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38)화 (139/582)

제138화. 그해, 가을, 겨울 (13)

해리 선생님이 아일라와 로건에게 사과하고 싶어질 때 하라고 했기 때문에, 도현은 그 일을 잊고 지냈다.

그랬는데….

“받아.”

도현은 의외의 상황을 마주했다.

“이거….”

“발표 피피티야.”

로건이 내민 건 작은 USB였다. 도현이 그 USB를 건네받았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그… 미안해.”

로건이 멋쩍은 기색으로 목 뒤를 긁적였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 해리는 아일라와 로건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로건이 한 일을 전해 들은 엄마는 무척이나 슬퍼하다가, 오늘 하루 동안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로건은 처음에 뚱해져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난리를 치는 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째깍, 째깍.

시간이 조금 흐르자, 차차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고 다닌 건 좀 그랬나?’, ‘나라면… 기분이 나빴겠지?’ 이런 생각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시 후.

벌컥!

로건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있던 엄마가 로건을 돌아보았다.

-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엄마가 미소 지었다.

로건과 그의 엄마는 어떻게 도현에게 사과해야 좋을지 같이 고민했다.

그 결과, 로건은 과학 발표를 위한 피피티를 엄마의 도움 아래 열과 성을 들여 만들었다.

그렇게 목요일 밤에 완성해서 오늘, 즉 금요일 아침에 도현에게 사과와 함께 USB를 건넨 것이었다.

도현은 예상치 못한 사과에 동요했다.

사실, 두 사람이 사과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크게 실망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건은 도현의 예상을 깨고 사과를 해 왔다.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 사과에서는 분명한 진심이 전해졌다.

- 아일라와 로건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그때는 용서해줄 수 있겠니?

해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현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괜찮아.”

선생님이 그렇게 당부하고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대답은 같았을 것이다.

로건과 도현이 나눈 대화는 몇 마디 없었다. 미안해와 괜찮아. 그게 전부였다.

그 짧은 한마디로 두 아이 사이의 앙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나, 두 아이와 달리 심기가 불편한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일라였다.

아일라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양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쪽에서는 헤더가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고, 바로 옆자리에서는 로건이 도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전의 헤더와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일라는 너무 외롭고 부끄럽고 미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반에서 아일라만이 혼자였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때였다.

“줄리엣! 로건이랑 화해한 거야?”

한 반 아이가 도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 명이 관심을 보이자, 아이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왔다.

“응. 로건이랑 화해했어.”

“잘됐다!”

아이들이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해 주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엎드려 있는 아일라를 힐끔 바라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일라는? 아일라와는 화해했어?”

“헤더는 아직 아일라가 사과를 안 했대! 그럼 줄리엣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작은 목소리로 떠든다고 떠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일라의 귀에는 전부 다 들렸다.

그것도 천둥처럼 너무 크게 들려서 속에 콱콱 박혔다.

‘빨리 가. 빨리 가란 말이야.’

아일라는 이 시간이 너무 지옥 같았다. 등 뒤로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일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일 초라도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아일라가 속으로 간절히 비는데, 담담한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왔다. 아일라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몸을 벌떡 일으킬 뻔했다.

“아일라와도 화해했어.”

“정말? 언제 한 거야? 오늘은 같이 있는 걸 못 봤는데!”

“어제 했거든.”

아일라는 멍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아일라는 도현에게 사과한 기억이 없었다.

“그럼 아일라도 용서한 거야?”

“응. 이미 화해했는걸.”

“내가 더 늦게 한 거야? 에이씨, 피피티 준비하다가!”

로건은 왜인지 아까워했고.

“뭐야, 그랬구나!”

아이들은 놀라워하며 저희들끼리 떠들다가, 아일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일라, 자니?”

“으응?”

아일라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너 줄리엣이랑 화해했다며?”

“…응.”

“왜 말 안 했어! 헤더랑은 언제 할 거니?”

“이따가… 하려고 했어.”

“그랬구나! 헤더가 우리한테 네가 사과한다면 받아줄 거라고 했어. 우리가 사과하는 거 도와줄까?”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에 아일라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아일라는 혼자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아이들은 아일라를 감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처럼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등 위로 드리워졌던 외로움의 그림자도 걷혔다.

“언제 사과할 거야? 쉬는 시간? 점심시간?”

“저, 점심시간에 하려고!”

아일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일라는 며칠 만에,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옆에서 도현의 책상에 엎드려 있던 진이 도현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물었다.

“아일라가 사과 안 했지?”

도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리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음….”

도현이 애매하게 웃었다.

‘착하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도현은 아일라가 아이들에게 소외될 거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

혼자 다니는 아일라를 볼 때마다 도현은 해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 네가 행동하기 전에 선생님과 같이 고민했다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정말 내 행동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도현이 아이들과 모여서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아일라를 보았다.

지금은 기쁠지 모르더라도,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것이다.

과학 시간에 일어난 일은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버렸다.

아일라는 자신의 주변이 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완전히 전처럼 돌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또다시,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이미 질릴 정도로 하고 있었다.

“그럼, 아일라랑 전처럼 친하게 지낼 거야?”

진이 몹시 불만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다가, 돌아온 대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니라고?”

“응. 나는 아일라를 용서하지 않았는걸.”

“그럼 아일라가 정말 사과하면?”

“…글쎄.”

지금 아일라가 사과한다고 해도 그게 진심일까?

도현은 조금 회의감이 들었다.

“그게 정말 진심이라면 용서하겠지만, 아니라면… 나는 아일라와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어.”

도현이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다면, 모두와 함께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진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답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도현이 진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아일라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해도, 정말로 용서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 진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믿는다고 해도, 아일라를 전처럼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

마음속에서 곧바로 답이 나왔다.

도현은 자신이 이렇게 냉정하게 누군갈 끊어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일라가 사과한다고 해도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 얘는 너무 착하고 순해서, 조금 덜 착해질 필요가 있어.

도현이 웃었다.

만약, 형이 이번 일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진짜냐고 되물을 형을 상상하다가,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도현이 폭풍 같은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실시간 검색어에 새로 올라오는 키워드가 있었다.

▲ 이도현 화보

   (…)

▲ 마린느 화보

바로, 도현이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 찍은 Marine 화보였다.

본격적인 가을 시즌에 접어들어, Marine 키즈 전 매장은 도현의 화보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이도현 미쳤냐;;]

(이도현 Marine 화보 사진)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선을 넘어버리는 듯. 아무래도 신고해야겠음.

내 마음속으로 입주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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