- 미국에 돌아가면 내 에이전시에 너를 추천할 생각이야. 혹시 생각 있으면, 내가 알려준 번호로 연락 줘.
- 에이전시요?
도현은 명함을 받아 들고는 에이전시의 이름을 확인했다.
CLA.
- 아트 무비 쪽에서만 일할 게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대형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는 편이지. 중개인 같은 역할을 해주거든. 미국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에이전시가 있는 편이 좋을 거야.
도현의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약 파기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으니, 긍정적으로 고민해봐.
도현이 명함을 물끄러미 보다가, 명함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빠, 가요. 약속 시간 늦겠어요.”
“어, 어… 그래. 가야지.”
이장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발을 옮겼다. 이장혁이 힐끔, 도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도현은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다.
‘너무 혼자 흥분했나….’
이장혁이 조금 무안함을 느끼며, 큼, 헛기침했다.
그리고 이장혁의 시선이 떠나간 도현의 얼굴에, 조금 모호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