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특별한 이유 (14)
팀은 몇 가지 일정을 소화하고, 시간이 남을 땐 관람을 하거나 베네치아섬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베니스 국제 영화제가 개막한 지 9일 차.
“여기예요!”
먼저 와서 기다리던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손을 들었다. 동글동글한 인상을 더욱 유하게 만들어주는 동그란 안경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도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인사했다. 전하리가 떨림을 애써 가라앉히며 환하게 인사했다.
도현이 먼저 전하리와 악수하고, 도현의 보호자 명목으로 같이 온 이장혁도 뒤이어 악수했다.
이장혁이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재로 된 인테리어와 곳곳에 놓인 커다란 식물이 눈에 띄었다. 우드 톤과 식물이 조화롭게 자리한, 한가로운 분위기의 카페였다.
이장혁이 잠시 뿌듯하게 웃었다.
인터뷰할 때 여럿이 가면 기자님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도현에, 이장혁과 서혜나는 눈물을 머금고 둘 중 한 명을 골라야 했다.
두 사람 다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방식은 공정한 가위바위보로 치러졌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서혜나는 한동안 좌절하다가, 곧 시간을 알차게 쓰겠다며 로잔나와 함께 리알토 다리에 있는 명품 숍에 쇼핑을 하러 갔다.
리암과 맥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기자님이랑 앉아 있어. 아빠가 음료 주문하고 올게.”
이장혁이 발걸음도 가볍게 음료를 시키러 간 사이, 전하리가 맞은편에 앉은 도현을 보았다.
전하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도 의 공식 스크리닝에 참석해서 영화를 관람한 사람 중 하나였다.
도현을 마주하니, 그때 느꼈던 전율이 다시 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날.
상영이 끝나고,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지만, 전하리는 멍하니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극장은 환하게 불이 들어왔는데, 전하리는 여전히 깜깜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심장이 뛰고, 가슴이 벅차면서도 숨이 막히는 이 기분을.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서 오히려 고요하게 느껴지는 독백이 울렸을 때.
아니, 햇빛이 가득한 추억이 부드럽게 넘어가고 이내 옥상에 소년이 홀로 남았을 때.
아니다. 그보다 더 전에.
핏방울이 튄 모습으로, 지옥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밑바닥에 깔린 연약한 감정을 내보였을 때.
그때부터 전하리는 그 가련하고 아름다운 소년에게, 그 소년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숙소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모든 걸 잊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내가 느낀 것, 겪은 것, 본 것.
그 모든 것을 적어내야만 했다. 오로지 그 생각에 가득 차 노트북을 두드렸다. 타자 소리는 밤새도록 울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 환하게 밝은 후였다.
창문을 통해 환하게 비치는 햇살을 보면서, 전하리는 참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한참을 노트북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이후, 평론을 써야 할 영화 스크리닝이 예약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어?”
앳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전하리가 움찔했다. 전하리의 바로 앞자리에 앉은 도현이, 맑은 검은색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잠깐, 가 생각이 나서….”
“영화를 보셨나 보네요.”
“당연하죠!”
전하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확 바뀐 기세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도현이 물었다.
“어떠셨어요?”
“다시는! 다시는… 그런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할 것 같았어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진심을 담아 빛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그 표정에, 도현은 상영이 끝난 후 받았던 박수갈채와는 또 다른 기분을 느꼈다.
심장을 누군가 꾸욱 누른 것 같았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테이블 아래에 있는 손가락이 작게 꼼질댔다.
그때, 이장혁이 음료수를 가져와 도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커피의 본고장이라 그런가, 대부분의 카페가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밖에 없었는데 전하리가 일부러 신경 쓴 것인지 이곳에는 도현이 마실 만한 음료도 있었다.
도현이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음료수를 한 입 마셨다.
시원한 음료 덕에 여기까지 오느라 느꼈던 더위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잠깐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터뷰로 넘어갔다. 테이블 가운데에 녹음기를 놓은 전하리가 큼, 큼, 목을 다듬었다.
“작품에 관련된 이야기도 물을 건데, 이도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질문도 많을 거예요.”
“저에 대해서요?”
“네. 관심이 쏠리는 것에 비해, 알려진 정보가 너무 적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장담컨대,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게 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많은 관심이 쏟아질 거예요.”
는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아, 배급시사회를 통한 선판매에서 오는 10일부터 이탈리아, 미국, 독일, 프랑스 포함 30개국에서 상영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중 한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좋은 방향으로 작성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하면 돼요. 혹시 쉬고 싶으면 중간에 녹음기 끄고 쉬어도 되니까, 편하게 말하고요.”
“알겠어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리가 녹음기를 꾹 눌렀다.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도현에 이장혁이 웃음을 참았다.
“이도현, 나이는 한국 기준으로 아홉 살이고… 샌디에이고에 있는 델마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그런 생각을 담아 전하리를 보는데, 전하리의 표정이 이상했다.
“새, 샌디에이고요?”
“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샌디에이고 말하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전하리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리가 말을 더듬었다.
“유학… 유학 중인 건가요?”
“아니요. 계속 미국에서 살았어요.”
쿠궁!
전하리의 얼굴이 충격에 물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기사가 스쳐 지나갔다.
[한국의 배우…]
[한국의 어린 천재…]
[한국의…]
전하리는 굉장히 부담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국적이…?”
“음… 미국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에요. 이중 국적이거든요.”
전하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중 국적인 것도 의외였으나.
‘다행히 한국인이 맞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현재 한국은 도현의 행보로 인한 자긍심에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라는 소식이 들려오면 국가적으로 헛물을 켠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한국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로 먼저 데뷔한 것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에서 위화감 없이 한국어를 쓰며 연기한 아이를 누가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생각해보니, 그래서 영어가 그렇게 유창했구나.’
기자 회견 때도, 영화에서도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어를 술술 내뱉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인터뷰 첫 시작부터 거대한 폭탄이 떨어져 정신이 아찔했지만, 전하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놀라는 건 인터뷰 끝난 후로 미뤄도 충분했다.
전하리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러면, 어쩌다가 한국에 와서 드라마를 찍게 된 건가요?”
“마침 그때가 여름 방학 기간이어서요. 한국에 놀러 왔다가, 1화에만 등장하는 단역 오디션이 있다길래 지원했죠.”
“그럼 영화는 그 전에 찍은 거고요?”
“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리암 호프 감독과 영화를 찍게 된 계기가 공원에서의 만남이라고 했는데, 샌디에이고의 공원이었나요?”
“맞아요. 굉장히 한적한 공원이었어요.”
전하리가 입을 살짝 벌렸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딱딱 들어맞았다.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도현을 보았다. 이렇게 작은 아인데,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다이내믹했다.
전하리는 인터뷰 리스트에 준비했던 질문을 물어 보았다.
“영화 시나리오를 리암 호프 감독과 공동 집필하셨다는 게 화제인데요, 혹시 이와 관련해서 자세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
“아… 그건 저한테도 당황스러웠던 일이라서….”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떤 식으로 진행된 건지 말해도 괜찮고요!”
전하리가 황급히 말했다. 도현이 잠깐 생각하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리암은 굉장히 끈질기고, 열정적인 성격이었어요. 기자 회견 때도 말했듯이, 제가 재미없다고 하자 매번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 와서 제게 보여주었죠. 그러면 저는 그 시나리오를 읽고, 제가 느낀 점을 말했어요. 그러다가 서로의 의견이 안 맞으면 격렬하게 토론을 하기도 했죠.”
말하고 보니, 기자 회견 때 한 말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리암을 설득하기 위해서 연기를 한 적도 있어요.”
“연기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전하리가 눈을 빛냈다.
“네. 이사야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거든요. 영화 장면 중에서, 이사야가 신부님께 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서 리암은 이사야가 동정심과 연민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고, 전 우월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에서 이사야의 연기는 도현의 해석에 가까웠다.
“그럼…?”
“네, 그래서 리암을 설득하기 위해 제가 해석한 이사야 연기를 했어요. 그러자, 리암이 다음 주 이 시간에 여기로 오라고 했고, 몇 주 뒤에 완전히 달라진 시나리오를 가져왔죠.”
“그 연기가 영화의 방향을 완전히 튼 건가요?”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네요.”
도현이 옅게 웃었다.
“그 연기 때문인가, 리암이 처음 제게 제안한 역할은 이사야였어요.”
들을수록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런 일들이 있었다니….
인터뷰하는 입장이었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이 앞설 정도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장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잔뜩 집중해서 들었다.
“이사야도 물론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저는 유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출연 조건으로 유 역할을 맡겠다고 말했고요.”
“그가 알겠다고 했나요?”
“아니요.”
도현이 앞에 놓인 음료를 한번 마시고는 말했다.
“리암은 제가 이사야를 연기하길 바랐어요. 또 서로 의견이 맞질 않았죠. 결국, 우리는 일주일 뒤에 오디션을 보기로 타협했어요. 일종의 내기였죠. 그 오디션에서 제가 리암의 마음을 돌리면 유를 연기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아마, 이 영화에 제가 출연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어요. 리암은 자신의 작품을 아끼는 사람이니까요.”
전하리가 감탄사를 흘렸다.
“내기에서 이겼네요!”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 후로도 인터뷰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전하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앞에 앉은 소년을 보았다.
기자 회견 때도 생각이 깊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대화해보니 그게 더욱 확 와닿았다.
어느새 어린아이라는 것도 잊고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묻는 족족 나오는 대답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영화를 만든 과정이 영화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영화에 관련된 질문을 한 후, 개인적인 질문까지 이어졌다. 이어,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 작품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도현은 이와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 학교를 다닐 생각이에요. 작품 활동은…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하게 될 것 같아요.”
두루뭉술한 답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
그 질문에 도현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불량경찰> 출연도, 우연이 따라준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거였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도현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불량경찰> 송하가, 한국에서 제 마지막 배역은 아닐 것 같아요.”
기묘한 확신이 어린 목소리였다.
전하리는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도현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숙하고 똑똑하다 한들 애였다. 어른이 압박을 주는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을 보고 이 작은 소년의 연기에 완전히 빠져버린 전하리였다. 아이가 싫어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팬심이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할게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도 재밌었는걸요.”
그들은 이장혁의 제안에 따라, 카페를 나와서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때마침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그들은 인터뷰 때보다 편안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에서 가 개봉한 이후 영화 평론과 함께 공개될 거예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슨과 인터뷰를 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보다 본격적인 느낌이라 조금 신기하긴 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호텔에 돌아와 보니, 서혜나와 로잔나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도현아! 인터뷰는 잘하고 왔어?”
“네.”
“이거, 우리 아들 첫 개인 인터뷰 기념 선물이야!”
도현이 소파 한가득 놓인 상자들을 보았다.
“…이게 다요?”
“응! 우리 아들 첫 인터뷴데 이 정도는 해야지!”
만약, 인터뷰가 없었어도 다른 이유를 붙여서 사 오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도현은 얼른 털어내었다.
“감사합니다.”
도현의 인사에 서혜나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엄마가 행복해하는 표정에 도현은 이내, 작게 따라 웃었다.
“야, 내 것도 있다?”
맥이 신나서 희희낙락했다. 도현은 맥이랑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보며, 선물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