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48)화 (149/582)

제148화. 로미오와 줄리엣 (3)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뉴욕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대도시이자 두 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받는 건, 바로 이곳이 엔터테인먼트의 제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세계 영화 산업의 선두이자 중심인 할리우드 현장이 바로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수천 명의 에이전트와 제작, 배급 전문가와 다양한 유형의 탤런트, 부티크 에이전시, 매니지먼트 회사, 법률 및 홍보 회사, 소규모 스튜디오와 독립 제작사 및 배급사까지.

할리우드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하나의 동네를 이루었고, 할리우드는 그 자체로 전문 직업의 세계이자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도현은 그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인, CLA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안팎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역동적이고 활기차고, 그만큼 바빠 보였다.

도현은 CLA 건물에 발을 디뎠다. 서혜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데스크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매독스 워커 씨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매독스 워커 씨요?”

질문을 받은 직원이 무언가 찾는 듯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3층에서 왼쪽 두 번째에 있는 사무실이네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좋은 하루 되시길.”

도현과 서혜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데스크 직원이 알려준 대로,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사무실을 보았다.

매독스 워커.

맞게 찾아온 것 같았다. 도현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고 한 백인 남성이 보였다. 전형적인 회사원 옷차림에 얇은 테의 안경이 그를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정처럼 보이게 했다.

주름 하나 없는 소매와 깔끔한 사무실로 보아,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 같았다. 전화하면서 상상한 이미지 그대로였다.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의 안내를 따라 두 사람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소파를 새로 바꿔서 편할 겁니다.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커피 괜찮습니까?”

“그럼요.”

도현에게도 물어보았는데,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도현은 오렌지 주스를 골랐다.

매독스가 그들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에드워드 녹스가 추천한 사람이 에이전트를 찾는다는 메일을 보자마자, 저는 곧장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전부터 당신에게 흥미가 있었거든요.”

“베니스 영화제 때문인가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베니스 영화제 최연소 수상자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대단하니까요. 그건 앞으로 당신의 경력에 있어서 늘 첫 줄에 쓰여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매독스가 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난 당신이 나오는 영화를 봤어요. 에이전트의 입장에서 탐이 나는 배우였습니다. 미스터 리, 당신은 마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을 제가 맡은 거고요.”

매독스는 낯간지러울 만큼의 칭찬을 하면서도, 당연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침착했다.

“분명 미스터 리는 세계를 반하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 그 영화를 보고 이미 확신했어요. 그리고 미스터 리가 쌓아갈 경력을 제 손으로 만들어주고 싶었죠.”

오늘 만남은 에이전트가 아티스트를, 아티스트가 에이전트를 평가하는 면접 자리나 다름없었다.

지금 매독스는, 도현의 미래에 대한 결과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었다.

자식을 칭찬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서혜나는 아니었다. 서혜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가능성과 별개로 미스터 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지 않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매독스는 칭찬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리가 넘어야 할 벽은 무척이나 높고 넓을 겁니다. 여기는 할리우드고, 당신은 동양인이니까요. 그건 당신이 얼마나 재능 넘치고 매력적인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더 완벽해야 할 거고, 그렇다고 해도 정상에 서기 어려울 수 있어요.”

“제가 동양인이라서요?”

“네.”

도현의 인종을 비하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 그렇다고 말해주듯이 담담했다.

서혜나는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그보다 도현이 걱정이었다. 혹여 상처를 받았을까 봐 도현의 안색을 확인한 서혜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에이전트고 당신은 아티스트니까요. 에이전트와 아티스트 사이에서 신뢰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이건 매독스의 신념이었다.

‘내게 3개월만 주면 널 스타로 만들어줄게’라는 말로 꾀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에이전트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에이전트의 업무의 핵심은 바로 ‘관계 맺기’였다. 에이전트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맺고 있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렇기에 관계가 중요했다. 그것도 유일무이한 관계가. 누군가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관계라면 딱 그 정도에 머무를 뿐이었다.

대체할 수 없는 관계.

거기서 필요한 건 우정이 아니었다. 에이전트와 아티스트 사이의 우정만큼 아슬아슬한 것도 없었다.

10년간 경력을 쌓아주고도 생일날 이별 통보를 받을 수 있는 게 이 바닥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신뢰였다.

그러므로 매독스는 숨기기보다 솔직히 내보이기를 택했다. 신념에 의한 일이지만, 그에게도 도박이었다.

저 아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매독스는 도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러니까 워커 씨는, 저를 정상까지 올려주고 싶은 거군요.”

매독스가 왜 굳이 그런 말을 했을까? 왜 할리우드에 첫발을 내딛는 어리숙한 아이에게 굳이 겁을 주었을까?

그건 도현에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다.

도현에게 배우로서 기대를 걸고 있어서, 그를 정상에 세우고 싶어서 말이다.

도현은 유쾌해졌다.

매독스가 도현을 보자마자 늘어놓은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누군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의 가능성을 믿고 확신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도현은 오히려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벽일 뿐인걸요. 부수면 허물어지고 넘어가면 의미 없어지는 벽이요.”

도현의 대답에 매독스는 처음으로 짧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면접은 끝났다. 서로를 살피거나 떠보는 건 더는 의미가 없었다.

서혜나와 도현은 이후 매독스에게 계약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매독스는 에이전트의 업무를 설명했다.

고객을 대신해 공식적으로 독점권을 갖고 일거리를 찾아주고, 거래를 협상하며 그 결과로 보수를 받는다고 했다.

도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주선만을 생각했던 도현은 에이전트가 협상까지 맡아서 한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러자 매독스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거래는 에이전트의 업무 중에서 가장 단순한 일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깔린 게 선임 에이전트와 변호사니까요.”

“그렇군요.”

도현이 흥미로운 투로 답했다.

매독스가 다시 계약서를 설명해 주었다. 전체 협상 금액의 10% 수수료를 에이전트 측에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매출이 극과 극이겠네.’

에드워드의 10%와 자신의 10%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일 게 분명했다.

도현은 태연한 낯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매독스가 설명을 마치고,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계약서에 서명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매니저가 필요할 겁니다. 아, 혹시 부모님이 아이를 케어할 예정인가요?”

“아니요. 저도 일이 있어서 그러긴 어려워요.”

“그럼 매니지먼트 회사의 명함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괜찮은 곳이라, 제가 맡은 다른 아티스트도 여기 매니지먼트를 주로 이용하거든요.”

매독스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면서, 도현은 할리우드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매독스를 연결해 주었고, 매독스는 매니지먼트를 연결해 주었다. 전에는 에드워드에게 랜디의 연락처도 받은 적이 있었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촘촘한 그물망과 같았다.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핸드폰 주소록에 항목 하나가 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을 누군가에게 소개해주고, 나도 그들을 통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 그로 인해서 더 많은 기회를 손에 쥐며, 할리우드에 편승하는 것.

그게 할리우드 시스템이었다.

전에 에드워드가 할로윈 파티에 초대하려고 했던 게 얼마나 큰 호의였는지, 조금 감이 왔다.

‘고맙다고 인사해야겠어.’

서혜나와 도현은 매독스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왔다.

도현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매독스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매독스는 도현의 상황이 특수하다고 했다. 동양의 어린아이라는 점에서,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고도 솔직히 말했다.

- 들어온다고 해도, 서양인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동양인의 역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캐릭터 말이죠. 그러나 전 당신이 그런 역할을 최대한 맡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매독스는 눈앞의 것이 아니라 좀 더 먼 곳을 보자고 했다.

그의 말을 적나라하게 해석하면, 몇 푼 더 벌자고 이미지를 소모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그래서 일거리가 조금 늦게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역할이 들어오면 도현의 측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도현은 핸드폰을 들어 올려 에드워드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고맙다는 인사말에 곧바로 알아들은 그는 한 식구가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도현이 고마움의 표시를 한 건데, 이상하게도 에드워드가 도현에게 밥을 사주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긴.

에드워드가 어린아이한테 얻어먹는 모양새는 조금… 보기 그럴지도 몰랐다.

도현은 그렇게 에드워드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약속을 잡았다.

* * *

병원에서 막연히 학교 다니는 자신을 상상했을 때 어땠더라.

친구들과 놀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그리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 착각이었다.

도현은 초등학교는 공부가 아니라 놀러 오는 곳임을 슬슬 인정하기로 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등교한 도현은, 교탁에 선 해리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델마 아카데미 축제가 시작된다는 얘기였다.

‘할로윈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축제는 누구나 설레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 단어였다.

축제가 진행되는 3일 동안 반별 부스와 더불어, 전교생이 준비한 공연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가장 뛰어난 공연을 골라 상을 준다고 했다.

그리하여, 3학년들은 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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