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그해, 가을, 겨울 (12)
“얘들아, 잠시 좀 진정하고….”
해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이들을 말렸다. 그러나 흥분한 아이들이 쉽사리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니콜라스가 들었다는 부분에서 빠져나갈 구석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로건이 되레 성을 냈다.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거짓말 같아서 거짓말이라고 한 건데 뭐가 문제야? 그럴 거면 애초에 거짓말하지 말든가!”
“거짓말인 것도 확실치 않은데 이리저리 말을 하고 다닌 게 문제지!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거든?”
“얘들아!”
짝!
해리가 크게 손뼉을 치자,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소강되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해리에게로 쏠렸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자. 그리고 도현, 아일라, 니콜라스, 로건은 따로 나오렴.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으니까.”
해리의 말에 로건과 아일라가 우물쭈물했다.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반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해리가 이마를 짚었다. 절대 이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던 도현이 끼어 있어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리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얼른 따라 나오렴.”
도현은 기본적으로 모범적이고 성실한 학생이니, 이리 말하면 먼저 따라 나올 거란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다.
‘한 명이 따라 나오면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오겠지.’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건 곤란해요.”
“…응?”
해리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의심했다. 얼이 빠진 해리의 반응에도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나가서 따로 이야기하는 건 곤란할 것 같아요, 선생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심지어 ‘싫어요’도 아니라 ‘곤란해요’였다. 해리는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생에게 ‘곤란하다’라는 말은 지금 처음 들어보았다.
얼이 나가 있던 해리가 간신히 물었다.
“…왜 곤란하다는 거니?”
“이 일에 엮인 건 아일라와 로건, 니콜라스뿐만이 아닌걸요. 모두가 조금씩은 엮인 일이에요. 그러니 반 아이들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반 아이들 모두가…?”
“네.”
해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반을 둘러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해마다 몇 번씩은 일어나는 일이었다.
해리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그래도 여기서 감정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상황을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거야.”
도현은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했다. 보통 때라면, 도현도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그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히 하려면 지금 못을 박아두는 편이 나았다. 일이 모두 정리된 후 선생님이 나중에 반 아이들을 조용히 타이른다면 평화롭게 끝나겠지만….
아이들이 과연 반성할까?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그건 다 같이 해야 해요. 모두가 가해자고 방관자인걸요. 몇몇 아이들만 따로 불러서 이야기한다면, 다른 아이들은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거예요.”
혹은, 선생님의 잔소리 정도로 여기거나.
때론 선생님이 아닌, 동등한 입장이기에 와닿을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도현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해리는 말문이 막혔다. 일단, 초등학생 아이가 이렇게 말해 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현은 해리의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도현이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해리 반 아이들은 단연코, 그런 표정의 도현은 처음 보았다.
“너희들이 나와 헤더의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아. 물론 이 중에서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 내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해.”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불만스레 구겨졌다. 도현은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그냥 이야길 들은 것뿐인데. 별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도현의 말에 아이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억울하다고? 그래,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너희들이 억울한 게, 나와 헤더보다 더할까?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고 이상한 소문이 난 나와 헤더보다? 다른 애들이 너희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그때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 일로 반 아이들과 척을 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말한 김에 얘기해둘게. 나는 거짓말을 한 적 없어. 너희들한테 에드워드와 친하다고 거짓말해서 내가 뭘 하겠어? 관심받으려고?”
도현이 말하고서도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난 이미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데뷔작부터 최연소로 수상한 배우고, 첫 시나리오로 은사자상을 거머쥔 영화 작가인걸. 그런데 내가, 관심이 필요해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까?”
으스대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앉아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얼핏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로건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니콜라스는 오랜만에 ‘재수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만큼이나 도현은 오만하고 재수 없어 보였다.
‘쟤가 왜 저러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태도에 이상하게 여기다가.
‘화가 많이 났나 보지, 뭐!’
단순하게 결론을 냈다.
그런 니콜라스와 달리 진은 거의 유일하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연기를 하는 거야.’
아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헤더에게 쏠릴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조리 끌어오기 위해서.
‘그건 안 돼!’
끼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책상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서 있는 진이 보였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정말 거짓말했다고 믿은 게 아니라, 그냥 도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게 재밌었던 거 아니야?”
진이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도리가 그렇게 허세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거 모르는 애들 있어? 자랑할 일도 안 하는 앤데, 무슨! 너희도 사실 다 알고서 그랬던 거지?”
이번에는 로건을 노려보았다.
“정말 어이없어. 괜히 부러우니까 말도 안 되는 소문이나 내고 말이야!”
진은 말하다 보니 열이 받았는지 좀 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헤더 일도 마찬가지야! 헤더한테는 아무런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무작정 아일라의 말을 믿고 따돌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지, 진.”
도현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있었지만, 진과 니콜라스가 끼어드는 건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도현이 진을 말리려 했지만, 그보다 해리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지니 레이시, 그만하고 앉으렴.”
“선생님! 하지만!”
“안 돼.”
“윽…!”
진이 결국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해리가 도현을 쳐다보았다.
“이제, 상황 파악을 좀 해도 괜찮겠니?”
“네, 감사합니다.”
해리가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이 자리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던 건, 일종의 블러핑이었다. 설마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지만….
맹랑해도 너무 맹랑했다. 지금까지 해리가 도현에게 가졌던 이미지가 완전히 뒤집혀 버릴 정도였다.
“그럼 도현, 지니, 로건, 아일라, 니콜라스… 헤더, 헤더까지. 선생님을 따라 나오렴.”
도현은 이번에는 제일 먼저 해리를 따라 나갔다. 도현이 나가자 진과 니콜라스, 헤더도 따라 나갔고, 아일라와 로건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
해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간 곳은 라이브러리 존이었다.
‘여기 자주 오네.’
헤더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도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도현은 그 웃음에 안심했다.
해리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음에 당황하고 충격도 받았지만, 금방 수습했다. 그도 다사다난한 사건을 많이 겪어본 교사였다.
해리는 제일 먼저, 아일라와 로건을 따로 빈 교실로 데리고 가서 혼냈다.
그뿐 아니라 반성문까지 쓰도록 했으며, 도현과 헤더에게 정말로 미안한 감정을 느낄 때 사과하라고까지 얘기했다.
헤더와 도현에게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낄 때 사과할 것이며, 그때는 사과를 받아주라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곧바로 사과시키지 않는 해리의 대처에 도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해리가 부른 건 도현이었다.
“넌….”
해리가 몇 번 말을 꺼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해리가 말을 꺼내는 것보다 먼저, 도현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말이야?”
“선생님께 버릇없이 군 거요. 정말 죄송해요.”
잠시 도현의 말을 듣고 생각하던 해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선생님 말을 안 들은 건 잘못이지. 하지만 도현. 내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
“네?”
“왜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그게 헤더의 상황을 해결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네가 행동하기 전에 선생님과 같이 고민했다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거야.”
해리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더 커.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았더라면, 아니면 네게 충분한 믿음을 주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미안하다.”
도현은 해리의 사과에 당황했다.
그러나 도리어 해리는 도현의 어깨를 두들기며 많이 힘들지 않았냐며 위로했다. 도현은 얼떨떨하게 해리의 위로를 받았다.
위로와는 별개로, 도현은 수업 시간에 소란을 일으킨 일로 반성문 한 장이라는 벌을 받았다.
다음 시간은 워낙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 * *
다음 날부터, 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아이들은 더는 헤더를 따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헤더에게 미안해하며 많은 아이가 사과해 왔다.
도현이 놀랐던 것은.
“날 싫어할 줄 알았는데….”
도현은 학교에 오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반 친구들의 반응이 어떻게 변하든, 각오한 일이었으니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아이들은 도현이 등교하자마자, 거짓말이 아닐 줄 알았다거나, 그동안 미안했다는 둥 말을 하며 도현에게 말을 붙여왔다.
오히려 도현과 전보다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음.”
도현의 말에 점심 도시락으로 가져온 오믈렛을 오물거리던 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좀 의외긴 했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아.”
“왜?”
“도리는 인기가 많잖아. 원래 인기인이랑 척지길 원하는 애들은 거의 없어.”
“…그런 것 때문에?”
“그것도 있고…. 도리 네가 화를 내서 그런 게 아닐까?”
도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진이 말했다.
“너는 도통 화를 내는 법이 없었잖아. 그동안 분명, 은근히 널 만만히 생각하고 있었을걸? 그런데 어제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거지! 자기가 했던 행동이 찔리기도 했을 테고 말이야.”
니콜라스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만만하지 않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인기는 곧 권력이잖아? 항상 웃으며 뭐든 들어주던 애가,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러니까 잘 보이고 싶어진 거고.”
니콜라스는 여전히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고 도현은 진의 말을 이해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염세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는 아닐까 싶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았다.
“아, 모르겠다. 잘 끝났으면 된 거지, 뭐!”
니콜라스가 팔을 쭉 뻗으며 말하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나저나 도리, 나 계속 여기 앉아 있어도 될까?”
“…그게 무슨 말이야?”
도현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최연소로 수상한 배우이자 은사자상을 받은 작가의 옆자리잖아! 내가 이렇게 대단한 애랑 같이 밥을 먹어도 되나 몰라!”
“…니키.”
“니키!”
진이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현은 기대하지 않았다.
“빼먹은 게 있잖아!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데뷔작부터’ 최연소로 수상한 배우고, ‘첫 시나리오’로 은사자상을 받은 작가라고!”
역시나,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앗, 내가 실수했네!”
히히덕거리는 둘에, 도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선 엄마가 싸준 불고기비빔밥을 입에 넣었다.
살짝 드러난 두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현은 아이들 모두에게 화살을 돌렸고, 실제로 오늘 아침 아이들은 모두 해리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런 상황에서 헤더에게 불똥이 튈 까 봐 재수 없어(?) 보이려고 했던 건데….
‘좀 다르게 할 걸 그랬나.’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