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그해, 가을, 겨울 (2)
“줄리엣이다.”
“줄리엣이 왔네.”
그들은 작게 수군거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고스란히 도현의 귀에 들어와 박혔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도현이 전학 왔을 때 소수의 학생이, 줄리엣 인터뷰가 걸렸을 때 절반의 학생이 관심을 보였다면, 지금은 느낌상 전교생이 관심을 표하는 것 같았다.
이 관심의 가장 큰 지분은 바로 에드워드 녹스였다.
학교에 오고 나서야, 도현은 에드워드와 저녁을 먹었던 사진이 기사로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파파라치가 따라붙은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그 사실이 널리 퍼진 게, 한동안 게재되었던 신문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현은 앨리슨을 떠올리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현재.
도현은 에드워드의 인기를 실시간으로 체감 중이었다.
‘이렇게 유명했구나….’
거기에 자신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도 섞여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하는 도현이었다.
이 유명세가 당황스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모든 건 다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결과니까.
그러나 도현은 몰랐다.
유명세가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이번 시간에는 조별로 모여서 할 거야.”
“조는 어떻게 나눠요?”
“자리대로!”
“엑, 하고 싶은 애랑 하면 안 돼요?”
“으음, 안 돼!”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해리는 하하 웃으며 그 불평을 묵살했다.
“자, 분단마다 두 팀으로 나눌 거야. 앞에 두 줄이 같은 팀, 뒤에 두 줄이 같은 팀! 자, 자리 붙이자!”
도현이 옆에 있는 헤더를 보다가, 앞에 있는 두 친구를 보았다.
그들도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같은 조네!”
한 아이가 말했다.
둘 다 작년에 다른 반이었던 친구라서, 오늘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자리를 만든 도현은 어색하게 아이들을 응시했다.
“내가 줄리엣이랑 같은 조라니!”
한 아이가 굉장히 좋아했다. 눈을 빛내는 게, 도현에게 궁금한 게 무척이나 많은 것 같았다.
“저….”
도현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
도현은 아직 이 두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였다.
도현은 조금 늦은 통성명을 했는데, 도현의 앞에 자리한 아이가 아일라, 아일라의 짝이 로건이었다.
통성명을 끝냈을 때, 해리가 반 아이들의 주의를 모았다.
그는 여러 가지 별자리 사진이 들어간 프린트를 나눠준 후, 각 조가 이 중 한 별자리를 골라서 발표할 거라고 설명했다.
오늘 그들이 해야 할 건 어떤 별자리를 발표할지와 각각 어떤 역할을 맡을지였다.
헤더가 안경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어떤 별자리로 할지부터 정해보자.”
로건이 곧바로 외쳤다.
“난 이거! 난 이게 좋아! 이거로 하자!”
“뭐? 난 싫어!”
아일라가 눈을 찌푸렸다.
“다 같이 정해야지. 네 맘대로 하는 게 어디 있어?”
“그럼 넌 뭐가 하고 싶은데?”
“난 이거!”
“너네들은?”
로건이 헤더와 도현을 보았다.
헤더는 아일라가 고른 별자리와 같은 별자리를 골랐다.
도현이 고민하는데.
“야, 나랑 같은 거 골라!”
로건이 도현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자 아일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건 반칙이야! 줄리엣! 제대로 골라야 해!”
이제 막 조별 과제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도현은 벌써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도현은 상관없다는, 일종의 기권패를 내밀었고 2 대 1로 아일라의 바람대로 되었다.
도현은 로건의 얼굴을 살폈다.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된 탓이었다.
로건은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
도현이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번복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우리 역할은 어떻게 정할까?”
“아무렇게나 해.”
로건의 태도가 심드렁해진 것이었다.
그런 로건의 태도를 못마땅히 보는 헤더에 도현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헤더는 불필요한 분란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일단 누가 발표할지부터 정할까? 난 발표는 싫어. 주목받는 건 끔찍해.”
“나도 발표는 싫어!”
“나도.”
헤더의 물음에 차례대로 아일라와 로건이 말했다. 도현은 자신에게로 쏠린 시선에, 답이 정해졌음을 깨달았다.
“발표는 내가 할게.”
“그럼 피피티는?”
“나! 내가 할래.”
아까까지만 해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했던 로건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도현은 의아하면서도 조금 안심했다.
“피피티 하면 자료 조사는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래도 자료 조사는 다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일라가 그리 말하자 로건이 거세게 반발했다.
“피피티 만드는데 자료 조사까지 하라고? 줄리엣! 너도 우리는 자료 조사에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도현은 어떻게 하든 별다른 상관이 없었지만, 로건의 주장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료 조사까지 하게 되면 발표와 피피티를 맡은 아이들에게 비중이 쏠리는 건 사실이었다.
도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자료 조사는 헤더랑 아일라가 하고, 대신 자료를 취합해서 어떤 정보를 쓸지 선별하는 건 다 같이 하자.”
“소금? 소금이 왜?”
어리둥절해하는 아일라에 대신 답한 건 헤더였다.
“소금(salt)이 아니라 s-o-r-t 선별(sort)이야. 가려서 따로 나눈다는 뜻이고.”
모르는 단어라, 가장 익숙한 발음을 상기했던 아일라가 볼을 붉히며 멋쩍어했다.
그러자 로건이 우스운 표정을 만들며 아일라를 약 올렸다.
“멍청이! 바보래요!”
“너도 몰랐으면서!”
금방 투닥대는 아일라와 로건이었다. 아일라가 로건을 향해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것을 도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헤더가 볼펜으로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그럼 도현의 말대로 하는 거지?”
아일라가 동의했다.
로건은 도현의 뒷말이 조금 불만인 듯해 보였으나,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해서 발표는 도현, 피피티는 로건, 자료 조사는 헤더와 아일라로 정해졌다.
“벌써 끝났네!”
아일라의 말처럼 수업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이미 할 일은 끝나 있었다.
아일라가 몸을 쭉 내밀며 말했다.
“영화제 얘기 해주라! 누구누구 봤어? 누가 제일 예뻤어?”
그에 질세라, 로건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무슨 법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는 자연스레 에드워드로 흘러갔다.
“대단하다! 에드워드랑 친하다니.”
“에이, 친한 건 아니지. 밥 한번 먹은 거뿐이잖아.”
아일라가 감탄하자, 로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에 아일라가 반박했다.
“같이 밥 먹을 정도면 친한 거지!”
“밥 한번 먹은 거 가지고 너무 난리인 거 아니야? 한 끼 먹는 것 정도는, 아무나랑 할 수 있잖아.”
“에드워드가 아무나랑 밥을 먹겠어?”
“에드워드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솔직히, 에드워드가 얘랑 친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말에 책을 읽고 있던 헤더가 끼어들었다.
“그게 왜 말이 안 되는데?”
“에드워드는 세계적인 스타잖아!”
로건이 당연하다는 투로 답했다.
로건의 말에 둘의 시선이 향한 건, 당연히 도현의 쪽이었다.
“줄리엣! 너 에드워드랑 친한 거 맞지?”
“아니라니까.”
“너한테 안 물었어!”
로건에게 일갈한 아일라가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입을 열었다.
“영화제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서….”
“봐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럼 영화제 끝난 이후로 연락 안 했어?”
“아….”
아일라가 로건의 말을 산뜻하게 씹고 물은 질문에, 도현은 한 기억을 떠올렸다.
영화제가 끝난 다음 날, 도현은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수상 축하와 에이전시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고 연락하라는 말, 그리고 연락할 일 있으면 편하게 하라는 당부가 담긴 문자였다.
물론, 발신인은 에드워드였다.
“응?”
아일라가 대답을 재촉했다.
기대가 가득 담긴 눈에, 도현이 말간 표정으로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는 주고받았어.”
“! 봐, 내 말이 맞지?”
아일라가 기세등등하게 로건을 보았다. 그러나 로건은 아일라보다 도현의 말이 더 신경 쓰이는 기색이었다.
헤더도 놀란 기색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해서, 도현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한 번 주고받았을 뿐이야. 그 후로는 연락하지 않았고.”
도현의 대답에 헤더의 안경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면 너, 에드워드와 연락처를 교환했다는 소리 아니야?”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아일라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여, 연락처…!”
그때였다.
“지금 연락해봐!”
로건이 무척이나 흥분한 기색으로 도현의 팔을 흔들었다. 그에 도현이 당황해서 반문했다.
“지금?”
“응!”
로건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기대하고 있는 건 아일라나 헤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도현은 돌연히, 솔직하게 답하는 게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그건 안 돼.”
도현이 거절하자, 곧바로 물음이 되돌아왔다.
“왜?”
“에드워드랑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어려울 것 같아.”
“문자도 했다며?”
“한 번 했을 뿐이야.”
“그냥 한 번만 하면 안 돼? 비밀로 할게!”
“그래도….”
도현이 곤란한 낯을 했다.
아무리 에드워드가 편하게 연락하라고 했다지만, 도현이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연락하는 건 큰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에드워드라면 웃을 것 같기는 한데….’
그가 괜찮다고 해서 무례가 아닌 건 아니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아이들은 도현의 완곡한 거절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헤더가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물렸다.
도현이 친구들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자, 헤더가 신경 쓰지 말라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로건은 마음이 상해 불퉁한 표정을 지었고 아일라는 미련이 가시지 않는 듯, 도현을 계속해서 떠보았다.
도현은 난감한 미소로 대응할 뿐이었다.
* * *
“다녀왔어요.”
“다녀왔니?”
서혜나가 도현을 반갑게 마주했다. 도현이 그녀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도현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비행기를 탄 이장혁은,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없었다.
“아빠는 가셨어. 지금은 비행기 안일 테니까… 내일 연락해볼래?”
같이 배웅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도현의 생일 때문에 이미 충분히 무리해서 샌디에이고에 머물렀던 걸 알기에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안 고프니? 과일 깎아줄게. 무슨 과일이 좋아?”
“사과가 있을까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봐. 아, 위에 올라가서 가방 놓고 내려오렴.”
“알겠어요.”
도현이 방으로 가서 옆에 가방을 놓고, 손을 씻은 후 이왕 온 김에 옷까지 편한 홈웨어로 갈아입었다.
물론 학교 갈 때 입은 옷도 편한 운동복이었지만, 역시 홈웨어가 더 편하긴 했다.
아래로 내려가자 거실 테이블에 예쁘게 깎인 사과가 보였다. 새빨간 껍질 색깔에 윤기가 돌아서 상당히 맛있어 보였다.
“토끼 모양으로 깎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
이게 토끼 모양이었구나.
그냥 윗부분 껍질만 잘라낸 줄 알았던 도현이었다.
“…토끼 같은데요?”
“그러니?”
도현의 말을 듣고 서혜나가 사과를 요리조리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삭!
사과는 무척이나 달았다.
두 사람은 잠시 사과를 먹으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아.”
서혜나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도현아, 내일부터 베이비시터가 올 거야.”
“아….”
도현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영화 촬영 뒤풀이 이후.
로잔나와 애버리에게 여러 가지 말을 들은 서혜나는 도현에게 베이비시터를 두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맥락은 다르지만, 그의 생활을 돕는다는 점에서 간병인과 매우 비슷했다.
도현에게는 익숙한 일이라 쉽게 승낙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적당한 베이비시터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베이비시터를 할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서혜나의 기준치에 ‘적당한’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서혜나는 도현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았다. 섣불리 아무나 붙여서 일을 그르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속사정을 모르는 도현은 그저 베이비시터를 구하기 어려운 걸로 알고 있었다.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을 구한 거예요?”
서혜나가 웃었다.
“응.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구했어. 내일 스쿨버스 내리는 곳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너무 놀라지 마.”
“네, 알겠어요.”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
“혹시라도, 온 사람이랑 잘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꼭 말해줘야 해. 알겠지?”
도현이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서혜나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엄마랑 약속해줘, 그럼.”
서혜나가 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걸 멀뚱히 보고 있자, 그녀가 재촉하듯이 손가락을 살짝 흔들었다.
도현이 손가락을 들어 그 손가락에 살짝 갖다 대었다. 그러자 서혜나가 꽉 얽더니 크게 흔들었다.
“엄마랑 약속한 거야! 자, 따라 해봐. 약속!”
“…약속할게요.”
어쩐지 아람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람이는 잘 지낼까?’
문득, 한국에 있을 아람이가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 도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