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로미오와 줄리엣 (6)
진은 자신의 역작을 발표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역시, 진도 어느 정도는 장난으로 해본 일 같았다.
‘나도 재밌었고.’
솔직히 처음에는 말리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흥이 올라 즐겁게 참여했던 도현이었다.
다만 재키와 니콜라스는 진심이었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은 지금 실시간으로 해리 선생님께 항의하는 중이었다.
물론, 족족 퇴짜를 맞고 있지만.
도현이 고개를 젓고는 다비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현은 다비드가 진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그 버전이 그렇게 싫었나?’
나름 마음에 들었던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재밌었다, 그치?”
진이 시원섭섭한 투로 물었다. 도현이 작게 웃으며 수긍했다.
“자, 잠깐, 진. 넌 안 아쉬워?”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짓고 있던 다비드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진을 보았다. 진이 되레 의아한 투로 말했다.
“학교 연극에 이런 내용을 허락해줄 리가 없잖아?”
“허어…?”
다비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진의 스케일 큰 장난에 자신의 수치심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억울함으로 다비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부들부들대던 다비드는 차마 진에게 무어라 하지 못하고 도현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 너! 너도 알고 있었지?”
“음….”
시선을 피하는 도현에 다비드의 얼굴이 이번엔 하얗게 질렸다.
다비드의 뜨거운 눈초리를 이리저리 피하던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재밌긴 했잖아?”
다비드가 기가 차다는 듯이 입을 턱 벌렸다. 진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도, 진과 니콜라스의 친구였다.
진 버전 줄리엣과 로미오는 연극 팀 아이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정식으로 공연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종종 이와 관련해서 상당히 재밌었다며 떠들어댔다.
각본은 새로운 각색에 들어갔다.
해리는 아이들이 모여 진지한 얼굴로 토론하는 것을 의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이제 저 귀여운 광경에 속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다르게, 이번에 진은 음모와 계략과 배신이 판치는 스릴러 서스펜스 드라마가 아닌, 희망과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말을 성실히 지켰다.
“비극적인 내용은 모두 빼는 게 좋겠어. 모두가 보는 거니까, 슬픈 내용보다는 즐거운 내용이 좋을 것 같아.”
진의 정상적인 의견에 다비드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곰곰이 고민하던 도현이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비극의 발단은 세 가지야. 티볼트와 로미오가 결투를 벌이는 게 첫 번째, 로미오에게 로런스 신부의 전서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게 두 번째, 그리고 파리스 백작과 로미오가 결투를 벌여 파리스 백작이 죽은 게 세 번째지.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려면, 이 세 사건을 해결해야 해.”
조목조목 말하는 도현을 재키가 입을 헤벌린 채 쳐다보았다.
“그럼 차례차례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면 되겠네! 첫 번째는 티볼트와 로미오의 결투니까… 티볼트의 행동을 바꿔야 돼. 왜냐면 원작에서도 로미오는 티볼트와 싸우질 않길 원했으니까.”
진의 말대로였다.
심지어 원작에서 로미오는 티볼트를 말리기 위해 ‘난 결코 자넬 모욕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네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로미오의 옆에 있던 친구, 머큐소가 흥분해 검을 빼 드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로미오의 인생은 참 기구했다. 모든 게 조금씩 삐끗해서,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다.
도현은 잠깐 로미오에게 미약한 동정심을 느꼈다.
상념을 깬 건 다비드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어떻게 티볼트의 행동을 바꾸지?”
다비드의 질문에 진이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진에 다비드도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도현이 말했다.
“우리가 만들었던 각본 설정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아.”
“…그걸?”
다비드의 떨떠름한 표정에는 거부감이 묻어 있었지만, 도현은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
“줄리엣이 티볼트를 이용해 로미오가 약속 장소에 오지 못하도록 했잖아. 그런데 이번엔 티볼트를 속이지 않고 로미오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어리둥절한 아이들의 얼굴을 본 도현이 차분히 설명했다.
“티볼트는 로미오를 싫어하니까, 로미오를 이용하려는 줄리엣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아. 그리고 원작에서는 티볼트가 줄리엣을 아꼈는지 아닌지 나오지 않지만… 그건 우리가 이야기의 여백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단 소리나 마찬가지야. 티볼트가 줄리엣을 아꼈다면, 줄리엣이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려는 걸 도울 동기도 충분해져.”
“그러니까, 티볼트가 로미오를 골탕 먹인다는 거지?”
니콜라스가 선택한 단어는 좀 더 가볍고 유쾌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이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 줄리엣의 계획을 알고 있으니까 원작에서처럼 죽이기 위해 덤벼들지는 않을 거야! 예를 들어서… 결투가 아닌 대련 신청을 한다든가!”
똑똑한 진은 도현의 의도를 단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진이 두 눈을 빛냈다.
“괜찮은 것 같아! 아니, 좋은 것 같아! 게다가 베로나 영지에는 도시 내에서 싸움을 벌일 시 사형이라는 영주의 말도 있었잖아? 원작에서는 티볼트가 로미오를 우연히 만나 사형이고 뭐고 생각지 않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면, 이번엔 철저히 계획적으로 접근하니까 사형을 피할 방법을 찾겠지! 그래서 진검 대신 목검으로 겨루는 대련 형식을 취한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진이 흥분하며 말했다.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조금 커지기까지 했다.
도현은 금방금방 생각을 정리해서 내놓는 진에게 조금 감탄했다.
여러 번 생각했지만, 진은 재치가 남다른 것 같았다.
한번 물꼬를 트자, 이야기 전개는 자연스럽게 쭉쭉 이어졌다. 개연성을 고려해서 다음에 나올 전개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투가 아닌 대련을 했으니 죽음이라는 요소를 피한다.
그렇기에 티볼트가 죽고 로미오가 추방되었던 원작과는 달리, 그들은 다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추론해가는 과정은 꽤 재밌어서, 아이들은 어느새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추방령 말고 무슨 벌을 받지?”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추방령을 받아야 해.”
“왜?”
“그러지 않으면 줄리엣이 죽음의 비약을 마실 이유가 사라지거든. 로미오가 추방되었기 때문에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게 되었잖아. 그래서 죽음의 비약을 마신 거고. 로미오가 추방되지 않으면 죽음의 비약을 마시는 전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오, 진짜 그러네?”
다비드가 신기하단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어서 말하려던 도현은 갑자기 너무 혼자서 의견을 많이 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주춤했다.
그만 말할까 고민하던 도현의 눈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는 네 사람이 보였다. 해석할 필요도 없이, ‘더 말해봐!’라는 시선이었다.
결국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임시 추방령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진의 말대로 둘은 목검으로 대련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줄리엣이 죽음의 비약을 먹은 시기에 임시 추방령이 풀렸다고 설정하면 세 번째 비극인 파리스 백작의 죽음도 막을 수 있어. 파리스 백작은 추방된 로미오가 몰래 줄리엣의 묘에 온 걸 보고 오해해서 체포하고자 공격한 거니까. 그가 추방령이 풀려 정정당당히 들어왔다면 그런 오해를 할 일도 없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에 아이들이 몹시 신기해했다.
감탄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도현은 부끄러운 듯, 혹은 곤란한 듯 볼을 옅게 붉히더니 머쓱하게 말했다.
“그냥… 주어진 전개를 이어가면 돼. 별거 아니야.”
니콜라스는 속으로 도현의 발언을 부정했다.
물론, 도현의 말대로 전개를 이어가면 그들도 생각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곧바로 떠올리는 건 도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말해주진 않을 거지만!’
잘난 건 잘난 거지만, 제 입으로 친구를 칭찬하는 건 생각만 해도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난 도리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이걸 큰 줄기로 삼아서 세부적인 내용을 짜면 될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니콜라스, 재키, 다비드 세 사람도 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각색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이어졌다.
도현은 세부적인 내용을 짤 때는 의견을 거의 내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자신이 정했으니, 다른 아이들의 의견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제법 재밌는 의견들이 나왔다. 니콜라스가 로미오가 줄리엣을 보자마자 로절라인을 잊고 사랑에 빠지는 대목에서 혀를 쯧쯧 차며 외모지상주의라고 하자, 영감을 얻은 진이 줄리엣의 성격을 바꾸었다.
도중에 다비드가 한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 결말은 두 가문이 화해하는 거잖아? 멍청하게 싸우다가 다른 사람 피해 주지 말자가 그나마 교훈 같은 거고 말이야. 로맨스도 빠졌는데… 이런 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다비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 의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로맨스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던 도현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다비드의 말이 맞았다.
각색할 때 주제 의식은 유지한 채로 스토리나 캐릭터를 비트는 건 자주 있는 경우였다.
“좋은 생각 같아.”
아이들이 정신없이 의견을 내는 사이 조용히 있던 도현이 동의하자, 나머지 사람도 관심을 보였다.
도현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도현은 그가 가진 이미지나 명석한 두뇌로 인해서 발언권이 강한 편이었다.
그때, 재키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이건 어때? 교훈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가문이 화해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티볼트랑 로미오가 추방당했을 때 두 사람이 친해지는 거지!”
아주 재밌는 의견이었다.
재키 말대로 되면, 몬터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이 로미오와 줄리엣 때문에 화해하는 게 아니라… 로미오와 티볼트로 인해 화해하게 되는 것이었다!
도현이 마음에 쏙 드는 의견이라고 생각하는데, 니콜라스가 돌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싫어!”
“이런.”
도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복병이 있었다.
티볼트 역할을 맡은 게, 로미오 역할을 맡은 다비드와 원수라는 소리에 희희낙락하며 지원한 니콜라스란 사실이었다.
“내가 쟤랑 친해진다고?”
“니키, 이건 연극이잖아.”
“그래도 끔찍한 건 끔찍한 거야!”
니콜라스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사실, 둘이 지금껏 싸우지 않고 있었던 것만 해도 거의 기적이었다.
도현이 니콜라스와 다비드를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불을 뿜어낼 기색인 니콜라스와 달리 기묘하리만치 차분히 있던 다비드가 입을 열었다.
“진, 너는?”
“응?”
“넌 재키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응, 난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좋아.”
예상외로 시원시원한 다비드의 반응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특히 니콜라스는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묘하게 해탈한 듯 초연한 미소였다.
“내가 쟤한테 사랑하는 내 연인, 내 심장, 내 영혼이라고까지 했는데, 이걸 못 하겠어?”
그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다.
재키가 동정의 시선을 보냈고, 니콜라스조차 차마 이번만큼은 뭐라고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진과 도현은 조금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 아주 조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