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35)화 (136/582)

제135화. 그해, 가을, 겨울 (10)

툭.

도현은 교과서 위로 날아온 하얀 종이를 펼쳤다. 단정한 필체로 쓰인 글자가 선명했다.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고개를 돌리자, 헤더와 눈이 마주쳤다. 도현은 의아해하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쉬는 시간!”

아이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헤더가 도현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화장실 가는 척 복도로 나와, 아이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라운지의 라이브러리 존으로 향했다.

도현은 헤더의 태도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오리란 걸 짐작했다. 푹신한 주황색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책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헤더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평소 머뭇거리는 법 없이 확신에 차 있던 헤더가 주저했기에, 도현은 헤더가 말을 꺼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네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헤더. 오히려 네가 걱정인걸.”

그만큼 헤더의 안색은 별로 좋지 못했다.

심호흡하던 헤더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어제 말이야….”

간간이 도현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헤더의 예상과 다르게 도현의 표정은 잔잔했다.

헤더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일라의 험담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진실과 험담은 한 끗 차이였다.

헤더는 지금 자신이 아일라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러나, 말을 멈춘 헤더에 도현이 건넨 한마디로 인해서 걱정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많이 힘들었겠다, 헤더.”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도 하루 동안의 마음고생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헤더는 도현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별개로, 헤더가 도현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너 괜찮은 거야?”

“응.”

도현이 찡그리는 건지 웃는 건지 모호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로건이나 몇몇 애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거든.”

“알고 있었다고?”

헤더가 기겁했다.

‘그럼 알면서도 로건이랑 잘 지낸 거야?’

헤더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도현을 보았다.

“하지만 아일라가 그런 생각 하는지는 몰랐어. 알려줘서 고마워.”

“…나한테 고마워할 일은 아니야.”

헤더는 그 자리에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다. 도현의 감사에 헤더는 되레 낯이 뜨거워졌다.

“이 일은 비밀로 하면 될까?”

도현의 말에 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일라와 한번 대화를 해볼 생각이야. 그런 식으로 네 얘기를 하는 건 그만하라고 말이야. 그 전에 너한테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당사자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아일라에게?”

도현이 놀란 표정을 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아일라와 네 기분이 상할지도 몰라.”

헤더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아일라의 집에서 헤더가 딱 잘라 말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일라와 대화해보는 게 맞았다.

“응. 아일라와는 내일 따로 얘기할 거야.”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이건 선생님이 관여하실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그러면 일이 더 커지잖아. 그건 나에게도, 아일라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도현이 몇 차례 더 헤더를 말렸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헤더는 완고했다. 계속되는 설득에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지만, 끝내 뜻을 관철했다.

헤더와 다시 반에 돌아오면서도 도현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 * *

다음 날은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뛰어놀러 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헤더는 한적해진 교실에서 아일라에게 다가가 조용히 대화를 요청했다.

아일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헤더를 따라왔다.

“무슨 일이야?”

아일라가 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일라는 헤더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다.

혹시 재밌는 가십은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일라는 이런 비밀 이야기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헤더가 꺼낸 이야기는 아일라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아일라,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줘. 나는 네가 도현의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좋겠어.”

“…뭐?”

“도현은 굉장히 좋은 애야.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건 그게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고. 근데 그걸 다른 친구들한테 왜곡해서 말하면, 도현의 입장이 곤란해질 거야.”

“내가 언제 왜곡해서 말했다고 그래? 난 그런 적 없어!”

아일라의 부정에 헤더가 미간을 좁혔다. 헤더는 모순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걸 좋아하지 않았다. 헤더가 아일라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어제도 도현이 연락을 안 해서 모른다고 한 걸 대답을 안 해줬다는 식으로 말했잖아. 과제 할 때도 도현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실망스럽다고 했고.”

“그건….”

아일라가 말문이 막혔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도 나와 같이 이야기했잖아! 그런데 나만 이상한 애로 만드는구나?”

이번엔 헤더가 할 말을 잃었다.

아일라가 득의양양해졌다.

“네 말은 좀 이상해. 내가 그렇게 못되게 말한 것도 아니고, 서운하다고 한 거뿐이잖아? 그리고 생각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한 걸 말한 것뿐이야!”

“그걸 그렇게 많은 애들 앞에서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다른 애들이 도현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제 말했어야지! 이제 와 말하는 이유가 뭐니? 난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넌 꼭 나를 나쁜 애로 몰아가려는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야!”

헤더가 곧바로 부정했다.

헤더는 아일라와 싸울 생각으로 부른 게 아니었기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애써 참아가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일라, 내 말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사과할게. 어제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것도 네 말대로 내 잘못이 맞아. 내 말이 당황스럽게 느껴진다는 것도 이해해.”

헤더의 침착한 사과에 조금 진정했는지, 아일라가 화를 내지 않고 헤더의 말을 들었다. 아일라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도현의 얘기를 할 때 마음이 불편했어. 도현이 일부러 말을 안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단 얘기는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니잖아.”

헤더는 내친김에 다 말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도현에게 에드워드에 관해서 묻는 것도 그만하면 좋겠어. 매일같이 물어본다면 누구라도 피곤할 거야.”

잠자코 헤더의 말을 듣던 아일라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걜 귀찮게 했다는 거니? 오! 나는 이제 궁금한 것도 마음대로 못 물어보는구나! 그렇지?”

아일라는 무척이나 격분했다.

“내가 걔한테 강요한 것도 아니고, 물어본 것뿐인데 넌 그것 가지고 그러니? 이제 알겠다. 너는 그냥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구나. 그렇지, 헤더?”

헤더는 아일라와 이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을 줄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동시에 답답하고 화가 나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일라는 그런 헤더에게 틈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넌 마치 내가 줄리엣을 싫어하고 그를 괴롭히길 원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하지만 헤더, 네가 틀렸어! 내가 줄리엣이랑 얼마나 친한 줄 아니? 나는 그 애를 굉장히 좋아해!”

“네가 도현을 좋아한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상관없는 일이야.”

“왜 상관이 없어? 내가 줄리엣을 좋아하고, 친한 사이인데 줄리엣을 왜 곤란하게 만들겠어? 그리고 에드워드에 관해 물어보는 건 줄리엣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헤더, 왜 네가 난리야?”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치는 아일라에 헤더는 어이없음을 넘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헤더가 날카로운 투로 말했다.

“도현이 착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니?”

“줄리엣이 그렇게 말하기라도 했어? 아니잖아! 헤더, 순전히 네 짐작일 뿐이지!”

헤더가 짧게 탄식했다.

“넌 정말… 끔찍한 애구나.”

헤더는 더는 아일라와 말조차 섞기가 싫었다. 무슨 말을 하든 아일라는 제대로 듣지 않았고, 결국엔 도돌이표였다.

“더는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넌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말이야. 아일라, 너를 위해 충고하건대, 너는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법을 익혀야 할 거야.”

헤더는 아일라가 무어라 말하는 것을 무시한 채로 반으로 돌아갔다.

진이 쭉 빠진 기분이었다.

헤더는 머리가 뜨겁고 속이 상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양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홀로 남은 아일라는 분이 풀리지 않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일라는 억울하고 분했다.

헤더는 자신이 조금 서운해한 걸로 자신을 이상한 애로 몰아가고, 별거 아닌 걸로 트집까지 잡았다!

과학 과제를 할 때, 참 착하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아일라의 착각이었다.

‘걘 내가 싫은 거야. 분명해!’

아일라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반에 돌아온 아일라는 헤더가 자리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헤더를 잠시 노려보던 아일라가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애들아!”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 끼어든 아일라가 헤더를 흘끔,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아, 나는 지금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야.”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 * *

도현은 헤더와 아일라가 걱정됐지만, 본격적으로 연기 연습을 시작하느라 두 아이를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

‘멈춰버린 백작의 성’ 시나리오는 도현과 앨리슨이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써두었기에, 완성본을 배부한 후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도현은 줄리아의 시범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사람들은 도현이 모든 대사를 이미 외웠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면서도 묘하게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연기에 두 번 놀랐다.

2HV 멤버들은 도현이 어떻게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탈 수 있었는지 이날 똑똑히 알았다.

도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비드조차 도현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내비쳤을 정도였다.

“연습해 온 거니?”

줄리아의 물음에 도현은 처음 해본 거라 답하며,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격적으로 연기 연습을 시작하자 몹시 재미있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연기는 엉성했는데, 그들은 서로의 연기를 보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또, 그들은 도현에게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도현은 부담스러운 자리라며 거절했지만, 이미 2HV 멤버와 거의 다 친해진 데다가, 이견이 나올 수가 없는 연기를 선보였던 도현이 가르쳐주는 걸 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결국, 도현은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 자리에 이어 2HV 연기 코치까지 맡게 되었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도현은 반으로 돌아왔다. 도현이 반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찾은 건 헤더였다.

헤더는 자리에 엎드려있었다.

점심시간에 이처럼 낮잠을 잔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현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도현이 자리에 앉아 헤더를 깨우려는 순간이었다.

“줄리엣! 할로윈 파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니?”

평소보다 좀 더 밝은 목소리였다. 스스럼없는 아일라의 태도에 도현이 속으로 의아해했다.

‘일이 잘 풀린 건가?’

조금 마음이 놓인 도현이 아일라의 말에 대답하자, 아일라가 할로윈 파티 날이 기대된다며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아일라와 대화를 나누느라, 도현은 헤더를 깨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헤더가 일어났을 때는 수업이 시작했을 때였다.

고개를 든 헤더의 얼굴엔 수심이 내려앉아 있었다. 밝은 표정의 아일라와 대조적이었다.

툭.

헤더가 손 앞으로 던져진 종이를 펼쳐보았다.

[괜찮아?]

종이를 내려다보던 헤더가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끄적인 후, 도로 도현의 자리로 종이를 던졌다.

[네 말이 맞았어.]

도현은 그 한마디에서 헤더와 아일라의 대화가 좋지 않게 끝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도현은 배 위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운 심정이 되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도현은 헤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일라가 그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말을 걸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헤더는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도현은 헤더가 피곤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대신 헤더가 쉴 수 있도록 조심했다.

그건 실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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