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로미오와 줄리엣 (7)
어쨌든 다비드 쪽은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남은 건 니콜라스뿐이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다비드에게서 니콜라스로 시선이 옮겨갔다.
니콜라스가 경기를 일으켰다.
“미친! 쟨 그렇다고 해도 난 싫거든? 쳐다보지 마! 쳐다봐도 안 해! 싫어!”
니콜라스는 아주 완강해 보였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도현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굳이 니콜라스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접었다. 도현은 우선순위가 무척이나 뚜렷한 사람이고, 니콜라스는 그중 최상단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도현 같지는 않았다.
“니키, 정말 안 돼? 재밌을 것 같은데!”
진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한 게 틀림없었다. 니콜라스가 콧방귀를 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은 아직 중요한 패가 남아 있었다.
“그럼… 저번에 네가 탐낸 비스킷을 봉지째 네게 준다고 해도?”
“…….”
니콜라스는 침묵했지만, 얼굴에는 명백한 갈등이 어려 있었다. 그가 치열하게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진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마지막 한 봉지가 남았는데 말이야. 네가 싫다면 오늘 내가 가서 다 먹어 버려야지.”
“…안 돼!”
결국, 니콜라스는 홀랑 넘어와 버리고 말았다.
다비드는 한심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고, 재키는 옆에서 자기도 나눠 주라며 니콜라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싫어! 내 거야! 내가 다 먹을 거거든?”
니콜라스가 까칠하게 반응하며 재키의 얼굴을 꾹꾹 밀었다.
투닥대는 아이들을 본 도현은 진과 시선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쉬는 시간마다 각본 팀은 열심히 모여서, 각본을 완성해 나갔다.
머리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니콜라스는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이더니 나중에는 좀 지친 표정으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아이들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임해서 각색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럴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 얘들아? 잘되어 가?”
숨길 수 없는 의심이 두 눈에 가득했다. 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잘되어 가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그렇구나.”
왜 잘되어 간다는데 더 걱정되는 걸까?
해리는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불신 어린 눈을 마주하며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음모과 계략과 배신이 판치는 스릴러 서스펜스 드라마 버전, 통칭 진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해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버린 것 같았다.
며칠 후.
연극 팀이 다시 한번 모이고, 진이 흠흠, 헛기침하며 시선을 모았다.
해리가 뭔지 모를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희망과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내용이라는 설명에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각본을 받아 들던 해리는 뒷장으로 넘길수록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도현과 진이 마주 보고 씩 웃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
* * *
도현은 역할 분석에 착수했다.
진 버전 연극을 할 때는 간이 연극이었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역할 분석은 거의 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연기했다.
아이들은 감탄했지만, 도현이 보기엔 부족함이 많은 연기였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는… 뭐랄까, 알맹이가 없는 연기에 가까웠다. 겉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이번에는 좀 더 줄리엣의 내면까지 깊이 이해하고,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연기하고 싶었다.
흰 종이에 줄리엣을 분석해 나가던 도현의 손이 멈췄다.
도현은 샌디에이고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생각해내고 사용했던 연기법을 쓰고 있었다. 그가 평생에 가까이 해왔던 방식이 아니라.
‘아직은 아니야.’
말 그대로,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준비되지 않았음을.
삶을 통해서든, 연기를 통해서든 좀 더 많은 걸 겪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방법은, 도현의 미숙한 감정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서 연기했던 본래의 방식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도현이 외로웠을 때 그를 지지해준 유일한 것이며, 병원이 세계의 전부인 소년을 더 넓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성장했을 때.
그때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도현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왠지, 그 순간이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기분 좋은 기대감에 가득 차, 다시 연필을 쥐었다.
사각사각.
단정한 필체가 종이를 채워 나가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 * *
요즘 연극 팀 팀원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대사를 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출연하는 역할이면 몰라도, 극 전반에 출연하는 경우는 더 그랬다.
보통의 아이들에게 긴 문장을, 그것도 몇 페이지가 넘는 대사를 외우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도현은 여기서 아이들의 원성과 부러움을 조금 샀는데, 연기를 맞춰볼 때 자신의 대사를 술술 내뱉을 뿐만 아니라 버벅이는 아이들에게 다음 대사를 일러주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도현과 가장 자주 부딪히는 로미오 역할인 다비드가 그랬다.
“쟨 대체 머리가 어떻게 돼먹은 거야?”
어떻게 해야 고작 며칠 사이에 대사를 다 외우고, 다른 애들 대사까지 알 수가 있는 거지?
다비드는 외계 생물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설마, 모든 대사를 다 외운 건 아니겠지.’
다비드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허,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했다.
“그만, 조용히 하거라! 줄리엣, 베로나의 여름날에도 그분처럼 멋진 꽃은 볼 수 없단다. 물론 두꺼비도 마찬가지지. 어떠냐?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니? 오늘 밤 연회에서 그분을 보게 될 거야. 젊은 파리스 백작의 얼굴을 책 읽듯이 잘 살펴봐. 그곳에, 그곳에, 그곳에….”
허공을 보고 대사를 외던 재키가 버벅이다가, 도현을 쳐다보았다. 재키를 보고 있던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그곳에 아름다운 붓으로 그린 듯한 기쁨을 찾아보거라.”
“아! 맞아! 그곳에 아름다운 붓으로 그린 듯한 기쁨을 찾아보거라. 이 아름다운 책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음…. 으아아! 모르겠어!”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그분의 두 눈이라는 여백에 적혀 있는지 찾아보렴. 이 귀중한 사랑의 책은 제본이 안 된 책과 같은 연인이라, 그저 표지만 덧씌우면 아름다운 책이 될 거야. 말해보거라, 그의 사랑을 좋아할 수 있겠어?”
“아! 그랬지! 이제 기억났네!”
재키가 자신은 멍텅구리라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현이 거의 다 외운 것 같다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독려했다.
“거짓말!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어제보다 한 문장이나 더 외웠잖아. 말하는 것도 매끄러워졌고. 대단한데?”
재키를 보는 검은색 눈동자가 한없이 맑았다. 누가 봐도 의심하기 미안할 정도로 진심으로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 그런가? 헤헤.”
재키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을 흘렸다. 그 틈을 타 도현이 다음 문장도 외워보자며 꼬셨다.
우연찮게 그 장면을 본 다비드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쟨 진짜 뭐지….”
다비드는, 그도 방금 저 수법에 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저렇게 멍청해 보였을 리가 없었다.
다비드는 도현과 원래도 가깝지 않았지만, 좀 더 심적 거리감이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한차례 아이들의 대사 외우기를 도와주고 나면, 도현은 한쪽으로 가서 제 연습을 시작했다.
도현은 최근, 연극 연습을 시작하면서 영상 연기와 연극 연기의 차이점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어느 날, 무대로 쓰일 강당 위에 올라간 니콜라스가 연기한 적이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던 도현은 그가 무척이나 작아 보인다는 걸 알아챘다. 니콜라스가 부끄럼 없이 적극적으로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때 도현은 깨달았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땐, ‘과장’보다는 ‘절제’를 해야 했다. 카메라 속 배우가 감정을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순간, 몰입은 깨져버리고 마니까.
오히려 슬픔을 무표정으로 표현하고, 분노를 차갑게 표현할 때 더욱 극대화되는 게 영상 연기였다.
반면, 무대 위에 선 연극배우는 달랐다. 연극배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과장된 표출을 통해서라도 강렬하게 관객에게 감정과 이미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정확한 이론과 방식은 몰랐지만, 도현은 어쩐지 이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도현은 최근에 ‘과장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좀 멋없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본질을 직설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단어였다.
그는 일단, 또박또박 대사를 읽으면서 뭉개짐 없이 큰 소리로 전달하는 법부터 익히는 중이었다.
요령도, 체계적인 방식도 없이 ‘될 때까지 한다’라는 꽤 무식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나름대로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연습에 열중하자 시야가 점차 좁아졌다. 모든 게 조금씩 지워지고 오로지 대본과 도현만이 남았다. 시끄러운 말소리조차, 이 순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열중한 도현의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라,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이렇게 한번 빠져들면,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다. 진이 다가와 갈 시간이 되었다고 어깨를 흔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든 도현은, 어느새 끝날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마워.”
“고맙긴 뭘. 네가 열심히 해서 다른 애들까지 열심히 하는걸?”
진의 말은 진실이었다.
학교 축제 공연.
누군가는 진지하게 임할지 몰라도, 장난치듯이 설렁설렁 일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3학년 연극 팀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도현의 덕분이었다.
누가 봐도 제일 잘하면서 –심지어 진짜 배우였다- 제일 열심히 한다. 그것도 ‘적당히 열심히’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절로 자극될 정도로 ‘매우 열심히’였다.
또 혼자만 열심히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배역을 맡은 아이들 하나하나, 섬세할 정도로 살피고 있었다.
전날 버벅거렸던 대사를 다음 날 매끄럽게 외우면 모두 기억해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칭찬을 돌려주니, 열심히 하지 않기도 어려웠다.
“다들 잘하고 싶으니까 그러지. 이만 가자.”
도현이 한번 웃고는 천천히 앞장섰다. 진이 금방 도현의 옆에 와서 섰다. 좀 더 걸으니 니콜라스도 도현의 옆에 와서 섰다.
“어! 같이 가자!”
재키도 그 옆에 따라왔고, 다비드도 진의 옆에 붙어 섰다.
줄리엣과 로미오 각색 때 붙어 다닌 이후로, 꽤 자주 같이 다니는 조합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