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그해, 가을, 겨울 (20)
눈가에 내리쬐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약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커튼 내려줄게요.
언뜻 그런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잠시 후, 눈꺼풀 위를 배회하던 빛이 사라지고 그늘이 졌다.
그러나 서혜나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작은 인형이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서혜나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 일어나셨어요?”
차분히 인사를 건네던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락!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서혜나가 도현을 세게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엄마?”
도현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날이 갈수록 모자 사이에 스킨십이 늘고 있기는 했지만, 손을 잡거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정도였다. 둘 다 서로에게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이렇게 친밀한 포옹은 처음이었다.
도현의 손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데, 서혜나가 몸을 뒤로 물렀다.
도현의 어깨를 잡고 여기저기를 확인하는 것이, 상태가 괜찮은지 파악하는 것 같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을 두 눈에 담으려 애쓰는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은 그런 서혜나를 조금 묘한 눈빛으로 보았다.
많이 아프긴 했다. 열이 펄펄 끓고 속이 울렁이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로 아픈 적은 많았다.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앓았던 적도 있었다.
그 숱한 아픔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고, 깨어난 것에 감사하며 강하게 끌어안은 건 처음이었다.
도현은 불현듯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질 때마다 들리던 목소리와 손길을 흐릿하게 떠올렸다. 그러나 그 기억은 서혜나의 말로 인해서 금방 날아갔다.
“내 아들, 이제 괜찮은 거니? 어디 아프지 않고?”
“네, 저 괜찮아요.”
“의사,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겠다.”
서혜나가 다급하게 콜을 눌렀다.
벤자민이 와서 도현의 상태를 진단하고 열이 거의 다 내렸다고 말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진정했다.
도현은 곧장 퇴원해도 될 정도로 괜찮았지만, 어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도현은 그들의 의견을 따라 하루 이틀 정도 더 입원하고 상태를 본 후 퇴원하기로 했다.
“한 숟갈만 더 먹어봐, 도현아.”
도현이 착잡한 눈으로 제 앞에 들이 밀어진 숟가락을 보았다.
거의 삼 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도현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담백한 미음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먹고 말았겠으나, 지금은 도현에게 애걸하며 숟가락을 들이미는 사람이 있었다.
먹기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쳐다보는 눈이 너무 간절해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도현은 미음 한 그릇을 거의 다 먹었다.
먹고 난 후에는 서혜나가 앞에 있는 공원에서 산책하자고 했지만, 도현이 거부했다.
“그냥 병실에 있고 싶어요.”
도현은 말하면서도 걱정했다. 미음처럼, 또다시 불안한 눈으로 부탁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서혜나는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오히려 혹시 할 것이 필요하지 않냐면서, 도현이 원하는 책도 가져다주었다.
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도현은 익숙함을 느꼈다. 젖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코를 간지럽히는 책 특유의 향, 그리고 적막한 하얀색.
그건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완벽한 퍼즐 속에서, 한 가지 이질적인 퍼즐 조각이 있었다.
도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지루한 표정으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든다. 지루하냐고 물어보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가 고개를 든 순간, 갈색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의아한 표정의 서혜나가 사과를 더 먹겠냐고 물었다. 테이블에는 도현이 몇 개 집어 먹고 남은 사과가 있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도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글씨를 따라 읽었다. 책에 집중할수록 상념이 옅어졌다.
그저 잉크로 나무에 색을 입힌 것에 불과한데도, 책은 때때로 은밀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서걱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문득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에 덮어놓았던 궁금증이 치고 올라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 * *
이틀 후, 도현은 퇴원했다.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직은, 시끌벅적하기보다는 적막하게 있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도현은 정원에 나와 있기를 즐겼다.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해먹에 누워 햇빛을 쬐고, 때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서혜나는 도현의 주변에서 차를 마시거나, 같이 책을 읽었다. 서혜나는 회사에 가지 않고 도현의 곁을 지켰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평온한 며칠이 지났다.
밖에서 캐롤송이 들렸다.
울타리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자, 색색의 전구로 꾸민 거리가 보였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도….
어.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선물을 안에 던져놓고 가면 될까?”
“그러다가 상하면 어떡해?”
“괜찮을 거야. 난 깨질 만한 물건이 들지 않았거든.”
“바보야. 선물 상자 말이야.”
“…그건 잘 던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냥 건네주면 상자가 우그러질 일은 없을 거야.”
“물론 그렇겠지만 지금 집엔 아무도…?”
꼬마 산타가 멈칫했다.
도현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여윈 탓에 날카로워진 턱선이 주는 예민한 인상이, 양 뺨에 들어찬 부드러운 생기로 인해 누그러졌다.
“안녕. 진, 니키.”
“도, 도리야?”
진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옆에 있는 니콜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너무 놀란 탓에 말이 안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눈을 크게 뜬 두 아이와 한 아이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낼 기색이 없는 두 사람에 도현이 재차 말했다.
“오랜만이야.”
“너, 너, 너…!”
니콜라스가 말을 더듬었다.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왜 왔다고 연락 안 했어!”
“도리야! 다 나은 거야?”
니콜라스가 질타의 말을 하긴 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건 선연한 기쁨과 반가움이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둔 아이들이 서로를 보며 기쁨의 감정을 나눴다.
“들어와. 문 열어줄게.”
“잠깐, 저기 나르샤가 있어.”
역시, 두 아이를 담당하는 건 나르샤였다. 차 안에서 나르샤가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도 기쁨이 어려 있었다.
“많이 아팠다고 들었는데, 다 나은 거니?”
도현이 괜찮다고 하자 나르샤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다행이네.”
“안에 잠깐 들어오실래요?”
“안에 엄마가 계시니?”
“네. 계세요.”
“그럼 난 인사만 드리고 갈게. 아무래도 이 꼬마들은 오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해요.”
철컥.
문이 열렸다.
“도리야아!”
“도리토스!”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처럼 튀어온 두 사람이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도현은 두 사람의 무게에 못 이겨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얘들아! 위험하게 달려들면 어떡해!”
“괜찮아요, 나르샤.”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나르샤를 말렸다.
물론 잔디가 없었으면 좀 곤란할 뻔했지만…. 도현은 꼬리뼈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가볍게 무시했다.
고요한 크리스마스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친구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도현이 웃었다.
세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도현의 다락방으로 향했다. 다락방에 있는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은 도현을 추궁했다.
언제 퇴원했냐, 왜 연락을 안 했냐, 어디가 아팠던 거냐, 지금은 괜찮냐 등등….
도현은 천천히 그들의 질문에 모두 답해주었다. 좀 더 쉬고 싶어서 연락을 미뤘다는 말에 진과 니콜라스는 섭섭해하기는 했지만 이해해 주었다.
“맥도 네가 입원했다는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어. 나중에 연락해봐.”
그가 걱정했다는 건, 문자 메시지 내역을 봤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진과 니콜라스도 만났으니 맥에게도 연락해야 할 것 같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내 선물이야?”
“응! 너 병원에 있을까 봐 집에 몰래 두고 가려고 했지.”
도현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 진, 니키.”
도현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머뭇거리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 미안해.”
애초에 크리스마스가 지날 때까지 아무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누구의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찾아온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음에 두 배로 주면 되지!”
“난 세 배!”
두 아이는 도현을 탓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한 곳에 스쳤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살짝 먼지가 슨 캔버스였다.
도현은 자신이 선물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저기, 얘들아.”
“응?”
“혹시, 지금 선물을 준비해도 될까?”
“선물 안 샀다며?”
니콜라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도현이 반짝이는 눈으로 캔버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로 초상화는 어때?”
“!”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아!”
두 아이가 동시에 입을 모아 외쳤다. 도현이 환하게 웃었다.
서혜나가 정원이 보이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한쪽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니콜라스가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서 도현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듣기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거라던가.
캔버스에 집중하고 있는 도현은 산타 모자에 빨간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두 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라고 했다.
니콜라스가 자꾸만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리자 진이 무어라 타박하는 게 보였다. 그러자 도현이 진을 보며 무어라 말했다.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무슨 대화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서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쉬 드 노엘-통나무 모양의 크리스마스 전통 케이크-이면 되려나.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얘들아, 케이크 먹고 하렴.”
“! 케이크!”
니콜라스가 반색했다. 다 죽어가던 얼굴이 금방 쌩쌩해졌다.
진이 못 말린다는 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혜나가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케이크를 내려놓고는, 도현이 열심히 그리고 있는 캔버스 뒤쪽으로 향했다.
서혜나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세상에….”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캔버스에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니콜라스가 있었다. 색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연필로 그려진 그림인데도 왠지 모르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림 자체가 정교하기보다는 표현력이 뛰어났다. 니콜라스가 가진 장점과 분위기를 잡아 그대로 녹여낸 느낌이었다.
전에도 학교에서나 집에서 몇 번 도현의 그림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전부 풍경화였다.
도현이 누군갈 공들여 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여주길 꺼리는 기색에 궁금증을 눌렀다.
그래서 도현이 이렇게 인물을 그린 건 처음 보았다.
재능이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도현을 미술 쪽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하던 줄리아의 말이 절절히 이해되었다.
막상 이 그림을 그린 도현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케이크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엄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응. 방금 만들었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저도 잘 먹을게요!”
아이들이 케이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통나무 모양이야! 진이 기뻐서 외쳤다.
서혜나는 테이블로 달려가는 작은 아이가, 정말 느닷없게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저 아이가 가진 재능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저 아이가 모든 걸 후회 없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을까?
그건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부담감이었다. 한 아이를 책임지고 기른다는 것의 무게를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리 느닷없는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도현이 고열로 앓았던 몇 주간, 서혜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건강해 주기만 한다면.
다시 눈을 뜨고 웃어주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너를 평생 지켜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네가 가고 싶은 모든 길을 경험해보고 끝내 가장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셀 수 없이 맹세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눈동자로 환하게 웃는 도현을, 그녀의 기적을 보며 다시 한번 맹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