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그해, 가을, 겨울 (9)
“자료가 엄청 깔끔하다.”
도현이 감탄하며 말하자, 아일라가 기분이 좋아진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이제 ‘선별’이라는 걸 하자!”
아일라가 특정 단어에 유독 억양을 세게 하며 말했다. 저번에 아일라가 소금과 헷갈렸던 단어였다.
그것을 기억한 도현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일라가 어깨를 으쓱했고 로건이 토하는 시늉을 했다.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헤더였다.
헤더는 불편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지금 아일라가 생색을 내고 있지만, 자료 조사는 헤더가 거의 다 했다. 아일라가 한 것이라곤 깨작깨작 조금 찾아보다가 놀자고 조른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헤더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자료 조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침대에 누워서 도현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조잘조잘 늘어놓던 아일라가 도현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달랐다.
아일라는 마치, 어제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헤더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헤더, 무슨 일 있어?”
두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헤더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도현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발표 자료나 정리하자.”
여전히 도현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니, 어제는 아일라도 서운한 마음에 그런 소릴 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어제 일은 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거, 별자리 설화 재밌다.”
그러나 헤더는 조 활동에 집중하지 못했다. 잊자고 생각해도, 자꾸 한편으로는 도현과 아일라에게 신경이 쓰였다.
조별 활동 중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생긴 변화도 있었다.
지금까지 모르고, 아니, 알아도 별일 아니라 치부하고 넘어갔던 일들이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요즘 에드워드는 새로운 영화를 찍니?”
“…나는 그와 연락한 지 오래됐어, 아일라.”
아일라의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담겨 있었지만,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아일라와 도현의 저 대화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득, 평소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헤더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매일같이 억지를 부리고 졸라댄다. 이유를 설명해도 믿지 않으며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물어온다. 그리고 또 반복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무척이나 끔찍해서, 헤더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노이로제에 걸리겠어!’
만약 헤더였다면, 아일라의 행동에 질려서 참지 못하고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상상만 해도 귀찮고 짜증이 났다.
헤더는 새삼, 도현이 아일라에게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 * *
2HV 활동은 최근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진행되었다.
그동안은 하고자 하는 건 많지만 준비된 건 없어서 우왕좌왕했다면, 어느 정도 기틀이 자리 잡고 나자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도현이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박스 안의 뼈대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박스 내 구역을 나누고, 커다란 소품을 만드는 작업은 모두 선생님들이 해주었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창고와 이어지는 부분도 창고 문의 모양과 비슷한 크기로 뚫려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다른 선생님이 말려도 개의치 않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직접 통로를 낸 것이다.
“어때? 괜찮지 않니?”
도현의 옆에 다가온 교장 선생님이 물었다. 도현은 2HV 활동을 하면서 많은 이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말을 거는 것을 좋아했다. 슬픈 부분은, 교장 선생님이 말을 거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존재했다.
바로 진과 도현이 그 경우였다.
진은 본래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도현에게는 소중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대화를 잘 받아주는 두 아이를 무척이나 기꺼워했다.
“아주 멋져요.”
도현이 감상평을 말하자, 교장 선생님이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이번 할로윈 파티는 무척이나 기대되는구나. 그동안 델마 아카데미에서 했던 파티 중에서 가장 멋질 거야.”
“파티를 좋아하세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게 좋단다. 그럼 나도 함께 즐거워지거든.”
온화한 애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도현이 대답했다.
“그럼 이번 할로윈 파티는 선생님께 무척이나 즐거운 파티가 되겠네요.”
“그렇지. 그렇겠구나!”
그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갔을 때, 도현은 교장 선생님이 엄마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놀랐다.
놀랍게도,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의 이름뿐만 아니라 학부모 성함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도현은 그가 이 학교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현과 교장 선생님은 유령의 집에서 나와 다시 열심히 소품 만들기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여러분, 집중해 보세요!”
줄리아가 아이들의 주의를 모았다. 시끄럽던 강당이 조용해지자, 줄리아가 말했다.
“이제 유령 역할을 맡을 친구들을 뽑으려고 해요. 역할을 맡은 친구들은 다음 날부터 연습을 시작할 거고, 다른 친구들은 지금처럼 소품을 만들 거예요.”
“너는 지원할 거지?”
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도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응. 너는?”
“난 그보단 파티를 즐기고 싶어. 역할을 맡으면 한동안 유령의 집에서 같은 행동만 반복해야 하잖아.”
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리아가 유령 역할을 맡으면 파티를 즐기기 어려울 수 있다고 겁주듯이 말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줄리아의 말을 듣던 진이 가볍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랑 같이하고 싶으면 말해. 네가 원한다면야!”
가슴께를 탕탕 치며 호탕하게 말하는 진에 도현은 마치 하늘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호기심도 차올랐다.
“같이하면 즐거울 것 같아.”
“으, 응?”
진의 어벙한 반응에 도현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차분히 물었다.
“같이할래, 진?”
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도현이 진짜 이렇게 말할 줄 몰랐던 것 같았다. 도현이 장난이었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런 것쯤이야!”
목소리는 떨렸지만, 얼굴은 진지했다. 그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에 도현이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진은 한 박자 늦게, 도현이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은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렇게 안 봤는데 좀 한다 등등 말을 쏟아내던 진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는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두 아이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숨을 죽이고 끅끅대며 웃었다.
“자, 그럼 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볼래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도현이 큼, 목을 다듬으며 손을 들었다. 도현을 제외하고도 손을 든 사람이 꽤 있었다.
줄리아 선생님이 손 든 아이들을 한쪽으로 모았다. 진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다시 소품 만들기를 시작했다.
“앨리슨.”
도현은 앨리슨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넌 역시 지원했구나!”
앨리슨은 도현이 지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건 굉장히 희귀한 일이야.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우가 유령의 집에서 유령 연기를 한다니 말이야! 오, 네가 세계 최초이지 않을까?”
앨리슨이 몹시 흥미로워했다. 사실, 그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도현에 대해서 그냥 ‘유명한 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에, 어른들은 도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선생님 중에서는 <방랑자>를 본 사람이 꽤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줄리아가 있었다.
줄리아는 앨리슨과 떠드는 도현을 보며 신기함 반 설렘 반을 느끼고 있었다.
도현이 이번엔 또 어떤 것을 보여줄지, 무척이나 기대됐다.
역할 정하기는 지원한 사람이 하되, 여럿이 몰리면 일종의 오디션을 통해 뽑기로 했다.
도현은 처음부터 하고 싶은 역할을 미리 정해두었기 때문에 차례가 되자 고민 없이 손을 들었다.
‘경쟁률이 조금 높을 것 같은데.’
손을 들며 그런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도현은 매우 쉽게 원하는 역할을 따낼 수 있었다. 도현이 손을 든 것을 본 다른 아이들이 지원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미안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어려웠다.
* * *
“어? 니키?”
반으로 돌아오던 도현과 진은 복도에서 니콜라스를 마주쳤다. 니콜라스는 운동장에서 한바탕 뛰고 왔는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고작 점심시간 동안 헤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수다를 떨었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팀이 이겼다는 자랑을 했고, 도현은 원하는 유령 역할을 맡았다고 말했다. 진은 교장 선생님이 몰래 주었다는 사탕을 둘에게 나눠주었다.
진과 니콜라스, 도현이 사탕으로 불룩해진 뺨을 한 채 반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해리 반에서 세 명의 조합은 반의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진은 리더십이 있어 아이들을 곧장 이끌뿐더러 모두와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인기인이었고, 니콜라스는 장난기가 많기는 하지만, 운동을 잘해서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꽤 인기가 있었다. 도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
뒤이어 들어온 다비드가 환한 얼굴로 진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했다.
요즘엔 그 삼총사 멤버에 다비드가 종종 끼어들면서, 부러움의 시선은 더욱 강해졌다.
물론 저 네 사람이 그들끼리만 노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 같이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무리 지어 다니는 그룹은 의미가 달랐다.
그렇기에 저 그룹에 끼어서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더 인기가 많은 무리와 어울리고 싶은 욕망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본능에 가까웠다.
한쪽에 모여서 떠들던 아이들이 자연스레, 저 아이들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현의 얘기가 나오자 안색을 밝힌 아일라가 말했다.
“있지, 오늘은 그냥 에드워드가 새로운 영화를 찍는지 물어봤을 뿐인데도 대답을 안 해줬다?”
“정말? 그건 딱히 숨길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연락하게 해달란 것도 아닌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로건의 말이 맞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비밀로 할 필요는 없잖아?”
아일라가 헤더를 돌아보았다.
“헤더! 너도 옆에 있었으니까 들었지? 안 된다고 한 거.”
자신의 말에 동조해주길 바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헤더는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아일라가 교묘하게 바꿔 말한 사실을 꼬집었다.
“대답을 안 해준 게 아니라, 에드워드랑은 연락한 지 오래돼서 모른다고 한 거잖아.”
그러자 아이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에이, 뭐야. 그런 거야?”
솟아올랐던 관심이 흐지부지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일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짓말한 걸 수도 있잖아? 알려주기 싫어서 말이야.”
“그런가?”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주장하는, 에드워드와 연락처를 교환한 사이라는 것도 거짓말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여자애 한 명이 말했다.
“로건이나 남자애들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니? 난 줄리엣이 거짓말한 건 아닌 거 같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다로 나뉘어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아일라도 신이 나서 그 사이에서 떠들었다.
자연스럽게 도현의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부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하기 어렵다.’라는 내용이었고 뒤이어진 말은 ‘저번에 지우개를 주워줬다.’, ‘나는 볼펜 잃어버렸을 때 같이 찾아줬다. 결국 내 주머니에서 나왔는데도 찾아서 다행이라고 하더라.’와 같은 긍정적인 말이었다.
도현의 성정 자체가 워낙 얌전하고 평소에 행실이 발라서 부정적인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헤더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전에 나눈 대화와 아일라가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쳤다.
톡톡.
책상 위를 두들기는 하얀 손가락에 헤더가 옆자리를 보았다.
괜히 찔린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헤더의 상태를 모르는 도현이 옅게 웃으며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그러더니 책상 아래를 통해 다른 손을 살그머니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감싸인 사탕이었다.
도현이 작게 속삭였다.
“진이 교장 선생님께 받았대. 몇 개 더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말해.”
“…고마워.”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평소 헤더가 시니컬하게 말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도현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사탕을 받아 든 헤더는 굳은 낯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바로 앞자리인 아일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헤더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