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그해, 가을, 겨울 (1)
Taylors Book의 캐셔 앤디는 종이를 팔락이며 넘기는 감각, 낡고 새로운 종이의 냄새, 사각이는 소리를 사랑했지만, 그 못지않게 영화 보기를 즐겼다.
그중에서도 특히 독립 영화를 관람하는 건 앤디의 소중한 취미 중 하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독립 영화는 종이 향이 날 것 같다는 점에서 어딘가 책과 비슷했다.
여유로운 주말이면 감독이 자신의 신념대로 그려낸 독립 영화를 보는 걸 사랑했다.
그리하여 황금 같은 주말.
자신의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 여자친구와 함께 상영관에 방문한 앤디는 무척이나 기대에 차 있었다.
영화제가 끝이 나서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공개된 영화들이 많이 개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등장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데뷔작부터 은사자상을 받았다던 감독의 영화 를 관람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들뜬 표정의 앤디를 보고, 그의 여자친구 소피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독립 영화보다는 상업 영화, 그중에서도 차가 날아가고 폭탄이 터지는 시원하고 과격한 액션 영화를 좋아했다.
사실상, 오고 싶지 않았던 터라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러나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겠는가?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르인지도 모르고 그저 따라온 소피아였다.
‘졸지만 말자.’
같이 보러 왔는데, 옆에서 졸고 있으면 앤디가 실망할 것이 아닌가.
소피아가 속으로 다짐하며 앤디를 따라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많이 보러 오네?’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할 줄 알았건만, 자리는 꽤 많이 메워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좌석을 찾아 앉았다. 곧이어 안내 방송에 따라 핸드폰 전원을 껐다.
‘언제 시작하지.’
벌써부터 나오려는 하품을 꾹 눌러 참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귓가로 희미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듣기 좋은 소리에, 무료하던 눈에 약간 이채가 돌았다.
‘시작한 건가?’
소피아가 몸을 바로 했다. 그러나, 화면은 여전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뭐지?’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고.
그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스크린이 서서히 밝아졌다.
고풍스러운 집 안. 어두운 갈색 원목으로 된 가구들과 붉은 기가 도는 조명. 그리고 그 가운데서 연주하고 있는 소년.
‘저 애가 연주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화면이 전환되며 지저분한 운동화를 비추었다가, 공중에 떠오른 은색의 나이프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작은 손이 능숙하게 받아 든다.
반항적이면서도 묘하게 염세적인 미소가 떠오른 어린 얼굴에 소피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동양의 어린아이였는데 미묘하게 서구적으로 느껴졌다. 아마 혼혈이나 쿼터인 것 같았다.
소피아는 소년이 굉장히 까칠하고 예민한 성정을 가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소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도 리즈 시절이 끊임없이 회자 되는 세계적인 배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이나 묘한 매력이 있는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소피아는 소년의 외모에만 집중했다.
소피아가 생각하기에, 이 소년이 주인공이라면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영상미는 성공이었다.
* * *
극장의 불이 켜졌다.
앤디는 계속해서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바이올린 선율만이 가득했다.
잠시 여운을 즐긴 그가 눈에 고인 눈물을 몰래 슬쩍 닦아내고는,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얼른 이 엄청난 영화에 대한 감동을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피아! 이 영화는 정말 대단…!”
앤디가 멈칫했다.
“What the… 유가 불쌍하잖아!”
눈코 할 거 없이 빨개진 소피아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울고 있었다. 휴지를 건네주자, 팽! 하며 거칠게 코를 풀고는.
“Fuck! 망할 마약쟁이 같으니라고!”
이내 휴지를 쥐어뜯으며 분개했다.
“소, 소피아… 괜찮아?”
앤디가 당황해서 그녀를 불렀으나, 소피아의 귀에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안 괜찮아! 그 마약쟁이는 진즉에 마약 중독으로 백치가 되어야 했어! 급성 알코올로 뒤지든가!”
…귀에 닿은 것 같기는 했다.
앤디는 소피아가 저주의 말 쉰여섯 가지를 늘어놓고 진정할 때까지 그녀를 열심히 달래주어야 했다.
그 시각,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젤리를 냠냠 먹으며 아빠와 올드타운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를 감명 깊게 본 건 앤디와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너 그 영화 봤어?”
늘 그렇듯.
“이거 재밌대! 보러 가자!”
재밌는 작품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도현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꿈나라로 간 시각에도, 계속.
* * *
눈을 뜨자, 도현을 반긴 건 바다사자 인형이었다. 그 옆에 할리가 준 강아지 인형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화장실로 가서 가벼운 세수와 양치를 마친 후 일 층으로 내려가니, 부모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캐리어에 물건을 차곡차곡 집어넣던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좀 더 자지, 일찍 깼네.”
“그러게. 어제 하루 종일 놀아서 피곤할 텐데.”
“푹 자서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다 챙겨서 괜찮아. 저기 야채 주스 갈아놨는데 그거 먹고 있으렴.”
도현이 눈을 깜빡이자 이장혁이 웃었다.
“달리기 해야지.”
“…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조깅을 하지 않게 된 세 가족이었다.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처음 일주일은 관광하느라 바빴고 영화제 기간은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 리암, 로잔나, 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완전히 잊고 있었네.’
도현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었는지, 두 사람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도현이 아빠 말대로 주방에 가서 야채 주스를 마셨다. 과일도 함께 간 것인지 달달한 맛이 났다.
시원하게 주스를 마시고 주방을 나오자, 부모님이 짐 정리를 마치고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도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도현이도 옷 갈아입고 내려와.”
“네.”
도현이 드레스 룸으로 올라가, 달리기용으로 샀던 기능성 옷을 입고는 내려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서혜나가 도현의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주었다.
세 사람은 정비를 마치고 집을 나왔다. 여행하는 동안 정원사가 관리를 해주어 여전히 울창하고 푸르른 정원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시원한 바람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샌디에이고에서 이토록 이른 아침에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라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세 사람은 가볍게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눈인사를 하거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들인가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샌디에이고의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 세 가족이었다.
“여보, 한국 가서도 계속 달릴 거야?”
“당연하지.”
이장혁이 곧바로 대답했다.
“달리기는 가족 다 같이 하기로 한 거잖아. 한국에 있어도 같이 하는 게 맞지.”
이장혁의 대답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은 웃고 있었다.
세 가족은 조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간단한 음식을 들고 정원에 나와서 느긋하게 식사했다.
후식으로 건강에 좋은 차를 끓여 티타임까지 마친 후에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도현이 뒷좌석에 앉았다. 가방은 품에 안은 채였다.
백미러를 통해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오랜만에 학교 가네.”
“네!”
도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두 뺨에 도는 생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던 이장혁이 웃으며 말했다.
“공부하는데 싫진 않아?”
“음….”
도현이 대답을 잠깐 고민했다.
수업은 모두 도현이 아는 내용들뿐이라서, 미술이나 음악, 체육과 같은 수업을 제외하고는 수업 자체가 흥미롭거나 재밌진 않았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작게 떠들거나, 선생님이 농담을 건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순간들을 감싸는 공기는 좋았다.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리자면.
“즐거워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즐거움과는 다를지 모르더라도 분명히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세 가족이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는 교문 앞에 도착했다. 항상 도현만 내려서 인사하고 갔던 때와 다르게 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도현이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아빠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어 눈을 조금 찡그려야 했는데, 이장혁이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춰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평행해졌다.
도현은 뜬금없이, 자신의 눈동자 색이 아빠를 닮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 유리알 같은 두 눈동자가 마주치자, 이장혁이 눈썹을 휘며 웃었다. 단정하고 언뜻 냉철해 보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녹았다.
“아들, 아프지 말고.”
건강에 대한 염려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걱정,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지만 듣기 싫으면 꼭 그러진 않아도 된다는 알 수 없는 말 한마디.
그리고.
“연락 자주 할게. 또 보자, 도현아.”
이별의 인사까지.
“…네. 저도 연락 자주 할게요.”
머뭇거리던 도현이 덧붙였다.
“또 봐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이장혁이 행복하게 웃었다. 그러곤 도현을 가볍게 껴안았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온기가 전해지기엔 충분했다. 도현은 이 어색한 스킨십을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반응하지도 못한 채 멀거니 서 있었다.
작별 인사까지 마치고 학교로 가던 도현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이장혁이 웃는 낯으로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도현이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새로운 반에 가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간 도현이 복도에 난 창문을 보았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여전히 그곳에 서 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그들은 도현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 학교를 보며 무언가 대화를 하던 부모님은 오 분이 지나서야 차에 올라탔다. 도현은 차가 멀어져 이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리도리!”
그사이, 스쿨버스가 도착했는지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도현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안 들어가?”
“안녕, 니키. 지금 들어가려고.”
“그럼 가자!”
도현은 니콜라스와 함께 반에 들어갔다.
“줄리엣!”
“줄리엣이다!”
복도에서부터 관심을 보였던 반 아이들이 도현에게 관심을 보였다.
도현은 순식간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자기 자리가 어딘지 알 틈조차 없었다.
“상 받은 거 진짜 너야?”
“연예인들 많이 봤어? 실제로 보니까 어때?”
“무슨 상을 받은 거야?”
우글우글 몰려든 아이들이 저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문제라면, 도현이 그 모든 질문을 한 번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현이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니콜라스를 보았으나.
“…음.”
스윽.
시선을 피한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를 한번 두들기고는 유유히 자신의 자리로 갔다. 도현이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보았다.
“레드 카펫 밟으면 무슨 느낌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도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헤더임을 알아챘다. 평소, 시니컬한 표정을 짓고 다니던 헤더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도현이 대답하려는 찰나.
“줄리엣! 우리 엄마가 어제 그 영화 봤다?”
“어! 우리 누나도!”
또다시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쩔쩔매던 도현은 앞문이 활짝 열리기에 선생님이 왔나 싶어서 표정을 밝혔다.
그러나.
“…뭐야?”
앞문을 세게 젖히고 들어온 건 도현이 기다리던 선생님이 아니라 다비드였다.
다비드는 한곳에 몰려 있는 아이들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도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현이 반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그를 반기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며 곧 관심을 꺼버렸다.
“응. 아니, 어… 그게,”
쏟아지는 질문에 도현이 일일이 대답하기 위해서 애를 쓰던 때였다.
“도오리야아!”
선명한 목소리가 확 귀에 꽂혔다.
도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빛이 나 보이는 진이 씩씩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세에 주춤한 아이들이 도현의 주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도리! 오랜만이야!”
도현의 코앞에 온 진이 해맑게 웃었다.
진의 말대로 그제도 보고 어제도 봤는데도, 학교에서 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 좋은 아침이야.”
“이 인사가 그리웠어!”
진이 무척이나 신난 표정으로 도현의 팔을 잡았다. 아이들이 불만을 표하자, 남은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더니 턱을 치켜올렸다.
“내가 내 친구 데리고 가는데 불만인 사람 있어?”
“없어!”
제자리에서 친구들과 떠들던 다비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도현이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다비드를 보았다.
진의 손에 끌려간 도현은 빈자리에 도착했다.
“여기가 네 자리야! 나는 네 옆 분단!”
꽤 가까운 자리인 것 같았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앉는 아이가 있었다.
헤더였다.
도현이 쳐다보자, 헤더가 말했다.
“내가 네 짝이야.”
“아… 잘 부탁해.”
“그래. 그럼 그 전에 영화제 얘기부터 해줄래?”
헤더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영화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곧이어, 진의 기세에 밀렸던 아이들이 도현의 주위에 옹기종기 몰려들었고, 도현은 부담감 속에서 입을 열었다.
오오오!
도현이 한마디 할 때마다 반응이 참 다채로웠다. 다비드도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우고 몰래몰래 듣고 있을 정도였다.
몇 분 후.
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성이 들어왔다.
헨리넥 셔츠에 심플한 바지를 입은 남성은, 도현의 반 담임 선생님이자 일 년간 함께 할 해리 선생님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에 고개를 갸웃하던 해리는 그 중심에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해리는 줄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 아이들이 몰려 있으면 원인은 도현일걸요? 아마도 90퍼센트?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해리의 만면에 웃음이 피어났다.
“도현! 등교했구나!”
여러모로 학교를 시끌벅적하게 만들던, 줄리엣의 귀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