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42)화 (143/582)

제142화. 그해, 가을, 겨울 (17)

초상화는 소년이 방을 나가기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소년이 문을 열기 전, 릴리가 기지를 발휘해 재빨리 엎어놓은 덕이었다.

소년이 시선을 떼곤 싱긋 웃었다.

“조나스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만 다음 방으로 가요.”

릴리는 긴장으로 땀이 났던 손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건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백, 작, 이, 야.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메건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혼란스러운 메건을 뒤로한 채, 릴리는 생각에 잠겼다.

백작은 거짓말을 했다.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하며, 정말 집사처럼 성 내부를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거짓말한 게 그것뿐일까?

릴리는 처음에 들었던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다. 불타 버린 성, 피가 모두 빠진 시체, 정체를 숨긴 백작….

딱 한 가지, 곧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드라큘라 백작.

혹시, 소년의 정체가 드라큘라 백작인 걸까?

- 영지민들이 백작님을 의심하고 있어요. 백작님이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이 분명하다고요.

그다음에는 백작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면서 웃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이 말을 왜 굳이 흘린 거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백작님, 백작님!”

릴리는 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방 너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릴리는 반사적으로 소년을 보았다. 릴리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소년의 얼굴은 묘하게 초조해 보였다.

“백작님 방에 가기 전에, 백작님께 허락받고 와야겠어요. 미안하지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줄래요? 금방 돌아올게요, 앨리스.”

그렇게 말한 소년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우아했으나, 릴리는 그가 다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방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한쪽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방 안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왔다.

진짜 집사라면 이렇게 입을 것같이 차려입은 남성은, 단정한 옷매무새와 달리 군데군데 붉은 물이 튀어 있었다.

“불, 불이 났어! 외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는데, 누구의 소행이지? 백작님, 백작님을 찾아야 해! 너는… 앨리스? 왜 여기 있는 거니? 아니, 상관없다. 백작님을 보았어?”

갑자기 불이라니?

황당했지만,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릴리만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이, 불타 버린 백작의 성이라던 경고 문구를.

남자가 탄식했다.

“이런, 너는 내가 목소릴 없앴지! 괜한 시간을 잡아먹었군! 백작님, 어디 계십니까! 백작님!”

뭐?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세 아이가 시선을 교환했다.

“너희도 들었지?”

메건의 물음에 릴리와 하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규칙과 앨리스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설정이 단순히 이야기 진행을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하나씩 드러나는 사실과 형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이야기에 릴리의 심장이 뛰었다.

“저 방, 저 방에 들어가 보자!”

릴리가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자 메건과 하퍼도 동의했다. 남자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온 탓에 환히 보이는 방은 한눈에 봐도 수상했다.

“저게 뭐지…?”

방에 들어선 메건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에는 검은 관들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들이 정렬해 있었다. 아까 남자의 옷에 묻어 있던 붉은 얼룩도 저 액체인 것 같았다.

“실험실인가…? 그런데 관은 왜 있는 거야?”

하퍼가 무섭다고 말하며 양팔을 감쌌다. 릴리도 으스스한 분위기에 조금 위축되었지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적극적으로 방을 돌아다니던 릴리는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구가 진척이 보인다. 곧 있으면 백작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재료를 좀 더 모아야 한다.

릴리의 눈이 커졌다.

빨간 액체가 든 유리병, 바닥에 놓인 관, 남자의 옷에 묻어 있던 붉은 얼룩까지!

이번에는 소년의 말이 맞았다. 백작은 사람의 피를 마시는 괴물이 아니었다. 영지민들은, 백작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희생된 거였으니까!

“앨리스?”

“!”

“앨리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찾았잖아요.”

소년이 릴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릴리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릴리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양피지에 써진 내용이 궁금한가요? 앨리스는 글자를 모르니, 제가 읽어줄게요.”

양피지를 본 소년이 싱긋 웃었다.

“그냥 평범한 일지네요. 날씨가 좋다고 쓰여 있어요. 이제 그만 가요. 이곳은…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어요.”

잠깐 소년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았지만, 너무 찰나라서 릴리는 잘못 본 것이라 여겼다.

릴리는 소년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추리 소설을 읽었던 경험이 무척이나 유용하게 작용했다.

하나, 앨리스는 글자를 모른다.

둘, 성 내의 인물이 앨리스의 목소리를 없앴다.

그렇다면….

‘앨리스는 알면 안 되는 비밀을 안 거야!’

그래서 목소리를 없앤 것이다. 글을 모르는 앨리스는 말을 할 수 없다면 비밀을 알릴 수 없으니까!

이 이상하고 기묘한 백작성의 비밀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소년을 따라 좀 전에 왔던 장소로 다시 도착했다.

백작의 방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나무 합판으로 된 문들과 다르게 튼튼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붉은색 휘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철컥.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소년이 문고리를 잡은 채로 몸을 비스듬히 돌려 그들을 보았다. 우아하게 문을 여는 모양새가, 스스로 소개했던 것처럼 어느 유서 깊은 가문의 집사 같았다.

“백작님께 허락을 먼저 구하려고 했는데, 주무시고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곧 일어나실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전 앨리스를 백작님께 소개해주고 싶거든요.”

그들이 이미 백작의 정체를 눈치챘음을 모르는 소년이 태연하게 말했다.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고,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침대에는 누군가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백작은 여기에 있는데,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지?’

릴리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이 말했다.

“저는 차를 타 올 테니, 앨리스가 백작님을 좀 깨워 주시겠어요? 예민한 성정이 아니셔서 괜찮을 거예요.”

그리 말한 소년이 정말 차를 가지러 가듯, 한쪽에 놓인 트레이로 다가갔다.

릴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메건이 침대로 다가갔다. 릴리와 하퍼도 마지못해 그 뒤를 따랐다.

“헉!”

떨리는 손으로 두꺼운 이불을 걷어낸 메건은, 곧바로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릴리와 하퍼도 침대를 보곤 경악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 사람이 아닌 사람 크기만 한 짚 인형이었다.

하퍼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려던 때였다.

“앨리스, 왜 그래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소년이 그들의 뒤에서 매끄럽게 웃고 있었다. 소년이 여유롭게 짚 인형에 한번 시선을 주고는 천천히 입꼬릴 들어 올렸다.

“너, 앨리스가 아니지?”

쿵!

릴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하하하!”

소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메건과 하퍼가 굳어 있는데, 소년이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앨리스는 이 성에 자주 드나들었어. 그녀는 성의 비밀 통로까지 전부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성 안내를 해줄 필요가 어디 있겠어?”

차가운 웃음소리에 릴리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앨리스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구나!”

“그래.”

릴리의 말에 메건과 하퍼가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이 이번에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중요해? 백작성에 들어온 이상, 넌 나갈 수 없어. 백작성은 손님이 온 지 너무 오래됐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나와 함께하자. 너도 여기에서 시간이 멈춘 채로 함께하는 거야. 영원히.”

세 사람은 이 순간, 내심 친근하게 여겼던 소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웃고 있지만, 생기가 빠진 듯 창백한 얼굴이 산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흐으으-

음산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닫혔던 문이 흔들렸다. 누군가 들어오려고 문고리를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무, 무서워! 그만해!”

하퍼는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메건도 용기를 잃고 겁에 질려 하퍼를 꼭 붙잡았다.

릴리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가운데, 줄리아의 미소가 생각났다.

- 그럼 해피 엔딩을 맞길 바랄게.

그 말이 지금 떠오른 건 왜일까?

확실한 건, 이 상태로 간다면 해피 엔딩이 나올 리가 없다는 거였다. 릴리가 손을 꽉 쥐다가, 무언가 단단하고 둥근 것을 느꼈다.

반지!

“자, 잠깐!”

릴리가 손을 쭉 내밀고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보여주었다.

“반지! 이 반지를 줄 테니 우리를 내보내 줘!”

“…그 반지를 어디서 찾았지?”

잠시 당황으로 치떠졌던 소년의 눈이 순식간에 눈이 사납게 변했다.

“아니, 상관없어! 그 반지는 백작님이 무척이나 아끼는 거야. 돌려줘! 돌려주지 않는다면, 백작님께 네 피를 뽑아서 마셔달라고 하겠어!”

“거짓말!”

메건이 외쳤다.

“백작은 너잖아!”

메건의 말에 백작이 놀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험악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알았지? 그건, 그건 성의 식솔만 아는 비밀이었는데….”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래. 내가 백작이 맞아. 그러니까 돌려줘. 그건 내게 아주 소중한 물건이야. 돌려준다면, 너를 이 성에서 내보내 줄게.”

그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차갑다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였다. 그사이 방금까지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문도 잠잠해졌다.

겁이 많은 하퍼가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믿어?”

“내 가문에 대고 맹세할게. 난 백작이야. 한번 약속한 일을 어겨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아.”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간절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표정과 목소리가 무척이나 진실되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릴리가 메건과 하퍼를 보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소년에게 반지를 건네주었다.

반지를 돌려받은 백작이 슬픈 낯으로 반지를 보았다. 이어 돌아온 반응에 릴리는 안심했다.

“고마워. 잃어버려서 오랫동안 찾지 못했는데….”

백작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진 않을 것 같았다.

옳은 답을 찾은 것이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릴리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말끝을 흐리던 백작이 이어 말했다.

“이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반지야. 전대 백작님이셨지.”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

메건의 질문에 놀란 하퍼가 눈치를 주었지만, 백작은 개의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대답해 주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어. 우리 백작 가문은 대대로 건강이 좋지 못했거든. 그래서 내가 어린 나이에 백작이 되었지.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 영지민들에게 믿음을 주기엔 부족했어. 그래서 그 사실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숨기기로 한 거고.”

릴리는 몇 년 동안 백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릴리가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면 앨리스는 누구야? 왜 목소리를 잃은 거고?”

“앨리스는….”

백작이 얼굴을 찡그리다가, 옅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앨리스는 백작령의 영지민이자 내 친구야. 앨리스가 목소리를 잃은 건….”

주저하던 백작이 반지를 손에 끼웠다. 섬뜩하던 까만 눈동자는 이제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지를 찾아준 은인이니 알려줄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백작이 되었지만, 아버지보다 몸이 약했어. 나는 갈수록 약해졌고, 집사는 내 건강을 무척이나 염려했어. 저택에서 나를 찾는 남자가 있었지? 그가 우리 저택의 집사야. 그는… 그는 백작 가문에 충성심이 너무 깊은 나머지….”

주저하던 백작이 힘겹게 문장을 토해냈다.

“…잘못된 선택을 했어.”

“그럼….”

“그래. 사람의 피를 마시는 백작이 틀린 말도 아니지. 그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영지민들을 희생한 거니까.”

백작은 차갑게 조소했지만, 그 웃음은 그 자신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희생되는 영지민 수는 늘어만 갔지. 저택의 모든 이들이 집사의 행동을 눈감았어. 오직 나만… 오직 나만 모르고 있었어!”

백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그 웃음이 울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였던 탓이었다.

백작은 천천히,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사의 보호 아래 성에서만 지내는 백작에게는 작은 즐거움이 있었다. 바로, 앨리스와 비밀 통로를 통해 영지로 나가 노는 것이었다.

그날도 앨리스와 놀러 나간 날이었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하늘이 어두워졌고, 두 사람은 비밀 통로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집사가 영지민을 납치해 가는 모습을. 앨리스는 비명을 질렀고, 두 사람은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집사는 비밀을 목격한 앨리스를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백작이 부탁한 끝에, 죽이지 않고 목소리를 빼앗았다.

그날, 백작은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매일이 지옥이었다. 밤만 되면 비명이 들렸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고, 원망과 애원의 목소리가 목을 졸랐다.

그들의 절망은 한순간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백작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담담했지만, 그 눈동자에서 공포, 절망, 배신감, 슬픔, 죄책감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 때문에 참혹하다기보단, 그저 슬프게 느껴졌다. 감정에 동화된 하퍼가 눈물을 글썽였다.

“집사를 말려 보았지만, 그는 이미 너무 멀리 가서 멈출 수가 없었어.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나를 위해 그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백작이 잠시 진정하듯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완전히 차분해진 낯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더라고. 집사의 죄악과 성과 나 자신까지. 모두 불에 타버리면 되는 거야. 아무도 모르도록. 이 죄까지 모두 타버리도록.”

릴리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떠졌다. 메건과 하퍼도 마찬가지였다

이 성은 500년 전 불탄 백작성이 남아 있던 자리입니다.

비극을 막을 수 없던 어린 백작은, 성과 함께 불타기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계획을 알린 건 앨리스뿐이었어. 앨리스는 내 친구였고… 나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으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앨리스는 내가 성을 불태운 날, 나를 말리기 위해서 찾아왔었지. 하지만 난 그녀를 돌려보냈어. 이 성의 방문자가 앨리스인 건, 그날 성을 방문했던 사람이 그녀라서야. 이 성은 500년 전 불탔던 그날에 멈춰 있거든.”

그 후로 500년 동안 백작은 이 결정을 후회했다. 이 넓은 성에서 그의 친구는 없었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말한 백작이 트레이로 걸어갔다. 고급스러운 은쟁반에 담긴 구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나가고 나면 이 성은 또다시 잊히고, 그는 같은 하루를 반복할 테니.

백작이 쟁반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구슬끼리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이 구슬을 하나씩 입에 물어. 그리고 문을 연다면, 이 멈춰버린 성을 나갈 수 있을 거야.”

세 사람이 구슬을 집었다.

릴리가 구슬을 입에 넣기 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게 유령의 집이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미 릴리의 앞에 있는 소년은 500년 전 성과 함께 탄 백작이었다.

“너는? 너는 나가지 않아?”

릴리의 물음에 놀란 듯 백작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따뜻하면서도 슬픈 미소였다.

문득, 백작이 살아 있었을 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여기서 성의 식구들과 함께 있을 거야. 내 집은 여기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어조였다. 릴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어서 가라는 백작의 말에 구슬을 입에 넣었다.

단맛이 퍼졌다.

철컥.

메건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 오후의 환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어둑한 곳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시야가 적응이 덜 되어 릴리는 몇 번 눈을 깜빡여야 했다.

릴리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이미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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