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그해, 가을, 겨울 (14)
“은혜야, 왜? 뭐 먹고 싶어?”
치맛자락을 주욱주욱 잡아당기는 은혜에 윤경희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은혜가 왜 이럴까?”
“은혜 엄마, 은혜 저기 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
김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한 브랜드 매장이 있었다.
“아!”
윤경희가 눈을 크게 떴다.
“토끼 왕댜!”
은혜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Marine라고 세련된 필기체로 써진 브랜드 매장 벽에는 익숙한 사람이 크게 걸려 있었다.
초록색 후드 티를 입고 운동화 끈을 매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화보 속 아이는, 바로 도현이었다.
“토끼 왕자라니요?”
김정아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김정아는 은혜가 유치원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유나의 엄마로, 두 사람은 오늘 신해백화점에 아이들 옷을 사러 나온 참이었다.
“하하, 은혜가 토끼를 좋아해서요.”
윤경희가 얼버무렸다. 괜히 도현이와 아는 사이라고 했다가, 유치원에서 복잡한 일이 생길까 봐 저어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은혜가 바라는 대로 Marine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간 윤경희는 입을 벌렸다. 매장 안은 다른 매장과 비교해도 확연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이게 이도현이 입은 옷이에요?”
“네, 그 제품 맞으세요.”
한쪽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옷을 고르는 게 보였다.
윤경희는 이 매장에 사람이 많은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한 애죠?”
김정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감탄하며 말했다. 윤경희가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 유나도 한 벌 사줄까 봐요. 그런데 여자아이 옷도 있으려나?”
“안녕하세요, 고객님. Marine 키즈 라인 전 제품은 남녀공용 옷이세요.”
그때 한 직원이 다가오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말에 김정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두 사람은 천천히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매장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거의 다른 매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단정하고 격식 있는 옷이 있는 왼쪽과 딱 봐도 컬러풀하고 활동적인 옷이 있는 오른쪽으로 나뉘었고 각각 벽마다 도현의 화보가 걸려 있었다.
김정아는 선택의 폭이 넓어서 재밌다며 좋아했다.
김정아는 왼쪽 코너에 관심을 가졌고, 윤경희는 오른쪽 코너에 관심을 가졌다. 두 사람은 잠시 갈라져서 옷을 골랐다.
“은혜야, 이 옷 어때? …어머, 얘도 참.”
은혜는 벽에 걸린 도현의 화보 앞에 서서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은혜야, 이따가 토끼 왕자님이랑 전화하자.”
윤경희가 어르고 달래고 나자, 은혜가 옷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은혜야, 노란색 티 예쁘다.”
“시러!”
“이 분홍색 잠바는?”
“시러!”
은혜가 도현이 화보에서 입은 옷이 아니면 묻는 족족 퇴짜를 놓는 통에, 결국 도현이가 입은 풀 착장을 그대로 구매하게 되었다.
초록색 후드 티를 입혀보니 살짝 커다란 사이즈에 은혜가 파묻힌 것 같았다. 오늘 입힌 무릎 위까지 오는 흰색 캉캉 치마가 잘 어울리다 못해 너무 귀여워서 윤경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윤경희는 계산을 마치고 김정아를 보았다. 그녀의 손에도 옷 봉투가 잔뜩 들려 있었다.
“유나 엄마는 뭐 샀어요?”
“저기 화보에 나온 착장 그대로 샀어요.”
“…정아 씨도요?”
“설마, 경희 씨도…?”
두 사람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한 손에는 옷 봉투를,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는 매장에서 나왔다.
‘도현이랑 혜나 씨는 잘 지내려나.’
윤경희는 매장을 나오며 미국에 있을 두 사람을 잠깐 그리다가, 김정아의 부름에 웃으며 따라 나갔다.
* * *
“케일리, 여기에 달까요?”
“응, 거기가 좋겠다.”
도현은 지금 할로윈을 맞이하기 위해 케일리와 함께 집을 꾸미는 중이었다.
도현이 사는 동네는 할로윈에 상당히 진심이라서, 벌써부터 할로윈 분위기로 꾸민 집들이 많이 보였다.
케일리와 도현은 정문에 뼈다귀 손을 매다는 중이었다.
도현이 하나를 매달곤 허리를 쭉 폈다. 정원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꽂힌 묘비 모양 비석이 보였다.
그날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과학 발표도 로건이 너무 열과 성을 다했는지 무지갯빛 찬란한 이펙트가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해리 선생님께 몇 번이고 극찬을 들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끝났고, 헤더는 문제없이 아이들과 어울렸다.
나중에 아일라의 사과를 받긴 했지만, 도현은 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것을 느낀 아일라도 도현을 피했다.
도현은 아일라에게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평범한 나날이….
지잉.
도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발신인은 에드워드였다.
영화제가 끝난 날 이후로, 거의 처음 연락하는 거라 도현은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심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잠시 후, 도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워드 녹스 : 다음 주에 할로윈 파티를 열 생각인데, 너도 오겠어? 다양한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올 거야.]
메시지는 바로, 할로윈 파티 초대장이었다.
도현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에드워드로부터 파티 초대를 받는다면 파트너로 데려가 달라고 했던 아일라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현이 아일라와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할로윈 파티 날이 공교롭게도 아카데미 파티 날과 겹친 것이다.
도현은 정중하게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려는데, 곧바로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에드워드에게서 온 전화였다.
“케일리, 저 전화 좀 할게요.”
“알았어!”
도현이 정원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화단 주변에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오랜만이야!
고상하면서 유쾌한 영국식 억양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에드워드.”
-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에드워드는요?”
- 나도 잘 지냈어.
두 사람은 잠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예의 있는 대화였다.
- 할로윈 파티에 오지 못한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그날 다른 일정이 있는 거야?
“그날이 아카데미 할로윈 파티 날이라서요.”
- 이런, 겹쳤구나. 그날은 뭘 하는데?
“유령의 집을 해요. 제가 거기서 유령 역할을 맡아서 빠질 수가 없네요.”
- 유령 역할?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는 도현에게 좀 더 자세히 묻더니, 상당히 재밌어했다.
- 즐거운 기억이 되겠네. 내가 가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인걸.
도현은 그가 예의상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 그나저나, 아쉽게 됐어. 네게 소개해줄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이지.
“소개요?”
- 그날은 젊고 유망한 배우나 가수뿐만 아니라, 감독이나 극작가, 에이전트들도 올 거거든.
도현은 이제야 이 파티 초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다. 그가 말한 에이전시 가입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 아, 에이전시에 대해서는 생각해봤어?
도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잊고 있었어요.”
- 뭐? 하하하!
에드워드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도 처음에는 샌디에이고에 돌아가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하고, 다양한 일들이 생기면서 점점 우선순위가 밀리다가, 이내 깜빡 잊고 말았다.
- 그래, 그럼 좀 더 천천히 생각해봐. 학교생활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너는 어리고 재능이 있으니,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네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대화를 나누던 에드워드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러고 보니,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는데 말이야.
“할 말이요?”
할로윈 파티와 에이전시가 용건이 아니었다는 소리인가?
- 랜디 쇼를 알아?
“유명한 토크 쇼잖아요.”
본 적은 없었지만, 알고는 있었다. 그만큼 유명하고 오래된 토크 쇼였다.
- 얼마 전에 랜디가 나한테 네가 토크 쇼에 나올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
도현은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저를요?”
황망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한 차례 웃은 에드워드가 말했다.
- 네 독립 영화가, 웬만한 상업 영화만큼이나 화제성을 띠고 성공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네게 소개해줄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랜디였어.
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꽤 괜찮은 흥행을 선보였다.
그것뿐이라면 화젯거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주인공이 동양의 어린아이고 최연소 수상자라는 점에서 토크 쇼의 주인공 감으로는 차고 넘쳤다.
도현이 에이전시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 업계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에드워드에게 가벼운 심정으로 물어본 것 같았다.
- 어때, 하고 싶니?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할게요.”
물론 인터뷰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 활동의 일환이었다.
토크 쇼는 좀 다른 얘기였다.
도현은 누군가 앞에 서서 유쾌한 얘기를 할 자신도 없었고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 랜디가 아쉬워하겠는걸. 일단, 네가 거절했다는 건 전달해줄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자로 연락처를 보낼게. 마음이 변하면 그쪽으로 연락해.
“알겠어요.”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케일리는 도현이 돌아온 것을 보고 누구와 통화했는지 궁금해했고, 도현은 숨길 것 없이 알려주었다.
학급 일을 통해서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는 게 썩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케일리는 아무나가 아니니까.’
도현이 방금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 케일리가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녀도 도현이 영화제에서 상을 탄 유망한 배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보니 새삼스레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정말 파티에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네, 학교에서 하는 파티가 더 즐거울 것 같아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두 사람은 다시 집 꾸미기에 집중했다. 케일리는 잠시 손을 멈추곤 끈을 묶는 도현을 쳐다보았다.
‘병원에서부터 남달랐지.’
케일리는 그때 도현이 가진 재능을 알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도현이 건강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는데….
이젠 건강해져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케일리는 대견함과 뭔지 모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시선을 느낀 도현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케일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쪽은 다 된 거니?”
“네, 끝났어요.”
케일리도 금방 하던 걸 마무리했다.
케일리와 도현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문에 해골 손이 튀어나와 있고, 한쪽에는 쓰러진 해골 몸체까지 있었다.
“완벽한데요?”
“나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어.”
케일리와 도현은 자축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벽 곳곳에 유령 모양으로 오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케일리가 도현을 보며 조금 쉬고 있으라고 말하며 주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케일리가 가져온 사과는 알 하나를 통째로 해골 모양으로 만든 사과였다.
케일리의 사과 깎기 실력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게 아닐까, 도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요즘 이렇게 깎아줬더니, 틈만 나면 해골 모양으로 깎아달라고 조르더라.”
“에릭이요?”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 * *
“옷이 다 만들어졌어!”
앨리슨이 무척이나 신나 했다.
“가서 갈아입고 올게! 옷을 입고 연기해보면 느낌이 색다를 거야.”
“그렇게 해요.”
잠시 후, 앨리슨은 옷을 갈아입고 왔다.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검은 메이드 복장이었는데, 군데군데 헤지고 찢어져 깔끔해 보이진 않았다.
“자, 이렇게 하면 되려나?”
앨리슨이 책장 앞에 서서 책 한 권을 빼냈다가, 도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그 반복되는 동작이 놀라울 정도로 일정했다.
간단한 연기였지만, 대충 할 수 없다며 앨리슨이 매일 연구하고 연습해 온 각도였다.
옆에서 줄리아가 잘한다며 잔뜩 칭찬을 해주었다. 이번 유령의 집 연기 팀에서 도현이 코치라면, 줄리아는 칭찬 담당이었다.
“그럼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해볼까?”
줄리아의 말에 아이들이 동의했다.
앨리스 역할, 즉 손님 역할을 맡은 건 줄리아였다.
“준비 끝났어요!”
유령의 집 안에 있는 아이 중 한 명이 외쳤다. 줄리아가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컴컴한 공간에 군데군데 횃불 같은 전등이 전부라, 상당히 으스스하고 음산해 보였다.
“앨리스!”
그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앳된 목소리였지만, 말투가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앨리스, 여기엔 왜 온 거예요?”
동그랗고 말간 검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현에 줄리아가 웃음을 참았다.
‘너무 귀여워!’
그러나 아이들이 진지하게 연기하고 있는데 웃을 순 없었다. 도현이 자연스럽게 줄리아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앨리스-줄리아-의 모험이 한바탕 이루어졌다.
잠시 후.
줄리아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선생님?”
도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줄리아가 손바닥으로 양 뺨을 착 잡았다.
손을 치운 볼은 상기되어 있었는데, 마찰로 인한 것인지 흥분으로 인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내용을 다 알고 있었는데도 재밌었어!”
줄리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멈춰버린 백작의 성’은 초등학생 1학년 아이부터 체험할 수 있는 유령의 집 테마파크인 만큼, 잔인하거나 공포스럽기보다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더욱 강했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들 정도였다.
소품이나 다른 아이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도현이지!’
도현은 ‘멈춰버린 백작의 성’의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
앨리스와 내내 함께하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었는데 도현의 연기 실력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몰입이 잘됐다.
‘나도 재밌는데, 아이들은 어떨까?’
줄리아가 기대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