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특별한 이유 (18)
“으… 찌뿌둥해.”
맥이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몇 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가만히 있던 게 불편했던 것 같았다.
도현이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달 하고 보름 정도 만에 다시 온 샌프란시스코 공항이었다.
그저 공항일 뿐인데도, 마르코 폴로 공항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돌아왔구나.’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리암과 로잔나와는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이탈리아에서만 해도 쌩쌩했던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오자 쌓인 피로가 그제야 몰려왔는지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맥은 서혜나가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에, 도현과 같이 차에 탄 상태였다.
차가 달리고 달려, 맥의 가게로 향했다. 도현은 처음 와보는 맥의 가게에 신기한 눈빛을 했다.
맥이 어물쩍거리다가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를 환하게 반기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가게에서 나왔다.
도현은 부모님과 함께 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서혜나가 먼저 밝게 인사했다. 그러자 얼굴에 밝은 화색을 띤 케이시도 마주 인사했다.
“여기까지 맥을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아, 이탈리아에서 돌봐주신 것도요.”
그 짧은 사이에 맥이 무어라 말을 한 것 같았다.
도현은 처음 보는 맥의 엄마와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수더분한 인상이었는데, 푸른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맥의 눈동자는 케이시를 닮은 것 같았다.
“이런, 잠시만요. 여기까지 데려다주셨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죠. 혹시 핫도그 좋아하세요?”
“핫도그를 싫어할 수는 없죠.”
케이시의 말에 이장혁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맥은 뭐가 불만인지, 살짝 얼굴을 붉힌 채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가게에 들어오실래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비행기 타고 오느라 출출할 텐데, 조금 먹고 가요.”
“그럼 조금만 실례하겠습니다.”
도현 가족이 케이시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는 조금 허름해 보였던 외부와 다르게 깔끔했다.
전반적으로 매끄러운 주홍색과 핫도그를 품에 안은 캐릭터로 인테리어가 꾸며져 있었다.
핫도그 종류는 매우 다양했는데,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가장 추천하는 메뉴를 부탁했다.
“아이씨….”
도현의 옆에 앉은 맥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안해. 엄마가 괜히….”
“왜요?”
도현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맥의 가게에 한번 와보고 싶었는걸요.”
“…그래?”
맥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윽고.
케이시가 핫도그를 가지고 나왔다.
기다란 롤빵에 구운 핫도그가 얹어져 있고 제각기 다른 재료들이 푸짐하게 올라가 있었다.
핫도그를 가지고 온 케이시가 그들의 주변에 앉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기색이었다.
“우리 애가 찍은 영화가 정말 상을 탄 건가요?”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인 것 같았다. 케이시가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는 듯이 맥을 보았다.
케이시는 처음에 맥이 베니스 영화제에 초청되어서 이탈리아로 간다고 했을 때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실일 가능성보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더욱 높지 않은가?
그러나 맥은 그녀의 생각을 깨고 당당히 비행기표를 내밀었다. 사기가 아닌지 의심하자, 직접 감독인 리암이 찾아와서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들이 이탈리아로 가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고 레드 카펫을 밟는 사진까지 보았음에도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케이시가 묻는 질문에, 서혜나와 이장혁이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맥은 못내 창피한 기색이었다.
다른 이의 입에서 직접 맞다는 말을 들으니, 케이시는 이제야 조금 현실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케이시가 생경한 눈으로 맥을 보았다.
출연료가 높길래 허락해줬던 거뿐인데 상까지 받아 오다니….
‘혹시 맥이 정말 재능이 있었던 걸까?’
그럴 리 없다고 여겼던 확고한 생각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도현과 서혜나, 이장혁은 케이시가 내어준 핫도그와 주스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서 다시 차로 향했다.
“다음에 봐요, 맥.”
“그래. 잘 들어가라.”
케이시와 맥의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게에 남은 케이시와 맥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케이시가 작게 중얼거렸다.
“맥 네가 진짜…. 상을 탔구나.”
“진짜라니까.”
“…축하해, 멋지구나.”
예상치 못한 말에 맥이 움찔했다. 케이시가 맥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엄마는 네가 배우를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너도 알다시피… 그런 길은 너무 험하고, 힘들잖니. 반짝 빛나 보여도 그러다 사라지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계속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니까….”
이어진 케이시의 말에 맥의 얼굴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네가 자랑스럽단다, 맥.”
“…뭐, 별거 했다고.”
맥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탄성과 함께 캐리어에서 무언갈 꺼냈다.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잔이었다.
“이거, 베네치아에서 산 거야. 선물이야.”
“세상에.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도현의 부모님이 사주셨어.”
“그렇다고 그걸 덥석덥석 받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꼬리가 씰룩대고 있었다. 케이시의 유일한 취미가 예쁜 접시나 잔과 같은 다기를 모으는 것이었다.
“이거 말고도 많이 사주셨어.”
“이거 말고도? 미안해서 어째. 핫도그라도 더 싸줬어야 했는데.”
“그걸 왜 싸줘!”
“얘는. 핫도그가 뭐가 어때서 그래!”
맥과 케이시가 투닥투닥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짤랑.
가게 문이 닫히며,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 * *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방 정리를 얼추 마친 도현은, 깨끗해진 방에서 잠깐 고민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무언가를 가지고 올라왔다.
도현이 침대 한편에 놓인 바다사자 인형을 보며 조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 이불과 바다사자 인형이 썩 잘 어울렸다.
털썩!
도현이 이불 위로 늘어졌다.
저녁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일뿐더러, 케이시가 준 핫도그 덕분에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그들은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묘한 안정감이 들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방에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도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잠이 들….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잘못 들었나?’
순간, 너무 그리워서 환청을 만들어낸 건가 싶었지만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진, 니키? 나르샤?”
도현이 황당한 낯을 했다.
거실 테이블에 진과 니콜라스, 나르샤가 부모님과 함께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퍽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 과자 맛있다.”
니콜라스는 행복한 표정으로 이탈리아 여행에서 사 온 과자를 먹고 있었다.
호록.
우아하게 차를 한 입 마신 진이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의자 하나를 톡톡 두드렸다.
“빨리 와! 네 자리도 있어.”
이게 무슨 상황일까?
도현의 얼굴이 혼란에 가득 찼다. 진이 도현의 심정을 읽었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너 오늘 온다고 했잖아! 그래서 시간 맞춰서 놀러 왔지!”
도현의 시선이 나르샤에게 향하자, 나르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사고뭉치가 내 말을 들어야 말이지.”
나르샤는 니콜라스의 조름에 못 이겨 운전기사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결국 도현은 상황 파악을 포기하고 진이 가리킨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 서혜나가 도현의 찻잔에 차를 채워주었다.
홀짝.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니, 마음이 절로 차분해졌다.
조금 진정한 도현이 물었다.
“언제 온 거야?”
“삼십 분 전에? 네가 자고 있대서 깰 때까지 아래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니키가 못 참고 불렀어.”
“그랬구나….”
도현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던 거야?”
“어….”
니콜라스가 묘한 표정을 짓는데, 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베니스에서 네가 상 탄 얘기!”
“아.”
엄마의 얼굴이 유독 밝아 보이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서혜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터득한 도현이었다.
“너 에드워드 녹스도 만났다며! 어땠어?”
진이 굉장히 궁금하단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도현이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어. 유쾌하고 친절했어.”
“할리우드 스타가 눈앞에 있는 거잖아! 나라면 한마디도 못 했을 거야.”
…진이라면 잘 하지 않았을까?
왠지, 진은 에드워드와 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둘 다 여유로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비슷했다.
도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짧지 않은 시간 떨어져 있었는데도 어제 만났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도현이 진심으로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카일리 워렌도 봤어?”
니콜라스와 진은 도현에게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난 일을 경험하고 왔으니, 궁금할 법도 했다.
두 사람이 주로 궁금해하는 것은 유명인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도현 또래가 으레 그렇듯이, 영화제 자체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보니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것의 의미에 별달리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냥 ‘도리가 도리했겠지’ 정도로 말하며 쿨하게 넘기는 모습에 오히려 도현이 신기하게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쿨함은 선택적 쿨함이어서.
“에, 에드워드가 전화번호를 줬다고?”
“너 그러면 에드워드랑 같은 에이전시에 들어가는 거야?”
에드워드와의 친분에 두 아이는 흥분했다.
그러면서도 도현을 배려한 것인지, 에드워드에게 연락해 보라거나 하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두 아이와 떠드는 도현을, 나르샤가 몹시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진이랑 니콜라스야 아직 어리니까 도현이 무슨 일을 해냈는지 잘 모를 수 있었다. 안다고 해도 실감이 안 날 것이다.
그러나 나르샤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 가서, 저 작은 아이가 해내고 온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것도 신기하고….’
그렇게 큰 상을 받고 왔으면 어깨가 으쓱할 법한데도, 도현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수줍어하는 것도, 친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모두 두 달 전과 똑같았다.
나르샤가 찻잔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싱긋 웃었다.
얼마나 유명해지든, 혹은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내든, 도현은 여전히 니콜라스의 친구인 도리토스일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나르샤가 시선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방금 전의 나르샤처럼 아이들을 보며 웃는 서혜나와 이장혁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 왔는데 도현의 아빠가 있어서 놀랐지.’
문이 열렸는데, 서혜나가 아니라 낯선 남자가 있어서 얼마나 놀랐던가.
순간적으로 집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지, 혹시 그사이 이사를 가버린 건 아닌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뒤로 보이는 서혜나의 모습에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르샤는 학부모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은 밀턴이라고 굳게 믿어왔는데, 그 믿음을 흔들리게 할 다크호스의 등장이었다.
나르샤가 턱을 괴었다.
‘어떻게 가족이 하나같이 다 반짝반짝하지?’
도현을 보는 부부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도현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기꺼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눈에 보였다.
‘하긴 저런 아들이라면 그럴 만하지.’
나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우리 집 사고뭉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르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열심히 먹은 건지,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여간.”
나르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휴지를 한 장 뽑아 니콜라스의 입가를 털었다.
“으브!”
니콜라스가 눈으로 항의를 했지만, 나르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만있어, 이 사고뭉치야.”
만족스러울 만큼 깔끔하게 다 털어낸 후에야 나르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니콜라스가 조금 투덜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과자를 와작이며 떠들어댔다.
나르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자리한 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