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그해, 가을, 겨울 (18)
하퍼가 백작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터트리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장 선생님이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여기, 이거 받으렴. 해피 엔딩을 맞은 사람들에게 주는 상품이야. 그러고 보니, 하드 모드에서 한 번에 해피 엔딩을 맞은 건 너희가 첫 번째구나!”
예쁜 유리병에 백작이 주었던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메건이 사탕을 받아 들며 놀란 눈치로 물었다.
“정말 저희가 첫 번째예요?”
“허허, 그렇단다.”
교장 선생님은 유령의 집 안에서 재정비하며 잠시 쉬고 있을 도현을 떠올리며 웃었다.
처음 도현이 생각했던 스토리는 이보다 더 무서웠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복잡했다.
트릭이 너무 어렵지 않니?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것 같구나.
그런가요?
도현은 그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딱 봐도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면서, 아무런 반박이나 의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좀 더 쉽게 만든 시나리오를 가져왔다.
그걸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난도를 대폭 낮춘 게, 지금의 ‘멈춰버린 백작의 성’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모든 단서를 이해하고 풀기엔 어려웠는지, 하드 모드에서는 도통 해피 엔딩이 나오질 않았다.
이지 모드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줄리아의 통솔만 잘 따르면 쉽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어디 1, 2학년 아이들이 선생님이 통솔한다고 될 나이인가.
들어가자마자 목소릴 내어서 아웃, 비명을 질러서 아웃, 하녀한테 말을 걸어서 아웃, 잘 안 숨어서 아웃 등등….
아이들은 다채롭게 탈락했고, 그 덕에 ‘멈춰버린 백작의 성’ 체험 평균 시간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짧아졌다. 도중에 탈락해 버리니, 체험이 일찍 끝나 버린 것이다.
사실 그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덕에 많은 아이들이 체험해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하드 모드 통과자가 한 팀뿐이란 건 좀 애석한 일이었다.
내심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던 교장 선생님은 세 아이를 보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세 아이가 유리병을 든 채 강당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자, 단번에 해피 엔딩을 맞았다는 이야길 들은 아이들이 세 사람에게로 몰렸다.
“어떻게 한 거야? 난 모르겠던데!”
“난 만찬장에 있는 쿠키 먹었더니 바로 떨어졌어!”
“어? 정말?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응. 그거 먹으면 영원히 백작성에서 살아야 한대.”
메건은 딸기 타르트를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난 반지까지 다 챙겼는데 탈락했어! 왜지?”
현재 할로윈 파티에 참가한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유령의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령의 집은 거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어깨가 으쓱 올라간 채로, 신이 나서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답해주었다.
막 트릭을 설명해주던 릴리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앤은 어디 있었던 거지?’
“아! 힘들어!”
앨리슨이 소리쳤다.
“이제 곧 끝나니, 조금만 참아요.”
도현이 앨리슨의 손에 젤리 하나를 쥐여 주며 말했다.
백작과 하녀, 조나스, 그리고 집사는 지금 만찬장에 한데 모여 앉아 간식거리를 먹는 중이었다. 유령의 집을 체험했던 아이들이 본다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광경이었다.
그들은 오르골을 틀어 놓고 만찬을 즐기며 평온하게 수다를 떨었다.
진짜 유령의 집 테마파크라면 몰라도, 이건 아이들이 참여한 이벤트였다.
아이들을 혹사하지 않기 위해 틈틈이 휴식 시간도 많이 주었고, 실제 운영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처럼 휴식 시간마다 만찬장에 모여서 간식을 하나씩 까먹었다. 만약, 두 번째로 체험하는 사람이 눈썰미가 좋다면, 만찬장의 간식이 줄어들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들 쉬고 있었구나.”
누군가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줄리아였다.
“이제 세 팀 남았어.”
“와! 신난다!”
앨리슨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책을 꺼내는 단순한 행위라도 계속해서 반복하니 팔이 저리고 벌을 받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많죠?”
“음, 아무래도 그렇지.”
줄리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도 마음 쓰지 마렴.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니.”
유령의 집을 하루 종일 운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여러 팀을 만들어서 운영해 보려고도 했으나, 도현의 백작 연기를 본 아이들이 아무도 백작 역할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갔다.
줄리아는 난감했지만, 아이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한테 백작 역을 맡으라고 해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그나마, 난도가 높아서 체험이 일찍 끝나 예상보다 더 많은 팀이 체험했다는 게 다행인 부분이었다.
‘아니, 이게 다행인 게 맞나?’
줄리아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어? 음료수라도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도현이 거절했다. 이미 줄리아가 두 번이나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주 조금 더 쉬었고, 곧 다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렇게 ‘멈춰버린 백작의 성’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끝났네.’
도현이 기지개하듯이 몸을 쭉 폈다. 아, 아 소리를 내며 목소리도 점검했다. 다행히 목이 쉬진 않았다.
‘살면서 가장 말을 많이 한 날 아닐까.’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유령의 집은 그에게 상당히 색다른 경험이 되어주었다. 도현은 이처럼 매번 다른 사람을 향해 같은 연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건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연습했던 백작 그대로 연기했다. 그러나 그것이 두 자리를 넘어가자, 조금 늘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한 번은 차갑고 오만한 성정으로, 한 번은 착하고 상냥한 성정으로, 한 번은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정으로….
그렇게 매번 바꿔서 연기하다 보니 몹시 재미있었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직 해볼 게 더 남았는데.’
그런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수고했어.”
집사 역할을 맡았던 선생님이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아쉬움과 후련함을 담아 떠들었다.
철컥.
유령의 집을 나오니, 강당의 불빛이 무척이나 밝게 느껴졌다. 그건 앨리슨도 마찬가지인지 ‘윽, 빛이… 빛이 너무 밝아! 타버리겠어!’라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도현이 몇 걸음 더 걸어가서 가면과 망토를 챙기려던 때였다.
“백작이다!”
“백작님이야!”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눈을 깜빡이며 그쪽을 보았다.
밝기에 익숙해진 시야로, 강당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당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반응이 가지각색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무섭다며 어른들 뒤로 숨었고, 몇몇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고, 많은 아이들이 관심과 호기심을 내보였다.
도현은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가면을 썼다. 가면을 쓰니 그나마 시선이 덜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줄리엣’과 ‘백작님’이라는 단어가 간간이 들렸다. 도현은 진한 데자뷔를 느꼈다.
‘왜 매번 이렇게 되는 걸까?’
도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잠시 후.
가면과 망토까지 모두 쓴 도현은 백작성의 주인에서 <오페라의 유령>의 에릭으로 변했다.
물론 한 명밖에 못 알아본 분장이지만, 이렇게 하고 나니 진짜 유령의 집이 끝난 기분이었다.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줄리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이 기다리려는데 의도치 않게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안 돼요?”
“응, 이미 끝났어.”
“흐윽….”
아이가 울먹였다. 많이 억울하고 슬픈 눈치였다. 줄리아가 곤란한 눈으로 아이를 보다가 도현을 발견했다.
“아, 도현아! 고생 많았어!”
“네. 그런데….”
도현이 멈칫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건가 싶어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줄리아는 이미 도현의 의문을 눈치챈 기색이었다. 줄리아가 옅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늦게 와서 유령의 집을 체험하지 못했나 봐.”
도현이 시선을 돌려 작은 아이를 보았다.
‘유령의 집을 못 해서….’
그런 이유로 이렇게나 슬퍼하는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잘 달랠 테니까, 가서 친구들이랑 놀렴. 오늘 고생 많이 했잖아.”
줄리아가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혹시 퍼레이드 날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응? 퍼레이드 날?”
델마 아카데미의 할로윈 행사는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났다. 할로윈 일주일 전에 하는 파티와 할로윈 당일에 하는 퍼레이드였다.
“네, 그날 일정이 괜찮으면, 유령의 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한테 예약받아서 잠깐 운영해도 좋을 것 같아서요.”
줄리아의 눈이 커졌다.
줄리아나 여타 다른 선생님들도, 체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그렇게 하면 괜찮겠는데?’
줄리아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유령의 집도 공들여 만들었는데, 오늘 하루만 쓰면 좀 아깝기도 하고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보겠니? 교장 선생님께 한번 말씀드려 볼게.”
줄리아가 허락을 받으러 자리를 옮겼지만, 도현은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즐거운 걸 좋아하시는 분이었으니까.
도현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줄리아를 기다렸다.
다시 돌아온 줄리아는.
“교장 선생님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더구나! 사탕 병이 많이 남았다면서 말이야! 앨리슨과 조나스에게도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말했어.”
그리 말하며 도현의 생각을 칭찬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울먹거리던 아이가 줄리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할 수 있어요?”
“응! 지금은 아니지만, 다음 주에 할 수 있어!”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현은 울음을 그친 아이를 옅은 미소를 띠며 바라보았다.
* * *
할로윈 파티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할로윈 파티 날 이후로, 도현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부탁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백작의 흉내를 내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유령의 집을 체험한 아이들이 백작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것에 도현은 흔쾌히 보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고, 금세 할로윈 당일이 되었다.
그날 도현은 일주일 동안 연구했던 백작 연기를 아낌없이 선보였다. 모두가 만족한 할로윈이었다.
유령의 집을 끝낸 후, 아이들은 선생님의 통솔을 따라 델마 거리를 걸어 다녔다. 다양한 분장을 한 아이들이 열을 맞춰 걸어가는 건 상당히 귀여운 광경이었다.
그날 저녁.
“띵-동! 데리러 왔어!”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이었다.
도현은 거실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문을 열었다.
백설 공주에 나오는 왕비와 좀비로 분장한 니콜라스, 그리고 아마 난쟁이로 분장한 것 같은 나르샤가 도현을 반겼다.
도현의 뒤로 서혜나가 보이자 진이 눈을 반짝 빛냈다.
“Trick or treat!”
니콜라스도 냉큼 호박 바구니를 내밀었다. 서혜나가 귀엽다는 듯이 웃더니 사탕을 한 움큼 쏟아부어 주었다. 니콜라스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저도요?”
나르샤가 어색해하면서도 서혜나가 내민 사탕을 받아 들었다. 내심 기쁜 기색이었다.
“우리 꼬마 유령님. 조심해서 다녀야 해?”
“네, 그럴게요.”
“좋아, 잘 다녀와.”
서혜나가 도현의 손에 호박 바구니를 쥐여 주며 말했다. 도현은 서혜나에게 인사한 후 집을 나왔다.
“자! 이제 사탕을 수금하러 가자!”
진이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그랬다.
지금 그들은, 집집마다 사탕을 수금하러 다닐 예정이었다.
처음 이 계획을 진이 말했을 때 도현은 곤란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서 사탕을 달라고 하다니.
도현에겐 너무나 어렵고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과 니콜라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애원과 설득, 부탁과 협박 끝에 도현은 백기를 들었다.
도현은 애써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나마 분장에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야.’
부끄러움에 붉어진 피부는 가면이 가려줄 터였다.
도현은 진과 니콜라스, 나르샤를 따라 옆집으로 향했다.
“Trick or treat!”
“…Trick or treat.”
명랑하게 외치는 둘 옆에서 도현이 소심하게 말했다. 집주인이 하하, 웃으며 유령 모양 초콜릿을 호박 바구니에 담아주었다.
그러면 재밌게도 진은 그들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다. 독사과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독사과를 받은 어른들은 무척이나 기뻐해서, 니콜라스가 취향 참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할로윈 저녁에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도현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한 이웃 주민은 ‘Trick or treat’을 외치자 짓궂게 물었다.
“어떤 장난을 칠 건데?”
그에 진과 니콜라스가 마땅한 장난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매는데, 도현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노래 잘 부르세요?”
“뭐?”
“제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노래를 부르도록 만들 거예요.”
이들은 모르겠지만, 형의 기억을 가진 도현은 음악에 대한 기준치가 매우, 몹시 높았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던 집주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정말 무섭구나! 나는 크리스틴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 음치거든. 자, 여기. 사탕을 주마.”
그들은 그 집에서 사탕을 한가득 받았다. 호박 바구니가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성공적인 수금을 끝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서혜나는 거실에서 도현을 기다리다가, 호박 바구니에 담다 못해 넘쳐서 옷으로 받치고 온 도현을 보곤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도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자 달려와서 호박 바구니를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난롯불을 피운 채로 거실에 앉아, 도현이 벌어 온 간식거리를 테이블에 쏟아부었다. 둥근 사탕들이 불빛을 받아 붉게 일렁였다.
두 사람은 간식을 까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입 안에서 굴러가는 사탕이 무척이나 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