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47)화 (148/582)

제147화. 로미오와 줄리엣 (2)

“내가 여기 앉아도 되겠니?”

“네, 괜찮아요.”

간혹, 상담자와 가까이 앉는 것을 불안해하는 아동이 있었지만, 도현은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은 메리는 본론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도현의 예상과 다르게 소소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현이 입은 보라색 후드 집업을 보고 보라색을 좋아하는지 물었고,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고 얘기하며, 자연스럽게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비가 그쳐서 다행이야. 비 오는 날도 좋지만, 맑은 날을 보고 싶었거든. 도현, 너는 어떤 날씨가 더 좋니?”

“…전 비 오는 날도 좋아해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도 꼭 도현의 생각을 물었다.

첫 상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담자와 상담자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특히, 어린 아동의 경우 경계심을 풀어주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했다.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자 도현은 조금씩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메리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종이를 도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항목이 빼곡히 나열된 질문지였다.

도현의 나이대 정도면, 언어 능력과 인지 능력을 고려해 구조화된 질문지보다는 동화, 놀잇감, 그림 진단 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었지만….

- 무척이나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예요. 솔직히, 사고 수준에서는 성인과 다름없지 않을까 싶어요.

내담자의 보호자와 통화 중 들었던 내용이었다.

대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상담자는 아동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보호자의 말을 참고 정도만 해야 했다. 자칫 편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호자의 말이 맞았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도현의 인지나 사고 수준이 어린아이를 넘어섰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경우에는 놀이 진단보다는 진단지가 나은 선택이었다.

“거기에 네가 생각하는 대로 체크하면 돼. 어렵게 생각할 것 없고, 편하게 하면 된단다.”

“알겠어요.”

도현이 질문지를 작성하는 동안 메리는 도현을 관찰했다.

아동의 용모나 태도는 아동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옷이 구김 없이 깔끔한 것과 부드러운 혈색이 도는 얼굴을 보면 양육의 질이 괜찮은 것 같았지만….

메리는 바른 자세로 앉아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가는 도현을 보았다. 집중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장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이지만, 아동의 성장 배경을 따져본다면 조금 달랐다.

메리는 이미,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오랜 시간 병원에 입원해 살았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양육자와의 유대 관계 형성에 실패하고, 병원이라는 환경 속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 상황에서 아이의 높은 발달 수준과 지능은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적당히 거리를 두는 예의 바른 말투나 행동거지를 보아, 이미 아이는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린 후처럼 보였다.

이번 내담자는, 단기간에 상담을 진행하기보다는 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다음에 봐, 도현. 혜나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메리의 인사를 뒤로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옷에 허브 향이 조금 밴 것 같았다.

철컥.

차에 탄 서혜나가 도현의 안전벨트를 매주며 물었다.

“첫 상담은 어땠어?”

“음….”

도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질문지를 작성한 후, 메리는 도현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물었다.

학교생활은 어떤지, 친한 친구는 누군지, 취미는 뭔지, 자주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부모님과 시간을 자주 갖는지 등등….

도현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도현은 상담 내내 서혜나가 메리에게 형의 이야기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가늠해 보려고 했지만, 혼란만 커질 뿐이었다.

- 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네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하기 싫으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 말이 진짜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았어요.”

“정말? 다행이네!”

서혜나가 한눈에 봐도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집에 가기 전에 밥 먹을까?”

“좋아요.”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넓은 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렸다.

* * *

3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개학 첫날, 도현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해리도 반에 오자마자 도현에게 몸은 괜찮냐고 물었고, 수업 시간에도 종종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도현의 쪽을 보았다.

아일라도 힐끔힐끔 도현을 돌아볼 정도였다.

도현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야 아이들의 관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새 학기가 되자, 짝을 바꿨다.

헤더가 아쉬운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평소 성격대로 ‘안녕’ 하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미련이 남은 눈으로 쳐다봐서 도리어 도현이 놀랐다.

도현의 새로운 짝은 별로 말을 섞어본 적 없는 여자애였다. 나름 잘 지내보려고 인사를 건네자, 어색한 표정과 불편함이 그득 묻어나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현을 유독 대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번 짝이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이번엔 친해지기 어렵겠네.’

그래도 이번에는 니콜라스가 뒷자리였다. 그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도현은 몸을 틀어 니콜라스와 시시덕대며 수다를 떨었다.

“수업 시간에 과자를 먹을 테니까 네가 날 가려주는 거야! 어때?”

니콜라스는 조금 불손한 생각에 기쁜 것 같았다. 도현이 웃으며 안 된다고 말하자 금세 입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몇 시간.

그건 니콜라스의 앞자리가 장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니콜라스는 장난을 무척 좋아했다. 거기다, 앞자리에는 무슨 장난을 치든 다 받아주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니콜라스가 아니었다.

도현은 니콜라스가 등을 쿡쿡 찌르고, 쪽지를 날려 보내고, 헛소리를 하고,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는 통에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웃음을 참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점심시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진이 한심한 눈초리로 니콜라스를 보았다.

“네가 고생이 많다.”

동정 어린 눈으로 어깨를 토닥여 오는 손길에, 도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완전한 일상이었다.

* * *

띵-동.

맥은 커다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곳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는데, 혼자 오니까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맥이 의식적으로 어깨를 폈다.

크리스마스 날, 맥은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며칠 전에 퇴원했어요.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맥.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문자를 받고 맥은 안심함과 동시에 속이 비틀렸다.

아니, 조금 더 길게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진이 도현의 입원 소식을 전했을 때, 맥은 많이 놀랐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과 갈피를 잡지 못하던 눈동자, 잘게 떨리던 손.

꽤 오래 지난 기억인데도 생생했다.

그게 너무 가까이서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 약한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인지, 내심 대단하게 여겼던 상대였기 때문인지는 모호했지만….

결과적으로, 도현이 이상 증세를 보여 촬영을 멈췄던 날의 기억은 그에게 깊게 남아버렸다.

도현이 입원했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괜찮다는 문자를 받았음에도 맥은 도저히 안심되지 않았다. 두 눈으로 멀쩡한 모습을 봐야지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한 번 더 울렸다.

[시간 날 때 크리스마스 선물 받으러 올래요?]

평소라면, ‘내가 왜 가? 네가 오든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을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맥은 약속을 잡았고, 그리하여 오늘 이곳에 서 있게 되었다.

맥이 괜히 인상을 찡그렸다.

도현과 만날 때는 촬영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도 같이 있거나, 아니면 촬영에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러 오는 건 처음이었다.

철컹.

문이 열렸다.

맥이 손을 뻗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거기엔 도현이 서 있었다.

영화제가 끝나고 삼 개월 정도 만에 보는 도현이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변한 느낌이었다.

‘살이 빠진 건가?’

맥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맥.”

“어, 어… 그래.”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맥이 조금 어설프게 답했다.

“들어올래요? 집에 엄마는 안 계시고, 케일리가 있어요.”

“케일리?”

“저를 돌봐주시는 분이요.”

도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맥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아하?”

이내 비죽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네! 아직 ‘베이비’시터가 필요한 나이구나! ‘베이비’시터 말이야!”

푸흡, 맥은 자신이 말해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웃겼다.

저렇게 냉한 얼굴을 하고선, 매번 입바른 말만 하는 애늙은이한테 베이비시터라니!

도현이 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맥은 ‘베이비, 풉, 시터 없이 집 밖에 나와도 돼?’, ‘아직 베이비구나! 내가 잘 돌봐 줘야지! 왜냐면 베이비니까!’ 하며 깐족거리더니 급기야 ‘베이베~ 베이베~ 우~’ 하며 해괴한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도현은 잔잔한 표정으로 맥을 보았다.

베이비시터가 있는 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맥이 킬킬거리며 웃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다.

결국 도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들어가자, 케일리가 그들을 반겼다.

“네가 맥이구나! 반가워.”

“어, 안녕하세요….”

방금까지 신나서 놀리던 맥이 조금 주춤했다. 맥은 어른을 보면 불편해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걸 아는 도현은 맥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 준다며?”

“아, 맞아요. 집에 갈 때 줄 테니 가져가요. 케이시랑 같이 드세요.”

“뭔데? 먹을 거야?”

“네, 제가 케이크를 만들었거든요.”

의외의 선물이었다.

원래 맥의 선물도, 진과 니콜라스처럼 초상화를 그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겨울 방학 동안 서혜나와 베이킹을 하면서 조금씩 흥미를 붙여가던 참이었다.

베이킹을 하던 도중 선물로 케이크를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대로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맥이 오늘 온다고 해서 어제 만들어놓은 거예요.”

“맛없는 거 아니야?”

“음… 나쁘진 않을걸요.”

겨울 방학 동안 새롭게 알게 된 건데, 아무래도 도현은 서혜나의 음식 솜씨를 물려받은 것 같았다.

게다가 서혜나가 많이 도와주어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괜찮은 케이크를 만들 수 있었다.

맥이랑 오랜만에 만나 잡담을 하고 있으려니, 케일리가 과자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둘은 방바닥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베니스 영화제 당시 호텔에서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맥은 장난기가 돋아 과자를 던질까 했지만, 여기가 호텔이 아니라 집임을 상기하고선 자제했다.

맥은 도현을 찾아온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입원한 거야?”

“그냥 몸살이었어요.”

“왜 이렇게 허약해? 생긴 것도 비리비리해서는.”

목소리는 툴툴거렸지만, 명백히 걱정을 담고 있었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것 같긴 한데, 시선도 아까부터 도현의 안색을 훑고 있었다.

도현이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 아니거든?”

도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

“삼 일 간격으로 안부 문자를 보내고, 괜찮다고 답장한 후에도 진에게 제 상태를 물었지만,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겠죠?”

“…그, 그건.”

“오늘 온 것도 선물 받으러 온 거고요. 맞죠?”

놀림받았단 걸 깨달은 맥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달아올랐다. 도현은 입술을 깨물며 참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모를 통쾌함도 함께였다.

맥이 분통을 터트리려는 걸 잽싸게 눈치챈 도현이 웃음을 뚝 그쳤다. 갑작스레 태연한 표정을 짓는 도현에 맥은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도현이 자연스럽게 과일을 포크로 찍어 맥의 손에 들려주어 주의를 흩트린 후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맥, 저번에 CLA에 들어갔다고 했죠?”

맥은 과일을 내동댕이치고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이어진 말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저도 이번 주에 거기 가요.”

“뭐?”

“맥, 과일 떨어지겠어요.”

맥은 과일을 입에 욱여넣고 우걱우걱 씹어 넘긴 후 눈을 빛내며 말했다. 누가 봐도 방금 일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정말이야? 들어가려고?”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미친! 난 네가 평생 안 들어갈 줄 알았어!”

그럴 만한 게, 맥은 신이 나서 방방 뛰며 곧바로 달려갔는데, 도현은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질질 끌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대로 활동을 안 하려는 건가 싶을 정도였는데….

맥은 흥분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도현은 맥의 질문에 침착하게 답해주었다.

두 사람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열정이 불타올라 서재로 향했다. 거기서 적당한 책을 꺼내서 캐릭터를 해석하며 같이 연기해 보기도 했다.

맥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보니 다시 놀랍게 느껴지는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케일리는 ‘놀이’를 하는 두 아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도현과 ‘놀이’를 하는 건 그녀뿐이었는데, 이제는 친구가 생겨서 함께 노는 걸 보니 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후 집에 돌아온 맥은 케이시에게 손에 들린 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친구가 케이크를 만들어 줬다는 소리에 케이시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친구냐고 묻는 말에 맥이 기겁한 건,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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