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41)화 (142/582)

제141화. 그해, 가을, 겨울 (16)

우우우.

괴기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릴리가 몸을 흠칫 떨었다.

하퍼가 작게 속삭였다.

“저기 뭔가 있어!”

릴리와 메건은 하퍼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낡고 녹슨 판자에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군데군데 글자가 번져 있었지만, 알아보는 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릴리가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경고문]

이 성은 500년 전 불탄 백작성이 남아 있던 자리입니다. 이 성에 들어가고 싶다면, 당신은 이 주의사항을 기억해야 합니다.

1. 백작성의 방문자는 모두 ‘앨리스’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앨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됩니다.

2.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가 당신을 다시 성 밖으로 내보내 줄 때까지 목소리를 내어선 안 됩니다.

3. 초상화가 걸린 방에 간다면, 절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상화를 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경고를 어겼을 시 당신에게 오는 불이익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4. 만약 초상화가 걸린 방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당장 커튼 뒤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5. 그 무엇도 믿지 마십시오.

릴리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소름을 느꼈다. 메건과 하퍼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조용한 적막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만 더욱 커졌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밖은 환한 조명 아래서 할로윈 파티를 즐기는 중일 텐데, 그들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 들어가 볼까?”

메건이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주변에 있는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릴리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면 목소리를 내면 안 돼.”

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커튼을 젖힌 건, 그들 중에서 가장 용기 있는 메건이었다.

릴리와 하퍼가 그 뒤를 따라갔다.

릴리는 깜깜한 내부에 잠시 당황했다. 칠흑 같은 어둠 탓에, 옆에 있는 친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불빛이 들어왔다. 옆에서 손을 꼭 잡은 하퍼가 보이자 릴리는 조금 안심이 됐다.

“앨리스?”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릴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릴리는 숨을 들이켜는 것으로 비명을 참을 수 있었다.

“앨리스, 여기는 왜 왔어요?”

시야가 조금 밝아지자, 어둑한 성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 표정과 분위기가 너무 낯설어서 릴리는 소년의 정체를 한 박자 느리게 알아챘다.

고급스러운 정장에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긴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릴리와 몇 시간 전 즐겁게 떠든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소년 같지 않았다. 릴리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묘하게 귀족적이었고, 억양조차 고풍스러웠으며 움직임에는 소리가 없었다.

“저택을 구경하러 온 건가요?”

소년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앨리스, 기분이 안 좋나요? 대답이 없네요. 앨리스?”

“…….”

“앨리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가요?”

메건이 참지 못하고 대답을 하려는 걸, 하퍼가 간신히 입을 틀어막아 말렸다.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소년이 화가 난 듯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웃음 한 줌 없는 서늘한 시선에 순간 심장이 저릿할 정도였다.

꿀꺽.

누군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릴리가 뭔가 잘못된 게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지금이라도 대답할지 고민할 때였다.

소년이 갑자기 활짝 웃었다. 마치 말라붙은 꽃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 앨리스. 제가 실수했네요. 당신은 얼마 전에 목을 다쳐서 소리를 낼 수 없었죠. 미안해요.”

릴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그 말뜻을 뒤늦게 이해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경고문의 말이 맞았다. 누가 말을 걸더라도 대답하면 안 됐다.

앨리스는 말을 못 하니까.

릴리가 흐릿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퍼가 메건을 막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소년은 서늘했던 얼굴이 환상인 양, 눈이 녹고 나서 핀 보드라운 봄꽃처럼 웃으며 말했다.

“저택의 집사로서 손님의 방문을 거절할 수는 없죠. 하지만 오늘은 빨리 구경하고 나가도록 해요. 영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요.”

세 사람은 스스로 집사라고 칭한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끼이익-

쇠가 긁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릴리는 점점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진정했다.

이건 그냥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뿐이야. 그냥 소리일 뿐이라고.

끼익….

“그런데.”

조용히 걷던 소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앨리스도 알고 있나요? 요즘 영지에서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있어요. 어제도 시체 한 구가 풀숲에 버려져 있었다죠. 피가 모두 빠져 미라 같은 시체라니… 대체 누구의 소행일까요?”

소년은 딱히 그들의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이 계속해서 떠들었다.

“앨리스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영지민들이 백작님을 의심하고 있어요. 백작님이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이 분명하다고요. 몇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흉측한 괴물이 된 걸 숨기려는 거라고 말하면서요.”

여기까지 말한 소년이 멈칫하곤 한숨을 쉬었다. 그가 몸을 비스듬히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우리 백작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거든요. 앨리스, 앨리스도 그렇게 생각하죠?”

이번엔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끼이익-

소년이 조용해지자,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께름칙한 소리였다.

그때, 하퍼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리, 릴리… 저기…!”

하퍼의 목소리에 메건과 릴리가 모두 놀라 숨을 멈췄다. 하퍼도 목소리를 내곤 놀랐는지 바짝 얼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앞장서는 소년에게는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가 고개를 돌리자, 책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아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을 보니 하녀인 것 같았다.

릴리는 지금껏 나던 묘한 소리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리의 정체는, 책을 넣었다가 빼면서 책장이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릴리는 내심 안심했다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는 바짝 굳었다.

끼익, 끼익.

하녀는 방금 꺼냈던 책을 다시 도로 넣었다가 꺼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지 않는 앨리스에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본 소년이 웃었다.

“아, 베스가 청소를 하고 있네요. 그녀를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요.”

소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소년의 말을 따라 재빨리 하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끼익, 끼익. 그들이 멀어져도 소리가 잔상처럼 남아서 따라왔다.

“아무래도 영지 분위기가 너무 불안해요. 영지민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저택 구경은 빠르게 끝내고 돌아가도록 해요. 앨리스, 이리로 와요. 여기는 만찬을 즐기는 곳이에요.”

소년은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앨리스를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만찬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으스스했던 아까와 달리, 만찬장은 환한 샹들리에가 넓은 식탁 위에 있는 온갖 달콤한 것들을 비추고 있었다.

메건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메건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딸기 타르트도 있었기에, 탐을 내며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덥썩!

“!”

무언가 메건의 발목을 꽉 쥐었다. 메건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길게 늘어진 식탁보 밑에서 튀어나와 메건의 발목을 잡았던 손은 메건이 발버둥 치자 금세 사라졌다.

메건이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쨍그랑!

무언가 날카롭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환했던 만찬장의 불빛이 지지직거리며 꺼졌다가 켜지길 반복했다.

태연하게 울리는 오르골 소리가 이제는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메건이 공포심에 질려 숨도 못 쉬고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심지어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이런, 조나스는 원래 장난기가 많아요. 앨리스가 이해해 주세요.”

소년의 말이 끝나자 만찬장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환해진 만찬장은 처음 들어왔을 때랑 다름이 없었다.

소년이 다른 곳으로 가자며 다시 앨리스를 안내해 주었다. 메건은 기가 질려, 딸기 타르트에 대한 미련도 잊고 소년을 뒤따라갔다. 오르골 소리가 멀어졌다.

메건과 하퍼는 소년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릴리는 조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성은 이상했다. 그런데 소년은 아무것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을 안내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 걸까?

“여긴 역대 백작님들의 초상화를 전시한 공간이에요. 오직 백작위를 받은 이만이 걸릴 수 있죠”

소년이 안내한 곳은 텅 빈 방이었다. 붉은 커튼이 젖혀져 있었고, 가운데에 초상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다.

다만, 왼쪽 끝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던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릴리의 눈에 커튼 밑에 떨어진 액자가 들어왔다.

경고문의 말대로라면 초상화를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껏 경고문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 경고를 따르는 게 옳을 터였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이 릴리를 망설이게 했다.

쿵, 쿵!

무언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앨리스, 잠깐만 여기에 있어요. 아무래도 조나스가 또 장난을 치는 모양이에요. 제가 그를 달래고 올게요.”

소년이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방에 남아 침묵하다가 릴리의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릴리! 초상화를 보지 말라고 했잖아!”

하퍼의 목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던 릴리는 듣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을 말했다.

“하지만 경고문의 마지막 문구에서는 그 무엇도 믿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지금은 우리밖에 없는걸.”

릴리는 추리 소설이나 미스터리물을 자주 즐겨 보았는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갈림길이었다.

메건과 하퍼는 릴리의 말에 설득되었다. 사실, 그들도 엎어진 초상화가 궁금했다. 보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더욱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들은 문이 열리지 않는지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초상화를 들었다.

“허억!”

릴리가 헛숨을 들이켜며 초상화를 떨어트렸다. 툭! 액자가 떨어지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메건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똑똑.

누구지?

릴리가 굳은 채로 두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점점 커졌다.

똑똑똑.

똑똑똑똑똑!

이제는 숫제 문을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였다. 릴리의 동공이 수축했다.

철컥!

릴리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터벅, 터벅.

하퍼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메건이 검지로 입술을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퍼가 경고문을 떠올린 덕에, 그들은 누군가 방에 들어오기 전에 간신히 커튼 뒤에 숨을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백작님이 이걸 찾고 계시면 어떡하지? 백작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물건인데! 걸리면 혼날 거야.”

발소리가 이쪽에 가까워질 때면 세 사람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미지의 인물이 천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에 숨겨놓자!”

무언가 덜컥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을 나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얌전히 있었다. 몇 초 후, 용기를 낸 메건이 말했다.

“나, 나가 볼까?”

릴리와 하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을 조심스레 들춰 보니, 다행히도 방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방금 숨긴 걸 찾아야 해!”

“어디에 숨긴 줄 알고?”

“여기에 숨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어?”

릴리가 곧장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초상화 아래에 놓인 반지 하나가 보였다.

이전에는 없던 물건이었다.

만약, 그녀가 미리 초상화를 뒤집어 보지 못했다면 미지의 인물이 숨긴 물건이 반지라는 것을 모를 뻔했다.

그 무엇도 믿지 마십시오.

릴리는 마지막 경고문의 뜻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무엇도 믿으면 안 된다. 경고문까지도!

릴리의 옆에 와서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을 확인한 하퍼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초상화에….”

똑똑.

하퍼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단정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세 사람이 도로 커튼 뒤로 숨으려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

철컥.

문이 열렸다.

소년의 시선이 애매하게 멈춰 선 세 사람을 지나 바닥에 놓인 초상화에 닿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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