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29)화 (130/582)

제129화. 그해, 가을, 겨울 (4)

네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진이 초조한 낯으로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니에요.”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현의 낯은 지극히 태연했다.

너무 대수롭지 않은 투라, 진과 니콜라스조차 별일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연기구나!’

진이 감탄했다.

도현의 답에 밀턴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도현이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그렇구나.”

예상한 질문이 아닌, 수긍이 돌아왔다.

쉬이 납득하는 모습에 도현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그러나 밀턴은 더 얘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네.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과였다.

“…괜찮아요.”

푸른 눈에는 호의가 섞여 있었다.

도현은 어느 부분에서는 굉장히 둔감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비상한 눈치를 가지고 있었다.

도현은 깨달았다.

‘내가 H인지 궁금했던 게 아니야.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질문의 의도는 사실 여부 확인이 아니라, 의사 확인이었다.

도현이 묘한 눈빛으로 밀턴을 보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스쿨버스에 올라타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자, 이만 가야지. 스쿨버스에 늦지 않게 타려면 말이다. 진, 우리도 가자.”

밀턴이 손을 내밀자, 진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잡았다.

그들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나도 보고 싶어!”

“안 돼. 진은 나이가 아직 어리다고 했잖니.”

“하지만 내 친구가 나오는 영화인걸. 그리고 도리도 봤다고 했어.”

“도현은 영화의 주연 배우니까.”

“하지만, 나랑 나이가 같잖아?”

“그건 도현의 부모님이 허락해줘서 그렇지.”

“아빠도 허락해줘!”

“안 돼.”

밀턴은 엄격했다.

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도현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도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도현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자극적인 내용이 있어서, 진과 니콜라스가 보기에 적절한 영화는 아닐 것 같았다.

‘부모님도 영화 보고 많이 놀라셨었지.’

샌디에이고로 돌아온 후, 부모님은 앞으로 촬영할 시나리오 대본을 구체적으로 알려줘야만 촬영을 허락해줄 거라고 말했다. 단호하던 서혜나와 이장혁을 떠올린 도현이 목 뒤를 한번 쓸었다.

스쿨버스를 타는 방향과 진의 집 방향은 달라서, 그들은 중간에 갈라져야 했다.

인사를 하던 때였다.

“밀턴.”

밀턴은 차분한 목소리에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그 말간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도현을 꽤 여러 번 보았음에도 그 위에 유의 이미지가 겹쳐질 만큼이나, 영화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밀턴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고마워요.”

또렷하고 분명한 어조였다.

그 말에 밀턴이 생각에 잠겼다.

의문의 연주자 ‘H’.

촬영 팀도, 배우도, ‘H’와 같이 작업했던 바이올리니스트까지 입을 다물어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연주자.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화두에 오르고 있는 주제였다. 이 추세라면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그 정체에 관심을 보일 게 뻔했다.

밀턴 또한, 진의 친구가 출연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나, 를 본 가장 큰 이유는 H에 대한 흥미였다.

어쩌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연주자의 정체를 찾는 프로그램을 짜도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목적과 다르게 그는 영화 자체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보는 내내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달빛>이 퍼져 나갔을 때.

그 기시감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이와 비슷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 강렬하고 거친 심상의 주인을….

‘이런.’

밀턴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진실에 도달했다.

집에 오자마자 진에게 물었지만, 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르는 척 굴었다.

‘시선이 왼쪽으로 가는군.’

그는 진이 태어났을 때부터 봐온 사람이었다. 진이 거짓말할 때 버릇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로써 밀턴은 확신했다.

“흠.”

밀턴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고마울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음악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로서, 의문의 존재를 밝혀내는 게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진을 실망하게 할 순 없지.’

그 전에 밀턴은 아빠였다.

밀턴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밀턴의 웃음을 본 도현은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진을 한번 쳐다보다가.

“그러네요.”

마주 웃어 보였다.

도현과 니콜라스는 진과 밀턴에게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휴우!”

니콜라스가 가슴에 손을 대고 안도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마터면 너인 걸 들킬 뻔했잖아. 깜짝 놀랐네.”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때였다.

“도오리!”

밀턴과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야 할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몸을 비스듬히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뛰어왔는지, 볼이 상기된 진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억, 도리야! 오해하면 안 돼!”

상체를 편 진이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난 맹세코 아빠한테 아무것도 말 안 했어!”

이것 때문이었나.

도현이 작게 웃었다.

“알고 있어.”

“정말?”

“응.”

“그래? 다행이다! 혹시 오해할까 봐 걱정했거든.”

진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밀턴이 진을 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럼 나 진짜 갈게! 안녕!”

“그래, 내일 봐.”

도현이 진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갑자기 온 것처럼, 진은 갑자기 사라졌다. 도현이 밀턴을 향해 뛰어가는 진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야! 웃고 있을 때가 아니야! 버스 떠나겠어!”

니콜라스가 팔을 잡아당기며 급박히 말하는 것에, 도현은 정신을 차리고 함께 스쿨버스로 뛰어갔다.

왜 이리 늦게 왔냐는 타박을 들어야 했지만, 두 아이는 다행히 늦기 전에 스쿨버스에 탈 수 있었다.

스쿨버스 내부는 늘 그렇듯이 왁자지껄했다. 그 소음의 일부는 도현과 니콜라스가 떠드는 대화 소리였다.

“베이비시터가 온다고?”

“응.”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는 아기가 아닌데, 베이비시터가 왜 필요한 거야? 나도 충분히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니콜라스가 툴툴거렸다.

도현도 공감했다.

솔직히 법적으로 문제만 되지 않는다면, 엄마가 베이비시터에 대해 물어봤을 때 싫다고 답했을 터였다.

니콜라스의 말처럼, 자신은 충분히 홀로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였다.

베이비시터는 불필요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도현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 간다!”

“잘 가. 내일 보자.”

“오케이!”

니콜라스가 먼저 내려서 집에 가고, 스쿨버스는 도현의 집 쪽으로 향했다.

도현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차창을 통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았다. 따사로운 오후의 풍경이었다.

지잉-

‘누구지?’

도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가, 발신인을 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도현아!

“아빠.”

발신인은 이장혁이었다.

- 지금 학교 끝났니?

“네, 집에 가는 중이에요. 잘 도착하셨어요?”

- 응. 어젯밤에 도착해서, 지금은 아침이야.

그렇다면 오래 못 잤을 것 같은데, 무리해서 전화한 건 아닌가 싶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 괜찮아. 어차피 출근하는 중이거든. 그보다, 학교는 어땠어?

시차 적응도 어려울 텐데 쉬지 않고 곧바로 회사로 향하는 이장혁에 도현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걱정스러운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이장혁이 물은 질문에 대답했다.

“학교에 가니까,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게 많았어요.”

- 뭐? 하하!

도현의 말에 학교에서 일어난 상황을 대강 유추한 이장혁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 우리 아들 완전 인기스타네?

“제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궁금해한 거예요.”

도현의 완고한 부정에, 이장혁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빠가 봤을 땐, 거기에 도현이에 대한 관심도 많이 섞여 있을 거 같은데?

“아닐 것 같….”

이야기하던 도현이 말을 멈췄다. 옆 라인에 앉은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앗! 눈 마주쳤어!”

아이가 굉장히 놀라워했다.

“…지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도현이 말을 정정했다.

* * *

탁.

이장혁이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아들과 통화를 하니, 기운이 솟는 기분이었다. 조금 남아 있었던 피곤이 싹 날아갔다.

이장혁이 기분 좋게 회사로 들어갔다. 대표를 알아본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 왔다.

대표실로 향하던 이장혁이 걸음을 늦추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리 어수선하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다.

그때, Marine의 수석 디자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오랜만이에요.”

이장혁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음?”

디자이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무슨 일이 있죠.”

“네? 대체 무슨….”

이장혁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을 흐리자, 디자이너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대표님 아드님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잖아요!”

이장혁이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게 회사에까지 알려졌나요?”

“대표님 혹시… 뉴스 못 보셨어요?”

“뉴스라니…?”

“아드님이 수상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온갖 방송사 뉴스에서 수상 소식을 전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회사가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 아침 뉴스에 나왔다고요?”

이장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영화제에 초청된 이후, 연락이 너무 많이 왔다.

아들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다른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오는 연락은 모두 받지 않았던 서혜나와 이장혁이었다.

그래서 이런 소식까지 모르는 참사가 발생했다!

“뉴스도 뉴스인데, 인터넷에서 반응이 장난이 아니에요. 영화 본 사람들이 한국에 천재가 나타났다고… 회사에도 본 사람이 몇 명 있는데 다들 하나같이 꼭 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 사람들이 주말에 많이 보러 갈 것 같아요.”

“허어….”

이장혁이 탄식을 내뱉었다.

도현과 함께 있을 땐 너무 정신이 없기도 했고 도현의 태도가 너무 의연해서 어느새 익숙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리 들으니 아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게 확 다가왔다.

이장혁이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 그렇게 반응이 좋아요?”

“음… 말로 할 게 아니라, 이거, 이거 봐 보시겠어요?”

이장혁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검색창에 ‘방랑자’가 쳐진 게 보였다. 이장혁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관람객 평점

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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