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로미오와 줄리엣 (1)
툭. 투둑.
요즘 샌디에이고는 비가 자주 왔다. 옅게 안개 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넋을 놓고 몇 시간을 구경하게 되었다.
도현은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며 지난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떠올렸다. 진과 니콜라스가 집에 돌아간 후, 도현은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타오르는 난롯불과 따뜻한 음식, 그리고 조용한 음악 정도가 떠오르는 전부였다.
새해도 크리스마스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이장혁이 전화를 걸어 조금 오래 통화한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렇게 도현은 한국 나이로 10살이 되었다. 한 자리에서 두 자리로 변했지만, 도현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던 도현은 돌연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말 갑작스럽고, 난데없이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했던 생각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아마, 변화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항상 이 순간 손에 쥔 것에 만족했다. 아니, 불안해했다. 그것이 제 손을 떠날까 불안에 떨며 지키기에 급급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언제까지나 머물러있길 바랐던 도현에게 변화의 결심이란 아주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도현은 꽤 오랜 시간 미뤄왔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엄마.”
“응?”
도현의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서혜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녀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게 익숙해졌다.
“저, 에이전시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서혜나는 잠시 멈춘 채로 도현을 응시했다.
“저번에 에드워드 씨가 말했던 거 말이니?”
“네.”
“심경에 변화가 있었니?”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새해잖아요.”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다짐을 한다. 작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이번 년에는 할 수 있겠다는 묘한 자신감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새해니까, 이 정도 변화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에드워드 녹스 : 잘 생각했어! 내가 미리 에이전시에 얘기해 놓을게. 내가 준 명함으로 연락해봐.]
에드워드는 도현의 연락을 받고 기뻐했다. 도현은 에드워드의 말대로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걸려 온 전화로 인해서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 그럼 그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도현이 흥미로운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전화로 대화한 게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딱딱한 목소리는 사무적이었지만, 말에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도현의 나이를 알고 있음에도 아이로 대하기보다는 존중했다.
아니, 존중보다는….
‘고객을 대하는 느낌이었지.’
그래, 이 표현이 정확했다.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공과 사가 철저한 사람일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무서워했을 테지만, 도현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만남은 이 주 정도 뒤에 잡혀서, 그동안 도현은 할 일이 없었다. 개학까지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하늘을 보고 멍을 때리거나 생각에 잠겨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겠지만….
새해를 기점으로 도현은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현은 전과 달리 부지런히 움직였다. 바이올린을 켜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가끔은 서혜나와 함께 디저트를 만들었다.
같이 만든 디저트를 정원 테이블에 앉아 먹는 건 새롭게 생긴 취미였다.
오늘 만든 건 밀푀유였다.
한입 베어 물자, 겹겹이 쌓인 페스츄리가 바삭하게 부서져 내렸다. 사이사이에 들어간 커스터드 크림과 생딸기가 부드러움과 상큼함을 더했다.
“베이킹은 언제 배우신 거예요?”
“응? 독학한 거야.”
“독학이요?”
도현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서혜나가 작게 웃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나 심심할 때마다 하나둘씩 만들다 보니까 실력이 늘더라고.”
베이킹은 서혜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용 취미인 것 같았다.
바이올린을 생각하자 서혜나의 말이 금방 이해되었다.
“오늘은 밖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는 거 어때?”
서혜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도현이 조용히 있길 원하는 것 같아서 그 생각을 존중해 주었다. 건들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괜찮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도현이 처음 맞이하는 겨울 방학이니, 어디라도 같이 놀러 가며 기분 전환을 시켜주고 싶었다.
“산책이요?”
“응, 공원이나… 아니면 차 타고 멀리 가도 좋고.”
“그럼… 발보아 파크에 가고 싶어요. 샌드위치를 만들어서요.”
“! 그래!”
서혜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두 사람은 의욕이 가득 찬 채로 주방에 갔지만, 식빵과 샌드위치 재료가 없었다.
그에 같이 차를 타고 마트로 가서 장을 봐 왔다. 공원에 가는 길에 베이커리에서 사면 되는 걸 번거롭게 만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샌드위치를 싸서 예쁜 도시락 통에 넣고 발보아 파크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조금 느지막한 오후였다. 덕분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에 앉자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샌드위치를 먹기에는 배가 불렀다. 서혜나와 도현은 공원을 느긋하게 걸으며 산책을 즐겼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을 즐겼다. 도현은 다음번에는 캔버스를 가져와서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까지 봐서 샌드위치를 만들었지만, 막상 많이 먹지는 않았다. 이미 간식으로 밀푀유를 먹었던 탓에 잘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아마 집에 가면 다시 밥을 해 먹을 것 같았지만, 서혜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음 날에는 진과 니콜라스와 함께 할리의 집에 놀러 갔다. 오랜만에 본 브로콜리는 도현을 낯설어하지 않고 반겨주었다.
브라운도 초대해서, 그들은 편을 나눠 게임을 하며 놀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파이를 먹어보고는 맛집으로 인정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렇게 겨울 방학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지나갔다.
겨울 방학이 완전히 끝나갈 때쯤, 저녁 식사를 하고 거실에서 같이 코코아를 마시던 서혜나가 도현을 불렀다.
도현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는데, 몇 번 머뭇거리던 서혜나가 입을 열었다.
“도현아. 혹시 상담받아 보지 않겠니?”
“…상담이요?”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왔다.
“응. 심리 상담 말이야.”
“그건… 이미 끝난 얘기 아니었나요?”
도현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목소리에는 미약한 거부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도현의 반응에도 서혜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새해가 되어서 새로운 결심을 한 건 도현뿐만이 아니었다. 서혜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도현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어하는 일을 요구하는 것도, 미움을 받는 것도 두려웠다.
하지만 도현이 고열로 앓는 걸 보면서, 때론 그런 것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현이 네가 에이전시에 가입한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을 많이 해봤어.”
서혜나는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네가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면, 넌 또래 아이들보다 많은 일을 겪을 거야. 남들보다 몇 발자국 빠르게 사회에 나가는 거니까. 너는 뛰어나니까, 분명 많은 사람이 널 주목할 거야. 그 관심이 네게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아일라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더라도, 네가 맡은 배역이 네게 부정적인 감정을 요구할 수도 있어.”
이번엔 가 떠올랐다.
도현은 서혜나의 말에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 과정에서 네가 상처받고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돼. 그래서 네가… 힘들고 지친 일이 있다면 터놓고 말할 상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서혜나는 부러, 도현이 입원했던 날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심리 상담을 권하는 게 오로지 배우 활동 때문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퇴원한 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말을 꺼낸 것도 그 이유 탓이었다.
도현도 그걸 눈치챘다.
정말 그거 때문이에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서혜나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상담받는다고 해서 뭘 꼭 말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대화 친구가 생긴다고 생각해도 좋아. 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네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하기 싫으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거짓말.
도현은 이 말을 삼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도현은 어렸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서혜나가 바라는 그림을 모를 수가 없었다.
“네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너와 상담 선생님밖에 모를 거야. 엄마도, 아빠도 도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알고자 하지 않을 거고.”
그럼에도 곧장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침대맡에서 울던 얼굴이, 간이침대에서 자던 모습이, 조용히 곁을 지키던 기억과 정원에서 먹었던 디저트의 달콤함이 부정적인 생각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도현이 고개를 돌려 환히 트인 창밖을 보았다. 어제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정원에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상담은 싫다.
형과의 기억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건 도현을 이루는 기반이고 근간이며 전부였다. 누구도 함부로 그런 취급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전히 들리는 빗소리 탓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안개로 흐릿해진 풍경 탓일 수도 있고, 달콤한 향기를 내는 코코아 탓일 수도 있었다.
그냥, 엄마의 말처럼 그 이야기를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도현은 한 발짝 물러서기로 했다.
“그렇게 할게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 *
도현은 조수석에 앉아 차 문에 몸을 살짝 기댔다.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구경했다.
조금 더 달리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건물에 들어가자, 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곳곳에 놓인 허브류의 식물이 눈에 띄었다.
“잘 오셨어요.”
한 여성이 그들을 반겼다. 서혜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몸을 반쯤 낮춰 도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안녕. 나는 메리 스완슨이야. 도현이라고 부르면 될까?”
그녀는 이미 도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
“좋아, 나는 메리라고 부르면 돼. 보호자분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셔 주시겠어요?”
보통의 경우, 아동 상담은 부모 면담을 먼저 한다. 그러나 도현의 경우 부모 면담은 전화로 가벼운 수준에서 끝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온 아이였다. 그 앞에서, 서혜나와 상담사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 않았다.
도현이 메리를 따라가자, 서혜나가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도현은 조금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를 따라 들어간 방은 굉장히 아늑했다. 넓은 소파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고, 내담자와 상담사가 마주 보게 되는 배치였다.
도현은 조금 어색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실 건 뭘 좋아하니?”
“코코아요.”
“음, 아쉽게도 코코아가 없구나. 다음번에는 사다 놓을게. 지금은 오렌지 주스로 괜찮을까? 아니면 허브티도 있는데.”
“그러면 허브티로 부탁드려요.”
도현은 이장혁과 다르게 신맛이 나는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메리는 허브티를 우리면서, 티 나지 않게 도현의 모습을 관찰했다.
상담실에는 어린 연령의 아동을 위한 장난감부터 책, 스케치북까지. 많은 물건이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얌전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볼 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걸 불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침착하며, 조심스러웠다.
탁.
“고맙습니다.”
도현은 허브티를 한 모금 마셨다.
어째서 허브티를 구비해 두는지 알 것 같았다. 따뜻함과 향긋함에 긴장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