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53)화 (154/582)

제153화. 로미오와 줄리엣 (8)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처음에는 대사를 외는 것조차 헤맸던 아이들은, 차차 합을 맞추며 연기 연습을 할 정도로 진전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도현이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때였다.

지잉-

옆에 내려놓은 도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도현은, 그 이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독스 워커.

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도현은 왠지 모를 떨림과 묘한 기대를 품고 전화를 받았다.

-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리.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그들은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매독스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 제가 당신한테 연락을 드린 이유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괜찮은 일거리가 들어왔거든요.

역시.

도현은 기대했던 말이 들려오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 그렇죠. 당신이 이 일을 잡을 생각이 있다면, 오디션용 대본을 보내주도록 할게요. 장담컨대, 나쁘지 않을 거예요. 주연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 역할이거든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 물론입니다.

그는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영화는 아니고 드라마라는 것. 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한 사라 베이컨스가 감독이라는 것. 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기대작이라는 것과 그가 도전할 역할이 매력적인 조연이라는 것까지.

- 아, 혹시 영화만 전문적으로 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건 아니죠?

“전 연기라면 다 좋아요. 영화든 드라마든, 모두 제게는 흥미로운 일이에요. 한국에서 드라마에 단역 출연을 한 적도 있는걸요. 그건 제게 좋은 경험이었고요.”

- 그건 처음 듣는 일이네요. 언제 찍은 겁니까?

“작년 여름방학에 한국에 갔을 때요. 촬영은 을 찍은 후에 했지만, 개봉은 영화가 더 늦었어요.”

매독스는 잠시 드라마의 제목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호기심 혹은 정보 수집을 충족한 매독스가 말했다.

- 드라마에 거부감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드라마에 출연하길 꺼리는 영화배우들이 몇몇 있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좀 더 다양한 곳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게 유리할 겁니다.

뒷말은 듣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영화만 고집할 수 있는 배우는, 분명 그만큼 인지도와 파워가 있는 게 분명했다. 미성년자 동양인 배우인 도현과는 상황 자체가 달랐다.

도현은 매독스와 몇 가지 대화를 좀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소년은 때마침 간식거리를 들고 도현에게 다가온 케일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케일리, 아주 좋은 소식이에요.”

* * *

며칠 지나지 않아 도현은 대본을 받아볼 수 있었다.

대본은 꽤 흥미로웠다.

도현의 일정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연습과 더불어, 새로운 대본을 연구하는 일까지 추가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소홀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좀 더 쉬는 시간을 줄이고, 연기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뿐이었다.

도현은 정신없이 지나가는 이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는데, 서혜나는 도현과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도현아, 힘들진 않니?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엄마는 도현이가 쉬면서 했으면 좋겠어.”

“전 지금도 괜찮아요.”

“그러니? 그렇지만….”

서혜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간절한 눈길에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도현이었다.

도현은 좀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에 애가 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혜나의 걱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도현은 서혜나의 바람대로, 그녀가 퇴근한 후 여유롭게 쉬는 시간을 한 시간 가까이 갖기로 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놀지 않고 대본 분석을 하면 되겠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야! 너 요즘 왜 쉬는 시간에 자꾸 딴짓만 해?”

마치 수업 시간에 집중 안 하고 노는 아이를 탓하는 듯한 말투였다. 도현이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보는데, 니콜라스가 도현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거 그만하고 나랑 놀자!”

“노는 건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너 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

니콜라스는 물러설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도현이 도와달라는 의미로 진을 쳐다보았는데,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맞아, 도리야.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쉬는 시간에는 쉬어야지!”

오히려 니콜라스를 거들며 도현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실수했단 표정을 지었다.

“너 집에서도 계속 그러고 있지? 솔직히 말해봐. 요즘 연기 연습 말고 다른 거 한 적 있어?”

도현은 반박하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기 연습만 하고 살았을 리가….

…있구나.

도현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진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야지! 당장 따라 나와! 넌 지금 우리랑 놀아야 해.”

엄마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진은 문답무용으로 도현을 끌고 나왔다.

진과 니콜라스에게 연행된 채로 강제로 잔디밭에 나온 도현은 양팔을 묶인 채로 꼼짝없이 광합성을 해야만 했다.

결국, 도현은 쉬는 시간에 연기 연습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포기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도현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고집이 있었고, 한번 하기로 한 일에는 집착이 대단했다.

“도현아, 잘 자렴.”

“네, 엄마도요.”

굿나잇 인사를 한 서혜나가 도현의 방 불을 끄고 내려갔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몇 분 후.

도현이 조심스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살금살금 책상으로 걸어가는 모양새가 꼭 도둑고양이 같았다.

탁.

스탠드의 불이 켜졌다.

‘한 시간만 하고 자는 거야.’

종이에 글을 적는 도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뒷목을 잡았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현의 비밀스러운 밤중 공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도현이 잘 자고 있나 확인하러 올라온 서혜나에게 현장에서 그대로 검거되고 만 것이다.

서혜나는 황당한 눈초리로 도현을 보았다.

“음….”

도현도 민망함에 우물쭈물하며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넌… 정말.”

도현은 서혜나가 자신을 혼낼 거라고 생각했다. 도현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엄마에게 혼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상상되지 않긴 했다.

‘혼내려나?’

도현이 묘한 기대감인지 뭔지 모를 상황에 맞지 않는 요상꾸리한 감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서혜나는 보석 같은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들에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몰래 잠을 안 자고 공부했냐고 혼내기에는 좀…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눈치 보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하얗고 조그만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밤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착 가라앉은 머리카락은 비 맞은 고양이 같았다.

결국 서혜나는 도현을 혼내지 않고, 꽉 껴안았다. 작은 몸이 폭 안겼다.

갑작스럽게 엄마한테 안긴 도현은 크게 당황했다.

“정말 못 말리겠구나.”

서혜나의 목소리에는 진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꼭 사고뭉치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스스로 꽤 점잖은 편이라 생각해왔던 도현에게는 상당히 낯선 기분이었다.

도현이 손을 꼼질대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연기가 그렇게 좋으면, 밤에 하지 말고 낮에 하렴.”

“하지만….”

“엄마가 뭐라고 안 할게. 그러니까 밤에는 잠을 자야 해. 알았지? 물론, 지금부터 말이야.”

“네, 알겠어요.”

결국, 도현의 고집이 승리했다.

그러나 며칠 후.

도현이 온갖 방법을 쓰며 오디션을 준비했던 게 무색하게도, 놀라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매독스의 목소리엔 옅은 흥분이 묻어 있었다.

- 윌리엄 데이비스 감독이 미스터 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듣고 놀라지 마세요. 당신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고려하고 있어요. 주인공이요!

도현은 몹시 놀랐지만, 진정하고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도현의 머릿속에 며칠 동안 분석했던 대본이 떠올랐다.

“그러면 오디션은요?”

- 오, 미스터 리. 물론 당신이 선택해야 할 일이겠지만… 전 데이비스 감독을 만나보길 추천하고 싶군요. 그와의 면담 후에 오디션을 볼지, 아니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할지 결정하도록 해요.

그 말은,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도현은 이 상황을 마냥 좋아하기도, 그렇다고 싫어하기도 애매했다.

- 그와 만난다고 해서 무조건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결정은 좀 더 천천히 내려도 돼요. 제가 대본을 보내드릴 테니까 일단 대본부터 읽어보세요.

“매독스는 어땠나요? 대본 말이에요.”

- 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재밌더라고요. 아마 미스터 리도 대본을 읽으면 분명히 마음에 들 겁니다.

“그러면, 대본부터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 그게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이게 정말 좋은 기회라는 건 꼭 기억하도록 해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매독스.”

도현은 복잡한 심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드라마 조연 오디션을 보는 것과 감독의 컨택을 받아 영화의 주연을 맡는 건 비교도 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도현도 그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독스가 무조건적으로 도현에게 강요하지 않은 게 나름의 배려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배역을 파고들면서 도현은 그 배역에 정까지 들었다.

이성은 영화를 가리키고 있지만, 감정은 드라마 쪽으로 향한 기묘한 상태였다.

* * *

“…재밌네.”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도현이 한숨처럼 말했다.

대본을 받아 읽어본 도현은 매독스의 안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 감독이 자신을 원했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꼬마 도둑이었다.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모인 아이들이 도둑질하며 살아가는데, 도중에 범죄와 엮이게 된다. 아이들은 제각각 가진 재치와 재능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동시에 주인공이 잃어버렸던 부모님에 대해 알게 되는 이야기였다.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저에게만 재밌는 건 아닌지, 원작 소설이 따로 있으며 그 소설이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도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대본은 확실히 재밌었다.

매독스의 말을 들어보면, 감독도 요즘 할리우드에서 떠오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게다가 주연이었다.

지금 놓치면 언제 또 그가 주연을 맡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이번 영화의 역할이 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예민하고 감정적인 성격과 배경까지 비슷했다. 물론, 비틀렸던 유와 다르게 이번 주인공은 좀 더 정의롭고, 유쾌한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스스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선택이 그의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단 소리였다.

그리고 더 다양한 레퍼토리에 도전해보고 싶은 도현의 욕망을 충족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상담을 잘해 주는 이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도현의 고민을 듣던 진이 말했다.

“일단 그 감독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는 게 어때? 만나고 나서 정해도 되잖아. 내 생각에는 모든 걸 충분히 고려하고 결정해야 네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왜? 당연히 영화 주인공이 좋은 거 아니야? 애초에 그걸 왜 고민하는 거야?”

니콜라스가 이해할 수 없단 듯이 말했다. 진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며 타박했지만, 도현은 니콜라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다 니키같이 생각하겠지.’

이렇게 계속 고민만 하고 있다간 영원히 결정을 못 할 것 같았다.

도현은 진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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