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로미오와 줄리엣 (4)
델마 아카데미는 한 반당 인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그래도 학년 전체가 모이니 꽤 바글바글했다.
“자자, 조용. 얘들아, 지금부터 3학년은 무슨 공연을 할지 정할 건데, 의견 있는 사람은 손 들고 말해볼까?”
해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성질 급한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외쳐대는 통에 강당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도 했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해리는 괜히 선생님인 것이 아닌지, 그 소란 속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쏙쏙 알아들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표가 많이 쏠린 건 춤과 연극, 그리고 합창이었다.
세 가지는 하고 싶은 아이들 수가 거의 비등비등했다.
“좋아. 그럼 춤은 왼쪽, 연극은 가운데, 합창은 오른쪽에 가서 서볼까?”
도현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진이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리야, 너는 연극 할 거지?”
“응.”
“나도 그럼 연극 해야지! 니키, 얼른 와!”
니콜라스가 질질 끌려가면서 맹한 얼굴로 ‘내 의견은?’ 하고 묻자, 진이 활짝 웃었다.
“응, 네 의견 필요 없어!”
니콜라스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연극이 싫지는 않았는지, 반항하지 않고 끌려갔다. …아닌가? 조금 몸부림친 것 같기도….
어수선한 이동을 끝내자, 얼추 정리되었다. 해리가 다시 아이들의 주의를 모았다.
“우리 3학년은 세 팀으로 나눠서 공연을 준비하는 거로 할 거야! 자기 팀원들이랑, 담당 선생님 얼굴을 잘 봐둬!”
연극 팀의 담당 선생님은 해리였다. 익숙한 선생님이어서 다행이었다.
해리는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3학년은 앞으로 수업 시간 중에서 일정 시간을 할애해 공연 준비를 할 건데, 팀별로 모일 것이라 했다. 모임 장소는 각 담당 선생님이 일러주실 거라고 말했다.
이후, 아이들은 강당에 세 무리로 나뉘어 앉았다.
“오늘은 무슨 연극을 할지 정할 거야. 의견 있는 사람은 말해볼래? 하고 싶은 걸 말하고, 그 이유까지 설명해주면 돼.”
여기저기서 의견이 튀어나왔다.
백설 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등등…. 그때, 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요!”
박력 있게 외친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진에게 몰렸다.
진이 여유로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왜냐면 우리 학교에 줄리엣이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해리의 시선이 도현에게 닿았다.
도현은 사방에서 찔러오는 시선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진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말할 때부터 묘한 예감이 들더라니….
“도리가 줄리엣으로 분장하면 분명 아주 예쁠 거예요! 궁금하지 않아요?”
진이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지난 할로윈.
도현의 줄리엣 분장을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아쉬웠던가?
진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진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으며 아이들을 설득하자, 해리는 그 열정에 감화되었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현의 줄리엣 분장을 상상하니 재미있었던지, 키득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짝!
해리가 손뼉을 쳤다.
“그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고 싶은 아이들은 손을 들어볼까?”
손을 들지 않은 건 놀랍게도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도현이었다.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손을 들었다.
그렇게, 만장일치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선택되었다.
자동으로 도현이 줄리엣 역할을 맡은 건 덤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당황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줄리엣은 주인공 역할이었다. 줄리엣 역할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할로윈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역할을 빼앗는 건 아닌가 싶었다.
도현은 해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해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역할은 다 오디션으로 정할 예정이거든…. 네 뜻이 그렇다면 줄리엣 역할도 오디션으로 정해도 괜찮지만… 음….”
해리는 차마, ‘오디션을 봐도 어차피 누가 될지 뻔하지 않냐’라는 말을 하진 못했지만, 도현은 뒤에 생략된 말을 알 것 같았다.
도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겸손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객관화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무지 오디션에서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네 말이 틀리진 않으니 내가 한번 애들한테 말해볼게. 줄리엣 역할을 맡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말이야.”
“네, 감사합니다.”
설마 할로윈 상황이 반복되지는 않겠지.
도현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했다.
해리에게 할 말을 모두 전한 도현은 진과 니콜라스에게 돌아갔다.
해리가 오디션용으로 쓸 로미오와 줄리엣 대본을 프린트를 해 와야 했기 때문에 연극 팀은 잠깐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잠시 친구들과 모여 앉아 놀던 도현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왜 내가 줄리엣을 맡는 거로 정해진 거지…?’
도현이 심오한 고민에 잠겨 있는데, 진이 말간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 해?”
진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진이 이렇게 원하니까….’
도현은 어느새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유독 두 사람에게는 물렁물렁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다면 다 들어주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결국, 바람 빠지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연극 생각하고 있었어.”
진이 도현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로미오 역할은 누가 맡게 될까? 괜찮은 애가 했으면 좋겠는데! 로미오는 멋있는 애가 맡는 게 좋잖아. 그리고 내가 로미오를 좋아하기도 하고.”
마침 진의 주변에 있던 다비드의 귀가 쫑긋 솟았다.
“로미오를 좋아해?”
“응. 재밌잖아.”
도현의 질문에 진이 답했다.
벌떡!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 다비드가 막 강당에 돌아온 해리에게 뛰어갔다. 그래서 다비드는 뒷말을 듣지 못했다.
“어떤 점이?”
“계속 사고 치는 거랑 운이 없는 점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비극의 계기는 대부분 로미오던걸.”
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사이, 해리의 앞에 선 다비드가 씩씩하게 외쳤다.
“선생님! 저도 로미오 역할 오디션 볼게요!”
“응? 다비구나. 그래, 그럼 이거 받아. 임시로 뽑은 로미오 대사야.”
다비드는 대사를 집중해서 보았다. 평소라면 진저리를 쳤을 법한 오글거리는 대사였지만 진지한 눈으로 읽으며 웅얼거릴 따름이었다.
잠시 후.
배역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오늘은 시간이 꽤 지난 상태라서, 주요 배역만 먼저 보기로 했다.
해리가 역할 이름을 말하면, 그 역할에 도전하고 싶은 아이들이 나와 대사를 읊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이에 잘한 아이의 이름을 적고, 해리가 가장 많이 지명된 아이를 부르는 식이었다.
“로미오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 나와 볼까?”
우르르-
꽤 많은 아이가 나왔다.
줄리엣 역할에 도현이 언급되어서 그런지, 여자애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다. 다비드도 비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먼저 지원한 아이부터, 차례로 자기소개와 함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비드의 차례가 되었다.
다비드를 보는 아이들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강력한 적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이들 틈에 있어도 머리 하나는 더 튀어나오는 큰 키와 잘생긴 외모가 로미오 역할에 아주 잘 어울렸기에, 다비드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해리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몸을 숨기고 저의 비밀을 엿듣고 있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다비드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해리가 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건장한 성인 남성인 해리를 진으로 생각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리 생각하니 조금 감정 이입이 되는 것 같았다.
다비드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대라고 하시면 내가 누구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랑하는 성녀여, 내 이름은 나 자신도 싫습니다. 그 이름이 그대의 원수니까요. 그 이름을 내가 적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소.”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제 귀로 들은 것이 백 마디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저는 그 목소리를 알아보겠어요. 당신은 로미오, 몬터규 가문이 아닌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한쪽이라도 그대가 싫다면 난 두 쪽 다 아닙니다.”
다행히 떨거나 더듬지 않고 대사를 안정적으로 읽었다.
로맨틱한 대사는 다비드의 외양과 퍽 잘 어울렸다. 몇몇 여자애들이 멋있다고 소곤거리며 좋아했다.
그렇게 다비드의 차례가 무사히 지나갔다. 다비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자들이 한 번씩 연기를 끝내고, 투표의 시간이 다가왔다. 다비드가 초조한 눈으로 해리의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건, 다비드 데니얼이구나!”
화악!
다비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패배를 인정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다비드의 연기가 제일 안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비드가 기대가 섞인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고동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꼭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진은 ‘쟤가 왜 쳐다보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축하해?’라고 의문형으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다비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내 수줍게 고맙다고 말한 다비드가 뿌듯한 심정으로 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자랑할 생각에 입을 열던 다비드는 윌리를 보고 멈칫했다.
“표정이 왜 그래?”
“너….”
“뭐?”
“…아니야.”
윌리가 고개를 저었다. 다비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윌리의 어깨를 짤짤 털려던 때였다.
“그럼 이번에는 줄리엣 역할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 나와 볼까?”
“도리야! 네 차례야!”
“응….”
미적지근하게 답한 도현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하… 그럼 줄리엣은 도현이가 하는 걸로 할까?”
해리가 웃음으로 무마했다. 도현은 민망한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미묘한 탄식의 주인은 다비드였다.
다비드는 윌리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에게 생략된 말을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한 거지?”
도현의 성별도 성별이었지만, 다비드는 도현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2HV 활동을 하며 친해진 게, 눈이 마주쳤을 때 떨떠름히 인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니.
그것도 도현이 먼저 줄리엣을 맡은 이후 자신이 지원한 거였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제 머리를 짤짤 털며 중얼거리는 다비드에게 윌리가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다비드가 허탈한 눈으로 윌리의 토닥임을 받는 사이, 헛기침을 한 해리가 말했다.
“그래도 일단 오디션은 오디션이니까… 한번 연기해볼까?”
해리의 말에 아이들의 눈에 호기심이 잔뜩 피어올랐다. 기대가 가득 담긴 시선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미오 역할에 지원했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중앙에 걸어 나오는 도현은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줄리엣의 대사는 독백이었다.
상대 없이 연기하는 건 민망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도현의 경우에는 달랐다. 독백 연기는 병원에 있을 때 가장 많이 했던 것이니까.
도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그 움직임을 따라 살랑였고, 드러난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지독한 열병에 빠져 홀로 되뇌는 것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
도현의 눈빛과 표정, 말투, 손짓까지 모두 한 가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당신의 이름을 버리세요. 만일 그게 싫으시다면, 제 사랑이 되겠다고 서약만 해주세요. 그럼 제가 앞으로 캐플릿이라는 이름을 지니지 않을게요.”
니콜라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도현의 연기가 완벽한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친구가 어제 먹은 초코과자만큼이나 당도 높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니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 와중에, 저절로 줄리엣을 상상하게 돼서 더 그랬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얼마나 봤다고 성급히 청혼하는 게 어이없었는데, 만약 줄리엣이 저런 표정과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면 그럴 법도….
‘안 돼!’
니콜라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저기 서 있는 건 도리토스였다!
“로미오, 당신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당신의 어떤 부분과도 상관없는 이름 대신 저를 송두리째 가져가세요.”
애끓는 마음이 차곡차곡히 담겨, 가장 열정적인 마음은 아래 칸에, 사랑하는 이에게 보여주고픈 부드러운 마음은 표면에 드러났다.
그리하여 이름과 부모님, 가문까지 벗어던지라고 애원하면서도 그 말을 읊는 목소린 한없이 부드러웠다.
연기가 끝난 후.
도현은 아무런 이의 없이 줄리엣 역할에 배정되었다. 도현이 진과 니콜라스의 사이에 돌아가 앉고 나서야, 해리는 도현이 대사를 보고 읊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날 이후 한동안 몇몇 아이들이 도현을 보고 얼굴을 붉혔지만, 도현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