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그해, 가을, 겨울 (3)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도현이 바이올린을 꺼냈다.
그동안 꾸준히 관리한 덕에 곧바로 연주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았다.
바이올린을 가볍게 점검한 후, 손가락을 풀었다.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 지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일 꾸준히 연주했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연주를 쉰 건 처음이었다.
턱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낀 도현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손이 얼마나 굳었을지 궁금했다.
그러면.
도현의 얼굴에 누군가를 닮은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은빛 선율이 날카롭게 울렸다.
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
악기로 쓰는 작은 종이라는 뜻의 ‘campanella’답게, 은빛의 아름다운 종이 울리는 소리를 닮은 연주곡.
도현이 팔이 움직일 때마다 가지각색의 종들이 울렸다. 종이 울리는 소리는, 분명한 은빛을 품고 퍼져 나갔다.
조그마한 은색의 빛무리가 음표를 타고 통통 튀었다.
고음부로 가자 작고 여린 종이 울리는 듯이 영롱한 소리가 났다. 바이올린에서 그토록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게 신비로울 정도였다.
호쾌하게 내리긋는 움직임에 따라, 은색의 빛무리가 미끄럼틀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이 바삐 움직일수록 도현의 얼굴에 유쾌한 미소가 번져갔다. 두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 넘실거렸다.
쉴 새 없이 팔이 움직였다. 놀라울 정도의 기교가 작은 아이의 손에서 펼쳐졌다.
고음부에서 저음부로 접어들 때였다.
끽!
“아!”
활이 잘못 미끄러지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음이 이탈했다.
정신을 쏙 빼놓을 듯이 이어지던 연주가 뚝 끊겼다. 도현은 어정쩡하게 선 상태로 팔을 내리다가.
“푸핫!”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금 전에 울렸던 종소리만큼이나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속이 탁 트일 만큼이나 시원하게 웃은 도현이 침대 위로 털썩 누워버렸다.
그대로 고개만 돌려 창문을 보자, 소낙비가 굵은 빗줄기를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눈을 감으니 비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연주 같았다.
토도독. 토독.
비가 멎어가자, 작은 물방울이 튀기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렸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도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상해요. 한국에 형의 기억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형은 이탈리아도 자주 방문했는걸요.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괜찮았어요. 사람들이 많아서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연주해도 분명 괜찮았을 거예요.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나른함과 졸음이 조금 묻어져 나왔다.
졸음에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길 때쯤이었다.
【…내가 매번 널 졸졸 쫓아다니는 건 아니야.】
감고 있음에도 보이는 하얀빛에 도현이 눈을 떴다. 그러곤 어딘가 궁색한 덩어리의 변명에 작게 웃었다.
“알아요. 한가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
비꼬는 어조는 아니었는데, 왠지 놀림 받은 기분이 드는 덩어리였다.
【그, 궁금한 부분 얘기나 하자.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멀쩡했던 이유가 궁금하다고?】
“네.”
【영혼에도 고향이란 게 있어서 그래.】
“고향이요?”
의외의 단어에 도현이 반응했다.
【그래, 고향. 인간들이 제 고향에 가면 익숙함을 느끼고 멀어지면 향수를 느끼듯이, 영혼도 마찬가지야.】
“그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영혼 때문인 건가요?”
【명백한 선후관계를 따질 수는 없어. 둥글게 이어진 끈처럼, 돌고 돌 뿐이거든.】
“닭과 달걀처럼요?”
【비슷하지.】
도현은 덩어리의 말버릇 한 가지를 깨달았다. 덩어리는 무언가 확실히 답하기보다는,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세상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영혼도 색을 가졌을 뿐, 본질은 기지. 결국, 영혼은 세상에 퍼진 기와 상호작용 할 수밖에 없어.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주변의 기가 영혼의 색채에 동화되는 일이 생겨나. 그건 아주 미세하고 미약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순리에 따라 금방 흘러가 버리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면 일종의 관성이 생기지.】
도현이 바이올린을 품에 안고는 말간 눈으로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의 색채에 물드는 게 빨라지지.】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게 정신에 영향을 준 거고요?”
【그렇지. 한국에서는 네 주변의 기들이 너보다는 정희성의 영혼에 물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정희성의 영혼이 반응하게 되고, 계속해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그때와 같은 상황이 된 거야.】
모든 게 명료하게 이해되었다.
“그런 거구나….”
납득한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아.”
도현이 덩어리를 보았다.
“저 어제 생일이었어요.”
【축하를 바라는 거냐?】
“아니요. 축하받기엔 이미 지나 버렸는걸요. 그냥 제가 그날 울었는데….”
도현이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형이 생각나서 그랬어요.”
눈앞에 두둥실 떠 있는 덩어리를 보던 도현이 눈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그냥… 덩어리 님께는 말하고 싶었어요.”
도현이 여린 숨을 내쉬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걸 말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도현은 알 수 없었다.
* * *
이튿날 오후.
아이들은 해리 선생님의 인도하에 컴퓨터실로 이동했다.
과학 시간에 할 발표를 위해 시각 자료를 만드는 법, 그리고 동영상이나 피피티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자리는 조별로 앉았다.
“너 이거 해본 적 있어?”
헤더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야.”
“나도 그래.”
헤더는 도현의 대답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사실, 피피티 맡을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했어. 넌 발표고 난 할 줄 모르니까. 골치 아플 뻔했는데 로건이 한다고 해서 다행이었지.”
헤더는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 탓에 말수가 적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다.
헤더와 잡담을 하고 있다 보니 수업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자, 이건 여길 눌러서….”
앞에서 해리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주며 아이들이 따라 하도록 했다.
도현은 피피티를 맡지는 않았지만, 배워두면 좋을 것 같단 생각에 열심히 따라 했다.
‘생각보다 쉽네.’
도현이 그리 생각하며 마우스를 딸칵일 때였다.
도현의 눈에 로건과 아일라가 킥킥거리며 떠드는 것이 들어왔다.
‘재밌는 대화 중인가?’
도현도 수업 시간에 종종 진이나 니콜라스와 쪽지도 주고받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도현을 따라 앞을 본 헤더가 눈가를 찡그렸다.
“쟤네 수업 안 듣는데?”
헤더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는 몸이 화면을 가리고 있어서 못 봤는데, 이제 보니 딴짓을 하면서 웃고 있는 거였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일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너네도 같이 할래? 재밌어!”
아일라가 해맑게 웃으며 권하자, 헤더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했다.
“자유 시간에 하면 되는데 뭐 하러?”
“그래? 그럼 말구! 그럼, 줄리엣은?”
“나도 괜찮아.”
“으응… 그래.”
아쉬운 기색으로 도현을 쳐다보다가 다시 컴퓨터로 몸을 돌리던 아일라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있잖아, 그 후로 에드워드한테 연락은 안 왔어?”
“응. 안 왔어.”
“왔는데 안 왔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진짜 안 왔어.”
“나중에 연락이 오면 꼭 알려줘야 해. 알겠지?”
“나도!”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 없어 하며 컴퓨터를 하던 로건이 끼어들었다.
도현이 한 박자 느리게 긍정의 답을 돌려주자, 두 아이는 기뻐하며 도로 게임에 집중했다.
과학 시간이 끝났다.
도현이 컴퓨터를 끄는데, 진과 니콜라스가 도현의 앞에 와서 섰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이 곁에 섰다.
반으로 돌아가려던 때, 아일라와 눈이 마주쳤다.
“약속 잊으면 안 돼!”
그 당부에 도현이 알겠다고 답한 후, 진과 니콜라스와 함께 컴퓨터실을 나왔다.
“무슨 약속?”
니콜라스가 궁금해했다.
“에드워드한테 연락이 오면 알려달래서, 그러겠다고 했어.”
“아일라가?”
“아일라랑 로건이.”
“뭐야.”
니콜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도현이 의아해하자, 니콜라스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걔 네가 에드워드랑 연락하는 게 거짓말 같다고 하던데. 너한테 왜 그런 부탁을 해?”
“…로건이?”
도현이 떨떠름히 묻자 니콜라스가 긍정했다.
“응.”
진이 대번에 낯을 구기며 물었다.
“언제 그랬어?”
“점심시간에!”
“뭐야! 도리가 거짓말쟁이라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리는 명함까지 받았는데!”
도현이 에이전시를 추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두 사람이었다.
니콜라스와 진이 열을 내는 와중에, 도현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걷고 있었다.
얼굴에 모호한 감정이 떠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로건은 도현에게 매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쉬는 시간에는 뒤를 돌아서 도현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로건은 감정적인 면이 있지만, 좋은 친구였다.
로건이 점심시간에 했다던 말도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들 수 있을 법한 생각이었다.
‘아는데…’
기분이 이상꾸리했다.
“야, 이것 봐 웃기지!”
로건이 교과서에 낙서한 그림을 보여주며 웃었다.
교과서에 실린 인물 사진 위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한 모양새였다.
도현이 적당한 반응을 해주며 로건을 따라 웃었다.
로건은 금방 다른 애한테 가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랑했다.
도현이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괜히 의식하게 되네.’
니콜라스의 말을 듣고 난 후, 로건을 대하는 게 조금 어색해졌다.
다행히 도현이 가장 자신 있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인정까지 받은 분야가 표정 관리인 덕분에,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크게 생각하지 말자.’
도현은 생각을 털어냈다.
벨벨벨- 벨벨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쳤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진과 니콜라스와 함께 건물을 나오자, 금발의 말쑥한 남성이 반듯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밀턴이었다.
얼굴을 환히 밝히며 밀턴에게 걸어가던 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나 말하는 걸 까먹은 게 있는데!”
“안녕, 얘들아. 오, 도현이구나! 영화 잘 봤단다.”
“-이거였어!”
진이 해맑게 말했다.
밀턴의 푸른 눈이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은 어쩐지 그 푸른색이 오늘따라 선명히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있는데.”
“영화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연주자에 대해서 이야길 좀 나눌 수 있겠니?”
“-이거야!”
니콜라스가 말은 밀턴이 다 했는데 생색은 자신이 내는 진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이 뭐 문제 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편 도현은.
‘그 얘기겠지?’
긴장한 기색으로 낯을 굳혔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밀턴은 음악 평론가였고, 도현의 연주를 들은 적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야기는 할 수 있는데, 스쿨버스를 타야 해서 오래는 못 해요.”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으마. 간단한 확인만 하고 싶은 거니까.”
밀턴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잠시, 구석진 쪽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걸어가며 밀턴이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영화는 정말이지 훌륭했어! 유는 어리고, 무모하고, 미련했지만…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었어. 보는 내내, 그 소년에게 푹 빠져 버렸으니까 말이야. 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극장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단다.”
영화제 이후 처음으로 관람객에게 들은 감상평이었다. 도현은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밀턴은 주변에 들을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고 하니 직접적으로 말할게. 무례를 용서해주렴.”
도현이 대답할 새도 없이, 밀턴이 말했다.
“H.”
도현이 말간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게 왜요?”
“공교롭게도 네 이름 스펠링에도 H가 들어가더구나.”
상황을 파악한 니콜라스와 진의 얼굴에 긴장이 차올랐다.
“나는 도현(Do-hyun)의 H인 거 같은데, 내 생각이 맞니?”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