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30)화 (131/582)

제130화. 그해, 가을, 겨울 (5)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점액질처럼 희미하고, 끈적이는 기억의 조각들.

그날 이후로 케일리는 드문드문, 아이를 떠올렸다.

때론 후회였고, 죄책감이었으며, 걱정과 호기심이었고, 미련인지 그리움인지 모호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케일리가 아이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반추해 볼수록, 케일리는 아이의 다정함을 하나둘씩 이해해갔다.

그녀만이 노력하는 줄 알았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스스로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아이의 다정함에 기대어 있었음을, 배려받고 있었음을 몰랐다.

지나쳤던 다정함을 깨달은 날이면, 평소보다 조금 더 자주 떠올렸다.

어느 날이었다.

띠리링-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케일리는 막 어린 아들을 재운 참이었다. 피곤한 숨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가지러 간 사이, 벨 소리가 끊겼다.

케일리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케일리가 잠시 화면을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한번 고르고는,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엇나가 다시 한번 눌러야 했다.

-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냈어요, 케일리?

“그럼요. 저는 잘 지냈죠.”

- 지금 바쁘신 건 아닌가요? 통화해도 괜찮을까요?

“집에서 쉬던 중이었어요. 괜찮아요. …무슨 일인가요?”

-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부탁이요?”

- 네, 도현이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서….

케일리는 언제나 서혜나의 말씨가 분명하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 …그래서, 케일리만 괜찮다면 도현의 베이비시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제 부탁이 무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릴게요. 도현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케일리, 당신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케일리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케일리?

“제가 해도 될까요?”

- 물론이죠.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인걸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줬어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이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서혜나가 말을 번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도현에게….”

* * *

툭!

당황으로 손힘이 풀린 탓에 가방이 땅에 떨어졌다.

도현이 가방을 주워 들려는데, 그보다 먼저 가방을 줍는 손이 있었다.

탁, 탁!

야무지게 바닥에 닿았던 부분까지 턴 케일리에 도현의 손이 방황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가방을 돌려주길 기다렸지만, 케일리는 오히려 제 어깨에 가방을 멨다.

“날이 더우니까,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네.”

도현이 앞장서는 케일리의 뒤를 따랐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성인의 긴 그림자와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도로 위에 늘어졌다.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케일리가 도현에게 앉아 있으라고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도현은 거실 소파에 멀거니 앉아, 케일리에게 돌려받은 가방을 가만 껴안고 있었다.

신경이 주방 쪽으로 쏠렸다. 주방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 나온 케일리의 손에 들린 건, 예쁘게 깎인 사과가 담긴 접시와 시원한 음료수였다.

탁.

테이블 위에 접시와 음료수 잔이 놓였다. 얼음이 담긴 잔이 흔들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과는 토끼 모양을 한 채로 접시에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케일리가 도현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네가 퇴원한 후로 사과를 깎을 일이 별로 없어서, 실력이 조금 녹슬었어.”

“…여전히 예쁜걸요.”

도현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포크로 쿡 찔러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무른 부분 없이 싱싱한 사과가 입안에서 씹혔다. 달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케일리는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늘 병실에 있던 아이였다. 차갑고 적막하던 병실과 따뜻하고 아늑해 보이는 집 안은 몹시 대비되게 느껴졌다.

- 도현에게 미리 말하지 말아 달라고요?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어려운 일은 아닌데….

- 네, 그렇게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 알겠어요. 그럼 케일리의 말대로, 비밀로 하고 있을게요.

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운 눈치였지만, 별다른 사정을 묻지 않고 수긍했다.

케일리는 도현을 눈에 담았다.

도현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할지 자신이 없었다. 거절당한다고 해도, 직접 보고 듣고 싶었다.

그저 아이가 잘 지내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케일리는 욕심을 부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많이 밝아졌다고 들었다.

예전처럼 멍하니 있는 시간도 줄고, 자주 웃는다고 들었다. 친구들도 사귀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케일리가 아는 도현의 미소는, 메마른 나뭇잎처럼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것뿐이었다. 그조차도 마지막에는 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도현이 옅게 웃었다. 미미하지만, 건조한 미소가 아닌 생기를 품은 미소였다.

‘진짜 웃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긴 정적 끝에, 도현이 먼저 물꼬를 텄다.

“어떻게 된 거예요, 케일리?”

“혜나 씨의 연락을 받았어.”

“엄마가요?”

“응. 너를 보살펴줄 수 있겠냐고… 그리 물으셨어. 그래서 나는 곧바로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어.”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케일리는 간병인이잖아요.”

간병인과 베이비시터의 맥락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도현의 입장에서였다.

케일리는 자격 요건을 갖춘 전문 간병인이었다. 그녀가 베이비시터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단다. 아이를 보는 건 자신 있어.”

“그 문제가 아니라… 그건 케일리의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말한 거예요.”

도현이 아는 케일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간병인이었다.

다른 이들은 포기하고 그만두거나, 혹은 그저 돈을 벌겠단 심산으로 도현을 방치했지만 유일하게 케일리만이 도현을 진심으로 돌봐주었다.

당시엔 오롯이 자신을 감당하는 일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지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케일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겠다는 선택을 한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어쩌면… 어쩌면, 형보다 먼저 온기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사람이 그녀인지도 몰랐다.

“오….”

케일리가 탄성을 흘렸다.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이는 한결같았다. 케일리는 지금껏 제 발목을 붙든 것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그건 소년의 다정함이었다.

“…정말 상냥한 아이야.”

케일리가 웃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담긴 미소였다.

“네 말대로 간병인은 내 직업이란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 너를 돌보는 일이 더 하고 싶었어. 그게 나에게 더욱 큰 기쁨이 될 것 같구나.”

이어진 음성은 조금 떨렸다.

“내게 기회를 주겠니?”

도현은 조금 전에 먹었던 사과의 단맛이 입 안에 남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가 전등의 불빛을 받고 먹음직스럽게 빛났다. 솜씨가 녹슬었다던 케일리의 말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섬세하게 깎인 모양새였다.

그녀는 사과 깎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향수에 잠긴 듯, 반쯤 낮아진 목소리가 차분히 울렸다.

“잘 부탁해요, 케일리.”

조금은 느릿한 어조였다.

그날 저녁.

서혜나가 일을 끝내고 집에 온 후, 세 사람은 단란한 식사 시간을 가졌다. 평온한 공기와 부드러운 대화가 오가는 시간이었다.

케일리가 돌아간 후였다.

“도현아. 엄마랑 약속은?”

도현의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던 서혜나가 물었다. 도현은 엄마와 했던 약속을 기억했다.

이불을 좀 더 끌어 올려, 얼굴을 조금 묻은 도현이 이렇게 말했다.

“케일리가 저를 돌봐주러 온 사람이라서 기뻐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답에, 서혜나가 기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 * *

미국 초등학교의 가을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척이나 들뜬 시기였다.

그 이유는.

“뭐로 분장하지? 작년에는 늑대인간 탈을 쓰고 왔는데, 엄마가 이번 년에도 그걸 쓰라지 뭐니! 그건 이미 질렸어! 무엇보다, 털이 너무 날려서 입에 들어간다고. 오, 퍼레이드를 하는 내내, 털을 뱉어내야 했다면 믿어지니?”

10월에는 Fall party. 즉, 할로윈 파티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더는 작년 할로윈 퍼레이드가 생각났는지, 무척이나 유감스러운 표정을 했다.

“너는 뭐로 분장할 거야?”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래? 나는 네가 드라큘라 백작으로 분장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 넌 피부가 무척이나 희니까, 잘 어울릴 거야. 아니면 핏기가 모두 빠진 시체 분장이라거나.”

“추천 고마워. 참고하도록 할게.”

기대에 가득 차 들뜬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도현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진이랑 니콜라스는 뭐로 할까?’

도현이 두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때였다.

“줄리엣! 에드워드는 할로윈에 뭘 한대? 할로윈에 그도 분장을 하니?”

아일라가 도현의 책상 가까이 몸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도현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아일라는 종종, 도현과 에드워드 사이를 무척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로 치부하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도현은 당혹스러웠다.

“그도 할로윈을 즐기지 않을까?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 에드워드와는 그런 연락을 하는 사이가 아니거든.”

“물어보면 안 될까? 넌지시 할로윈 파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가 우리 학교 파티에 올 수도 있잖아!”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었는지, 아일라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에드워드는 바쁜 사람이잖아.”

이미 몇 번이고 그와의 관계를 부정했던 도현이었기에, 더 말을 얹지 않고 이 정도로만 답했다.

“하긴. 그런 슈퍼스타라면 많이 바쁘겠지? 분명 할로윈 파티로 온갖 셀레브리티들이 모인 호화로운 곳에서 할 거야! 맙소사! 완전히 별세계일 게 분명해.”

아일라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아일라가 그 파티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있을지 하나하나 열거하며 말했다.

아일라는 유명인들의 생활을 무척이나 동경하는 듯싶었다.

“그 파티에 네가 초대된다면, 파트너로 나를 불러줘.”

“그렇게 할게.”

도현이 웃음을 참으며 아일라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진심 어린 대답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일라의 말조차 장난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도현은 진과 니콜라스와 함께 학교의 잔디밭에 가서 몰래 가져온 과자 하나를 끌렀다.

도현은 쉬는 시간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진, 니키. 너희들은 할로윈에 무슨 분장을 할 거야?”

“음,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 너는?”

“나도.”

“정말? 나한테 아주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의뭉스러운 진의 미소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할로윈에 줄리엣 분장을 하는 건 어때? 분명 아주 예쁠 거야! 전교를 뒤져보아도 너보다 예쁜 애는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해!”

“아냐, 괜찮은 거 같아.”

줄리엣으로 분장하는 것까지는 상관없었지만, 그 후폭풍이 몹시 걱정됐다. 도현의 머릿속에서, 앨리슨이 달려와 무어라 말한 후 며칠 뒤 기사가 실려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그게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왜? 정말 잘 어울릴 텐데….”

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도현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스레 니콜라스에게 무슨 분장을 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르샤가 보았더라면, 이 사고뭉치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의심했을 미소였다.

“아주 무시무시한 분장을 할 거야. 다른 애들이 보면 눈물이 쏙 나오도록! 특히….”

니콜라스의 눈이 막 주변을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쟤 말이야!”

니콜라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부딪치자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으르르!

도현은 어째서 니콜라스에게서 개 소리가 들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질세라, 다비드도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진과 도현이 예상했던 대로, 니콜라스와 다비드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특히, 이번에 둘이 과학 시간에 같은 조가 되어 그 갈등은 더욱 심해졌는데, 과학 시간만 되면 한쪽에서 둘이 아웅다웅 다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 수 있는 건.

“야! 뭐 해, 손 떼!”

도현이 발버둥 치는 니콜라스의 시야를 가렸다. 시야가 차단되자 니콜라스는 조금씩 얌전해졌다.

도현이 잘했다고 말하며 니콜라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다비드는 쉬웠다.

“다비, 과자 먹을래?”

진의 물음에 수줍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듯이 노려보던 얼굴이 금방 사랑의 열병에 걸린 소년의 것으로 변했다.

‘다비드는 연기에 재능이 있는지도 몰라.’

도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표정 변화 속도가 아주 훌륭했다.

시야의 자유를 되찾은 니콜라스가, 주변에 앉아서 뻔뻔하게 과자를 먹는 다비드의 모습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서로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던 두 사람이 팩! 고개를 돌렸다.

도현이 속으로 웃었다.

싸우면서도 속으로는 선을 지키는 두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냥, 서로 싸우는 게 재밌는 걸지도 몰랐다.

다비드와 니콜라스가 들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태연히 하는 도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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