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44)화 (145/582)

제144화. 그해, 가을, 겨울 (19)

델마 아카데미의 11월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변한 것은 그다지 없었다.

도현의 별명에 ‘백작님’이라는 호칭이 하나 추가되었다는 것과 아일라가 다시 아이들과 친해졌다는 것, 그리고 다비드와 니콜라스가 싸우는 횟수가 줄었다는 것 정도가 소소한 변화였다.

다만, 그건 도현의 주변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퍽!

“아.”

도현이 공에 맞은 어깨를 잡았다. 멀리서 다비드가 깜짝 놀라더니, 이내 다급히 달려왔다.

“야,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러길래 왜 바보같이 멍 때리고 있어?”

“네가 쳐놓고 무슨 소리야? 양심 있냐?”

음, 다비드와 니콜라스의 다툼이 줄었다는 건 정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현이 두 사람을 말렸다. 사실 다비드의 말이 맞았다. 축구를 하는 도중에 도현이 갑자기 넋을 놓아버린 것이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해서 그래. 싸우지 마.”

“무슨 소리야!”

니콜라스가 곧장 반박했다.

“넌 다른 생각 안 했어도 못 피했을 거야! 네가 몸치인 거 모르는 애가 어딨어!”

도와주는 걸까, 욕을 하는 걸까?

도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보았다. 니콜라스는 당당하게 허리를 쭉 폈다.

도현은 간신히 두 사람이 다시 싸우려는 것을 말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최근, 도현은 넋을 놓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도현이 부쩍 선선해진 날씨에 겉옷을 추켜올렸다. 서늘함이 가시는 착각이 들었다.

겨울이 다가왔다.

* * *

리암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리암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서혜나는 반색했다. 근래에 도현이 친구들을 만나 노는 횟수가 부쩍 줄었던 탓이었다.

리암이 도현의 집으로 데리러 왔고, 두 사람은 같이 식사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새로운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얘기. 제작사와 이미 계약까지 맺었다는 말에 도현은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에이전시에 가입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도현이 에드워드에게 제안받은 곳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대형 에이전시였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H’까지 닿았다.

“H가 누구냐고 연락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그리고… 같이 촬영했던 사람 중에서 누군가 네가 H라는 걸 말한 것 같아.”

그가 도현을 찾은 건 아마 이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리암은 몹시 미안한 기색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놀라긴 했으나, 이내 의연히 받아들였다.

애초에 모든 이들이 끝까지 함구해 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표정을 보니 다 들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니 안심해라.”

“아니라고요?”

“그래. 내가 H는 네가 아니라고 인터뷰했거든. 그리고 레이먼 씨도 말을 얹어주었어. 감독인 나와 H와 같이 녹음한 레이먼 씨가 아니라고 하니까 긴가민가하더니 결국엔 믿더라고. 솔직히 말해서, 최연소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우가 클래식계에서 화제를 몰고 온 H와 동일인이라는 걸 믿는 게 더 이상하지. 애초에 그 사실을 완전히 믿고 연락한 것 같지도 않더라고.”

아마 가십이나 정확성 없는 가벼운 기삿거리 정도로 생각한 게 분명했다.

“운이 좋았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왈트가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아직도 H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개봉한 후, H에 관한 기사가 꽤 많이 나왔다. 사람들은 비밀에 열광하는 법이었다.

아빠한테 들은 바로는 한국에서도 TV 프로에서 소개했을 만큼 큰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H의 정체가 밝혀지지도 않고 그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자 점차 잠잠해졌다.

이대로 죽 조용히 있는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완전히 잊힐 수 있을 것이다.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암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너, 어디 아프냐?”

“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야? 아프면 말을 하지 미련하게!”

리암이 쯧, 혀를 찼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도현이 부정했지만 리암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도현과 촬영을 하면서 리암이 깨달을 게 있다면, 도현의 ‘괜찮다’라는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이었다.

리암에 의해 강제적으로 집에 돌아온 도현은 방 침대에 풀썩 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티가 나나.’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있는데, 어째 주변인들이 다 알아채는 것 같았다.

‘리암이 알아챘을 정도니….’

리암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둔한 편인 건 도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리암이 알았다는 건,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도현은 이 상황이 몹시 거북하게 느껴졌다.

생각에 매몰되기 전에 벌떡 일어난 도현이 바이올린을 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1층에 있던 서혜나는 근래 하루도 빠짐없이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걱정스러운 낯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쳐다보았다.

* * *

‘얘는 뭐가 문제일까?’

니콜라스가 심오한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자란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 탓에 아무래도 창백한 뺨이 더 희어 보였다.

니콜라스는 초록 바다를 담은 눈으로 도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엄마가 기르는 화초도 얘보다는 튼튼할 것 같았다. 참고로 그 화초는 니콜라스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삼 주 만에 시들어 버렸다.

아무튼.

‘왜 맨날 눅눅해지지?’

처음 만날 때부터 신기한 애였다.

아마 그때 도현을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콜라스와 똑같이 생각했을 터였다. 마냥 순해 보이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음울함과 초연함을 주위에 두르고 있었다.

딱 봐도 다른 애들이랑 친해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게 재수 없어 보여서 싫었다.

어쩌다 보니 친해졌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보니 생각보다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조금 차분하고 가끔 이상한 걸 빼면 나름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눈만 떼면 눅눅해져 버린다는 점이었다.

연기 연습할 때도 그랬고, 촬영할 때도 그랬고, 촬영이 끝나고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처음엔 그저 조금 넋을 놓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더니, 최근엔 선생님이 수업 중에 불러도 못 들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자.”

“…이건 갑자기 왜?”

“먹고 좀 본받으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도현을 응시하던 니콜라스가 뜬금없이 내민 건, 다름 아닌 도리토스였다.

도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도리토스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코를 훔쳤다.

도현은 상황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정성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도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진과 니콜라스는 해리 선생님에게서 도현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 *

니콜라스에게 도리토스를 받은 날 밤, 도현은 심하게 열이 났다.

도현이 잘 자고 있나 보러 온 서혜나는 열이 펄펄 끓는 도현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곧바로 911에 전화를 걸었다.

가까운 병원에 이송된 도현은 몸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갑작스레 아플 때가 있다는 소리에도 서혜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혹시 병이 재발한 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공포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링거를 한 차례 맞고 나자 열이 떨어졌다. 정신을 차린 도현은 침대맡에서 울고 있는 서혜나를 보곤 크게 당황했다.

도현의 몸이 조금 회복된 후, 서혜나는 도현의 병원을 옮겼다.

도현이 오랫동안 다녔던 위더스 센터로 향했다. 벤자민이 직접 와서 도현의 상태를 진단하고 치료했다.

도현의 컨디션이 좀 더 좋아진 후에는 갖가지 정밀 검사를 실시했다.

“병의 증상과는 다릅니다. 물론 도현의 병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만큼 속단할 수 없지만…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땐 재발보다는 일반적인 몸살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입원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서혜나는 안심했다. 재발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서혜나를 보던 벤자민이 어렵사리 뒷말을 이었다.

서혜나는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스, 스트레스성 증상이라고요?”

“네. 최근에 평소랑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나요?”

많았다.

종종 넋이 나간 듯이 구는 거나, 놀러 나가지 않는 것, 하루 종일 바이올린만 켜는 것까지.

걱정스러워서 아무리 물어도, 그저 바이올린에 흥미가 붙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서혜나의 말을 들은 벤자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도현은 다음 날 또다시 앓았다.

이번엔 전처럼 링거를 맞아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가끔가다 정신이 들 때면 눈물을 흘리거나, 헛것을 보는 것처럼 홀로 중얼거렸다.

가끔가다 흐릿하게 눈을 뜰 때면 누군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감각이 느껴졌다.

건들면 깨질세라, 너무 부드럽게 스치는 손길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날에는 그 손이 조금 더 투박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서, 도현은 꿈결에 그걸 잘못 들은 거라고 여겼다.

아빠는 한국에 있을 테니까.

아주 적막한 어느 밤에는, 머릿속에 잔잔하고 온화한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이렇게나 그리워하고 있구나. 불쌍한 것.】

덩어리 님?

반사적으로 하얀빛 덩어리를 떠올리는데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수마 위로 올라오려던 정신이 다시 깊게 가라앉았다.

따뜻한 물이나, 부드러운 구름에 감싸인 것처럼 포근한 감각이었다.

【영혼이 안정되지 않아서 그렇단다. 좀 더 쉬렴.】

그 후로 다시 잠들어서, 도현은 꿈을 꾼 것인지 정말로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주일이 흘러갔다.

그사이 델마 아카데미가 겨울 방학을 맞이하고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푸른 기가 감도는 새벽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도현은, 몸을 감싼 하얀 이불과 그와 같은 색의 환자복이 너무 익숙해서 그동안 꿈을 꾼 건가 싶었다.

사실 형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모두 꿈이고 난….

도현의 생각이 멈춘 건, 옆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웅크려 자는 서혜나를 발견한 후였다.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도현이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열자 액정의 불빛이 어스름하게 소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12월 20일.

화면 상단에 써진 날짜를 도현은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형의 기일이 한참 지났음을.

툭.

이불보가 젖어 들었다.

옆에서 잠든 서혜나가 깨진 않을까 숨소리마저 죽인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긴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을 때까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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