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24)화 (125/582)

제124화. 특별한 이유 (19)

어제, 진과 니콜라스는 잔뜩 떠들고 나서, 또 도현의 방으로 올라가서 놀고 도현이 가져온 선물까지 구경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지.’

니콜라스는 어째 이탈리아에서 사 온 기념품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더 반기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도현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도현의 방에 방문한 사람은 이장혁이었다. 이장혁이 조금 뻣뻣하게 굳은 기색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기색에 도현이 의아한 눈을 했다.

“저, 도현아.”

“네.”

“혹시… 아빠랑 나가지 않을래?”

“지금요?”

“응. 주변도 산책하면서 걷고,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놀러 가자.”

그 말에서 도현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내일이면,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원래 영화제가 끝나고 돌아가려고 했으나, 같이 샌디에이고에 있는 집에 오고 싶다는 의견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된 것이었다.

“바로 챙겨서 내려갈게요.”

“그래! 아래에서 기다릴게.”

이장혁이 신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도현은 드레스 룸으로 건너가 옷을 갈아입었다.

드레스 룸을 나오는 도현의 표정이 싱숭생숭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순간부터 아빠가 같이 있는 게 익숙해졌다.

도현은 이미 알게 되어버린 건 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샌디에이고에서의 생활이 한국으로 가기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 같았다.

도현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밝은 표정으로 도현을 기다리고 있는 이장혁이 보였다. 그 옆에 서혜나도 서 있었다.

“가요.”

“그래!”

도현이 집을 나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혜나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엄마는 같이 안 가는 건가요?”

도현의 질문에 서혜나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엄마는 아직 피로가 덜 풀렸나 봐.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좀 쉬려고.”

“아….”

그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도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혜나를 보았다.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조금만 쉬면 돼. 엄마는 걱정 말고 아빠랑 재밌게 놀고 와.”

“…네, 푹 쉬세요.”

도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섰다.

뒤를 돌아보니 서혜나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조금 걸을까?”

이장혁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쨍쨍한 한낮이라 덥긴 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네, 그렇게 해요.”

이장혁과 도현이 발을 뗐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빠랑 이런 식으로 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마침, 이장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서 노는 건 처음이네.”

그의 말대로, 항상 셋이 같이 있거나, 아니면 엄마랑 둘이 다녔던 도현이었다. 아빠와 단둘이 있는 경험은 처음이라 상당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조차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행은 어땠어? 재밌었어?”

다행히 이장혁이 먼저 물꼬를 터 주었다. 도현이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정말 좋은 기억이었어요.”

“아빠도 오랜만에 이탈리아에 가니까 정말 좋더라. 옛날 기억도 나고.”

“언제 가신 거예요?”

“그게 대학생 때였는데….”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아, 여기가 스쿨버스 정류장이에요.”

“아침에는 엄마가 데려다준다고 했지?”

“네. 그래서 돌아올 때만 타요.”

“나온 김에 학교도 가보자.”

이장혁의 제안을 따라 두 사람은 델마 아카데미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학교인데도, 이장혁은 몹시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학교를 구경하고 나와서 두 사람은 행선지를 정하기 위해서 잠깐 고민해야 했다.

그리하여 정해진 행선지는 올드타운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는데, 도현이 안 가본 곳이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택시를 잡기가 어려워서 주변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반긴 건 띄엄띄엄 심어진 선인장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입구부터 쭉 늘어진 가게들이 보였다. 주로 기념품을 파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다녔다. 샌디에이고의 1800년대 풍경을 간직한 올드타운은 묘한 정취가 있었다.

“여기 젤리 가게도 있다. 사 갈까?”

“괜….”

도현이 괜찮다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가게 내부를 본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작지 않은 가게 내부를 온통 채운 건 젤리가 가득 득 통들이었다. 다양한 젤리들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장혁이 슬쩍 웃었다.

“들어갈래?”

“…네.”

다시 나왔을 때는, 품에 한가득 젤리를 든 채였다.

도현이 뒤늦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사버린 거 같은데 어떡하죠? 다 못 먹을 텐데.”

신기한 젤리가 너무 많아서 하나둘씩 담다 보니 양손이 모자랄 지경이 되어버렸다.

삼 일간 밥 대신 젤리만 먹어야 간신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양이었다.

도현이 후회하는 표정을 짓자 이장혁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을 거야.”

도현은 그 미묘한 어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위로의 의미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먹고 남은 건 내일 학교에 가져가야지.’

친구들한테 나눠주면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올드타운 내를 돌아다녔다. 시가를 팔았던 곳도 있고, 신기한 조형물도 있고… 구경할 거리가 많아서 시간이 금방 갔다.

“저녁은 여기서 먹나요?”

올드타운은 멕시코 음식점이 많았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몹시 맛있어 보였다.

도현이 은근히 기대가 서린 눈으로 이장혁을 보자, 이장혁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 집에 엄마가 혼자 있으니까 밥은 돌아가서 먹어야 하지 않을까?”

“아….”

도현이 멋쩍은 기색으로 뒷목을 쓸었다.

아빠 말이 맞았다.

신기한 구경거리와 맛있는 냄새에 정신이 팔려서 집에 혼자 있을 엄마를 깜빡 잊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짧은 민망함이 가시자, 미안함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서혜나가 피곤한 건 도현 탓이었다.

도현은 조금 충격받았다.

‘내가 이렇게 안일했나?’

도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땅을 파고 들어가는데, 입으로 달달한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씹어보니, 레몬 맛이 났다. 도현이 오물거리며 이장혁을 보자 이장혁이 씩 웃었다.

“아빤 이 젤리가 제일 맛있더라.”

단맛보다는 새콤한 맛이 강해서 도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 안 가득한 레몬 향으로 인해 어느새 땅을 파던 것을 멈춘 채 열심히 젤리를 씹고 있었다.

“저거 먹고 싶은 거지?”

이장혁이 가리킨 곳은 도현이 보았던 멕시칸 음식점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보다 이장혁이 도현을 끌고 가게로 가는 게 더 빨랐다.

“아빠! 엄마는요?”

“사 가면 되지.”

“! 그렇네요!”

도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두 사람은 멕시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전통 방식 그대로 토르티야를 구워내는 곳이라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요리사가 직접 요리하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무얼 살지 고민하다가, 토르티야에 고기와 채소 같은 속 재료를 넣어 만든 타코와 토르티야를 돌돌 말아 레드 소스를 뿌린 엔칠라다, 토르티야를 튀겨 과자처럼 만든 나초까지 구매한 후, 멕시칸 브랜드 음료수인 하리토스까지 샀다.

“하하. 잔뜩 사버렸네.”

“집에 어떻게 돌아가죠?”

이장혁과 도현이 서로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들의 걱정은 꽤 쉽게 해결되었다. 관광지로 주로 방문하는 곳이라 그런지 택시를 잡을 수 있던 것이다.

덕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빠가 짐 들어줄 테니까 문 좀 열어줄래?”

“네.”

도현이 손에 든 젤리 봉지 하나를 이장혁에게 넘겼다. 이로 인해 도현의 오른손이 자유가 되었다.

철컥!

문을 열던 도현이 멈칫했다. 집 안이 온통 깜깜했던 탓이었다.

‘엄마가 불을 꺼놨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펑! 퍼벙!

갑작스러운 소음에 도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러나 놀랄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이, 갑자기 불이 확 켜졌다.

환해진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에 도현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일 축하해! 도리토스!”

거실은 온갖 풍선과 인형, 그리고 상자로 가득했고, 방금 터트린 폭죽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벽에 매달린 Happy Birthday라고 적힌 커다란 천을 한번 본 도현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삼단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케이크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달아 보이는 과자와 과일, 음식들이 한가득 있었다.

‘누구 생일인가?’

도현이 멀뚱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도현! 얼른 와!”

환한 얼굴을 한 할리가 도현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얼떨떨하게 할리가 이끄는 대로 케이크 앞에 서자, 서혜나가 생일용 고깔모자를 도현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Happy Birthday to You~”

손뼉 소리와 함께 생일 노래가 울렸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도현은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야. 초 불어야지. 뭐 해?”

맥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도현이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보았다.

층마다 맛이 다른 건지 색깔이 달랐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상자를 포장한 리본처럼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는 거였다. 가장 상단에는 리본 모양의 생크림도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의 뇌가 삐걱거렸다.

‘그러니까….’

잔뜩 굳은 머리가 ‘지금 초를 불어야 한다’라는 한 가지 명령어만을 인식했다.

도현이 뻣뻣한 기계처럼 고개를 내밀어 떨리는 숨결을 후, 불었다.

그러나 너무 미약했는지 촛불은 흔들릴 뿐 멀쩡히 제 모양을 회복했다.

조금 더 강하게 숨을 불었다.

빨갛게 이지러지던 불꽃이 이내 사그라들고.

“와아아! 생일 축하해!”

“축하해, 도리야!”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도현이 말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장혁이 흐뭇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이 이번에는 서혜나를 보았다. 피곤하다던 사람의 얼굴이 매끈하다 못해 빛이 났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도현이 뒤늦게 진실을 알아챘다.

아침에 나가자고 한 것과 피곤하다고 한 것까지, 모두 이러기 위해 계획한 일이었다.

“대체… 언제 준비한 거예요?”

“계획은 미리 해뒀지.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어제 짰고.”

서혜나의 대답에 도현은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럼 베니스 얘기를 한 게 아니라…?”

“파티 준비 계획 짰지롱!”

진의 대답은 경쾌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했다.

그 대답에 이들이, 다름 아닌 도현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였다는 게 서서히 실감이 났다.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란 건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떠올랐다.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하고, 시끌벅적하고 산만하고 어지럽고… 그리고 따뜻했다.

‘아닌데.’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생일은 원래 이런 날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환한 얼굴로 축하해주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는데.

도현의 눈이 그를 축하해주고 있는 사람들을 담았다.

진, 니콜라스, 맥, 할리, 브라운, 그리고 부모님.

코가 아릿해지는 감각에 축 내려간 손을 말아 쥐던 도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꾹 다물린 입매가 아래로 내려갔다.

“어, 어! 왜 울어!”

당황한 맥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도현은 자신의 얼굴이 젖었음을 깨달았다.

참 이상한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