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그해, 가을, 겨울 (8)
‘드디어…!’
은서가 주먹을 쥐었다.
<방랑자>의 관람객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
입소문을 듣고 새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 봤는데도 또다시 보러 오는 소위 말하는 ‘n회 차’ 관람 인원도 많았다.
그 폭발적인 관심에 돈 냄새를 맡은 배급사는 상영관 수를 늘렸고, <방랑자>를 상영하는 상영관 수가 전국 180곳에서 223곳으로 증가했다.
이 말인즉슨.
“나도 영화 볼 수 있다!”
은서가 티켓을 쥐고 환호의 비명을 내질렀다.
은서는 영화 관람 후기가 나와도 스포가 될까 봐 보지 않고 꾹꾹 참았던 자신을 무척이나 칭찬했다. 한순간의 충동에 휘둘리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보러 가자고 했지만, 일정을 맞추는 시간조차 아까워 미리 보러 온 은서였다.
‘친구랑은 두 번째에 보면 되지.’
한 번은 혼자 보고, 한 번은 친구랑 보고, 한 번은 가족이랑 본다는 계획을 세운 은서가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여유롭게 팝콘을 사서 상영관에 들어간 은서가 착석했다. 상영 시작 시간보다 이르게 왔는데도,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와작.
캐러멜 맛 팝콘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콜라를 빨대로 시원하게 들이켜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바삭하던 팝콘은 안타깝게도 두 시간여 뒤, 눈물에 젖어서 눅눅해졌다.
“휴지… 휴지 어딨어.”
은서가 새빨개진 눈과 코를 하고선 휴지를 찾았다. 물론, 평소 준비성이 철저하지 않던 그녀에게 휴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은서는 하는 수 없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 들어간 은서는 저도 모르게 뿜을 뻔했다.
“푸훕!”
은서처럼 눈과 코가 빨개진 사람들이 저마다 휴지를 들고 닦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이 웃긴지, 울면서도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은서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상당히 괴이하게 여겼을 광경이었다.
“진짜… 아직도 바이올린 소리가 어른거려.”
친구끼리 왔는지, 여자 둘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유가 진짜 미쳤지 않아? 그, 영화 장면 중에서 유가 지옥에서 살기 싫다고 했을 때! 나 그때 나 소름 쫙 돋았잖아!”
“나도, 나도!”
두 사람은 영화에 대한 이야길 나눴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바로 옆이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 가서 평론도 찾아보려고.”
“평론? 너 그런 것도 봐?”
“아니, 나도 원래 안 보는데. 이도현 인터뷰한 기자가 쓴 평론이 있거든? 인터넷에서 영화 본 사람들은 평론까지 꼭 보라더라. 해석이 미쳤대.”
“진짜? 나도 봐야겠다!”
어쩌다 보니 아주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
은서는 매무새를 정돈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커뮤니티에 들어가 <방랑자> 평론에 대해서 검색하자, 꽤 많은 게시글이 나왔다.
[나 방랑자 때문에 영화 평론 처음 찾아서 읽어봤다ㅋㅋㅋㅋ]
은서 같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무슨 릴레이처럼, 영화를 보고 평론까지 찾아 읽은 후기를 써놓고 있었다.
<방랑자>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자, 영화 내용이 떠올라 울컥했다. 갑자기 훌쩍이는 젊은 여성에 버스 안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은서의 얼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잉? 은서야, 너 왜 얼굴이 시뻘게져 있어? 세상에, 눈이 부었네.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아냐! 영화 보고 운 거야! 나 그럼 방에 들어간다!”
“얘! 은서야!”
엄마가 은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은서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고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정말 요즘 애들은 알 수가 없어….”
은서의 엄마가 닫힌 방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편.
침대 위에 다이빙한 은서가 핸드폰으로 영화 평론을 검색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궁금해 죽을 뻔했지만, 집에 와서 천천히 보고 싶은 마음에 꾹 참았다.
은서가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무비데일리의 평론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따로 찾아볼 필요도 없이, 제일 상단에 <방랑자>의 평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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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선과 악,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
글 : 전하리
❘선과 악의 세계
<방랑자>의 주인공 유(이도현 분)는 악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선과 악의 기준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 바로 천주교의 제10계명 교리다.
유가 제10계명을 어긴, 혼돈과 악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면 이사야(맥 버클러 분)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이사야는 안정과 선의 세계에 속한 인물로서, 천주교 교리를 따르는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사야와 유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것은 앞으로 선과 악의 세계가 교차할 것이라는 예고와도 같다. <방랑자>의 갈등은 선과 악의 세계가 접촉함으로써 시작된다.
(…)
❘영화를 관통하는 소리, 바이올린
극 전반에 걸쳐 등장하며 통일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다. <방랑자>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등장시키는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단순히 극의 안정감을 위해서 이러한 구조를 쓴 걸까. 영화에서 ‘바이올린 소리’라는 장치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가 중요하다.
‘바이올린 소리’는 유가 처음 선의 세계에 발을 디딘 원인이고, 유와 이사야의 갈등이 극단에 치달았을 때 갈등을 해소한 장치이며,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갈등의 해소, 혹은 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즉, 바이올린 소리는 선과 악을 연결하고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면의 교차가 선악의 교차를 예고했다면, 화면이 밝아지기 전부터 흘러나온 바이올린 소리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보였던 선과 악의 세계가 이미 맞닿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다.
마지막에 울린 바이올린 소리는 이 모든 세계의 화합, 나아가 모든 운명의 굴레를 끊고 선과 악의 교차점에서 끊임없이 방랑하는 삶을….
❘알을 깨고 나온 아이
<방랑자>의 모티프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아 왔던 고전 소설, <데미안>이다. <데미안>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을 고르라면, 이 구절일 것이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다.”
- <데미안> 발췌.
유가 속해 있던 악의 세계, 이사야가 속해 있던 선의 세계는 두 아이에게 있어서 알이었다. 그들의 인식은 그 작은 알에 갇혀 있었다.
두 아이는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며, 그들만의 규칙, ‘고해’와 ‘증명’으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한다. 그 모든 과정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과정이었다. 결국, <방랑자>는 두 아이가 알을 깨고 나아가는 여정인 셈이다.
천천히 부서져 가던 그들의 세계는, 고해와 증명을 넘어 개척의 길로 나아가면서 완전히 깨져버린다.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진정한 자아로 이르는 삶’이라는 압락사스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
❘두 세계를 잇는 통로
❘<방랑자>의 메타포
❘‘당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
옥상에서 유가 바이올린을 꺼낸 순간부터, 유와 이사야를 교차하여 보여주던 화면은 오롯이 유만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는 내적인 갈등 끝에 자신만의 답을 내리고 <달빛>을 연주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연주가 이어지며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까맣게 물들었던 화면은 다시 밝아진다. 그리고 정적 속에서 누군가 눈을 뜨는 듯한 연출로 막을 내린다.
눈을 뜬 존재가 누구인지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이사야나 주변 배경을 비춘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바이올린 연주가 오롯이 유의 상상 속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임을 의미한다.
눈을 뜬 것은 유일까, 아니면 이사야일까.
유는 극 중에서 “유. 성은 없어. 그냥 유야.”라는 대사를 한다. 집을 나온 유가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별 의미 없는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Yu가 Y(o)u의 약자라면 어떨까.
유는 영화의 주인공인 동시에 영화를 보고 있는, 삶을 방랑하는 우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결말을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당신(You)이기 때문이다.
“미친….”
은서가 양팔을 부여잡았다.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 있었다.
방금 영화를 본 탓인지, 영화 장면과 오버랩이 되면서 소름이 끼쳤다.
“미쳤다, 진짜….”
은서가 다시 화면을 위로 올려, 처음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걸 두어 번 더 반복한 후, 은서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표정으로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톡. 토도독.
[얘들아! <방랑자> 보고 영화 평론 꼭 봐! 링크도 달아 놓음!!]
은서가 쓴 게시글 하나가 수많은 평론 글 추천 대열에 합류했다.
* * *
“아일라, 집중해.”
“조금만 쉬었다가 하자! 아까부터 계속 자료 조사만 했잖아.”
헤더의 지적에 아일라가 우는소리를 했다. 헤더가 짜증을 속으로 삼키고는 그러자고 말했다.
“오예! 해방이다!”
아일라가 신나 하며,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헤더와 아일라는 과학 발표 자료 조사를 위해, 아일라의 집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과제 하는 내내 아일라가 자꾸 딴짓하고 놀려고만 해서, 헤더는 몇 번이고 화를 내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헤더도 수다 떠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금방 기분을 풀고 아일라와 대화를 나눴다. 아일라는 몹시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있잖아. 옆 반에 비비 있지? 비비가 다비드를 좋아한대!”
“다비드는 진을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왜 좋아하는 걸까? 난 이해하기 어려워.”
“난 되는데? 다비드는 나름 잘생겼잖아.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걔가?”
헤더가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지었다. 헤더의 눈에 다비드는 멋있는 척하는 코찔찔이였다.
“헤더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럼, 넌 누가 제일 잘생긴 것 같아?”
“줄리엣.”
헤더가 고민 없이 말했다.
“줄리엣? 너 줄리엣 좋아해?”
아일라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그 격한 반응에 헤더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잘생기면 좋아해야 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야.”
“그렇구나. 하긴, 사실 다비드보다 줄리엣이 더 인기가 많으니까.”
헤더가 자신의 짝을 떠올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눈매가 조금 올라가 있어 그럴 때면 차갑고 까탈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차가울 것 같다는 생각과 다르게 성격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무엇보다, 웃을 때면 주변이 다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주로 진과 니콜라스를 보며 그렇게 웃는데, 그러면 남의 얼굴에 관심이 없는 헤더도 종종 시선을 빼앗기고는 했다.
‘그 애는, 자기가 인기 많은 것도 모르겠지.’
헤더가 본 도현은 그랬다.
“근데 난 걔 요즘 좀… 실망이야. 내가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맨날 안 된다고 하잖아. 좀 서운해.”
헤더는 아일라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아일라의 말을 못 들었던 헤더가 대충 대답했다. 그러자 아일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치! 솔직히, 한번 연락하는 게 엄청난 일도 아닌데 정말 너무한 것 같아. 걔는 매번 연락할 거 아니야. 그러면 한 번쯤은 다른 애들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헤더는 아일라의 어투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한 번도 안 들어준 거 아니? 좀 이기적인 것 같아.”
헤더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헤더가 조금 조심스러워진 어투로 물었다.
“그건 이기적인 거랑 별로 상관없지 않아?”
“자기만 독차지하려는 거잖아! 그리고, 전화 한번 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아일라는 무척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당당했다. 오히려 억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더는 그런 아일라가 어이없었지만, 아일라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헤더는 누군가와 기운을 빼며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헤더가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미적지근 반응하자 아일라가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았다.
“로건이나 다른 남자애들이 줄리엣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하는 거 아니? 만약 연락하게 해주면, 그런 오해도 안 받을 거 아니야. 내 생각에는 이 편이 줄리엣에게도 좋을 거야. 근데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일라는 마치, 도현이 잘못 판단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를 위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헤더는 특이하지만 친절한 자신의 짝을 좋아했다. 아일라와 함께 도현의 뒷담을 하고 싶지 않았다.
헤더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가는 쪽을 택했다. 그럼에도 아일라의 말은 계속 귀를 타고 들어와, 헤더는 조금 괴로운 기분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