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로미오와 줄리엣 (9)
윌리엄 데이비스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로스앤젤레스 베버리힐즈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매독스에게 듣기로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매니저가 있었다면 동행했겠지만, 도현은 아직 매니저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혜나와 함께 왔다.
매독스가 동행을 제안하는 호의를 보여 도현은 조금 놀랐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어디까지나 그는 에이전트지, 도현의 매니저가 아닌 탓이었다.
“뉴욕스트립으로 주시오.”
윌리엄이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메뉴판을 보고 고민하던 도현과 서혜나에게 윌리엄이 말했다.
“여기는 스테이크 종류가 맛있단다.”
“자주 오는 레스토랑인가요?”
“며칠 전에도 왔지.”
두 사람은 윌리엄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테이크를 시켰다.
웨이터가 떠나고, 잠시 잔잔한 연주 소리만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세련되게 차려입고 조용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도현은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톤 다운된 회색 정장에 푸른색 와이셔츠, 그리고 하얀색 도트 무늬가 그려진 넥타이. 특징이라고 할 법한 건, 살짝 벗겨져 드러난 이마가 전부였다.
“조금… 놀랍군.”
“뭐가요?”
“난 을 세 번 정도 봤거든. 배역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서 놀라는 중이지.”
엄격할 것 같은 외양과 다르게 그는 꽤 유쾌한 투로 말했다.
“그래, 대본은 읽어봤나?”
“네. 아주 재밌던데요. 그리고 왜 감독님이 저를 이 역할에 고려했는지도 알 것 같았고요.”
제 앞에 놓인 화이트와인을 한 모금 마신 윌리엄이 말했다.
“위니는 유랑 닮은 구석이 있지.”
위니는 이 영화 주인공의 별명이었다.
“나는 자네가 이 역할을 잘해 내리라고 생각하네. 지금 실제로 만나고 더욱 확신했지. 어때, 하고 싶은 마음은?”
도현은 대답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주문한 메뉴가 나오는 바람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웨이터가 다시 사라지고 나서야 도현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떤 대답이 적당한지 몰라요. 그래도 제 의견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잘 모르겠어요.”
도현의 대답은 그에게 상당히 의외였던 것 같았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건 아주 좋은 기회야.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해 보지.”
스테이크를 썰고 한 점 먹던 윌리엄이 서혜나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제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따를 뿐이죠.”
그가 바랐던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헛기침한 윌리엄이 도현에게 고민 중인 이유를 물었다.
“감독님이 저를 위니 역으로 고려한 거랑 같은 이유죠. 전작의 역할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이런! 그런 이유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야! 그리고, 비슷하지만 절대 같지 않지. 대본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말이다.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아주 다른 배역이 될 거야.”
그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도현이 이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들어봐. 완전히 다른 역할을 다르게 연기하는 건 쉽지. 그러나 진정한 배우라면 한 끗 차이에서부터 달라질 수 있어야 해. 비슷해서 걱정이라면, 자네가 위니에게서 유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독창적이고 뛰어난 연기를 하면 되는 거지.”
묘하게 궤변 같으면서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연기에 욕심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비슷한 이미지라고 지레 피하고 도망가는 건, 너무 쉬운 길만 가려 하는 거와 다를 바 없지.”
완전히 상식을 뒤집은 사고였다.
보통 고착된 이미지 역할만 찾아서 연기하는 걸 쉬운 길로 간다고 하지, 반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서혜나는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떫은 표정을 애써 숨기며 듣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윌리엄의 말은 도현에게 꽤 효과적이었다.
도현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도전욕과 승부욕을 윌리엄이 건드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의 말대로, 그건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았다.
윌리엄의 말에 넘어가는 거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유쾌해질 정도였다.
도현은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성은 영화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감정까지 그쪽을 향하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탁.
차에 올라탄 도현이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서혜나가 운전용 선글라스를 끼는 것을 보던 도현이 말했다.
“저 매독스랑 통화 좀 할게요.”
“그렇게 하렴.”
도현은 곧장 매독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매독스 워커입니다.
“좋은 오후예요, 매독스.”
- 미스터 리.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스 감독님과 만남은 어땠습니까?
마음을 정했는지 돌려 묻는 것이었다. 도현이 옅게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영화 하기로 했어요.”
- …오, 정말인가요?
“네. 감독님한테도 이미 말했고요.”
- 좋은 선택을 하셨군요.
매독스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 묻은 기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에이전트 입장에서는 드라마 조연보다는 영화 주연이 매력적인 탓이었다.
“매독스 덕분이죠. 좋은 대본을 가져와 줘서 고마워요.”
도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도…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그럼 오디션은 지원을 취소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네.”
도현은 목소리에서 미련이 드러나지 않았길 바랐다.
물론 아직 아쉬운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아쉬워하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도현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 * *
“오랜만에 보네!”
“그러게요.”
도현의 맞은편에서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잘생긴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면 한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매독스와 전화를 끊은 도현은 곧장 에드워드와 맥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전화가 온 건 맥일 거라고 생각했던 도현의 예상과 다르게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와 통화를 하던 도현은 그도 지금 베버리힐즈 주변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집은 베버리힐즈에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베버리힐즈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으니 에드워드가 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휴일을 맞아 장을 보고 있었던 에드워드는 도현의 문자를 보고 곧장 전화를 걸었고-.
도현이 베버리힐즈에 와 있다는 걸 듣고는 차를 끌고 근처 카페로 온 것이다.
서혜나는 에드워드 같은 할리우드 스타가 마트에서 장을 본다는 게 신기한 기색이었다.
“저녁거리를 산 거예요?”
“응, 라자냐를 만들 생각이었거든. 대접하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저녁을 먹은 것 같네.”
“요리를 좋아하나 봐요?”
할리우드 스타의 평범한 일상에 호기심을 느낀 서혜나가 물었다. 에드워드가 웃으며 답했다.
“요리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걸 즐기는 편이죠. 물론 솜씨가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요.”
오랜만에 만난 에드워드는 여전히 밝고 유쾌했다. 잘생긴 얼굴에 거만함 없이 호의로 반짝이는 청록색 눈동자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일찍 주연을 또 맡게 될 줄은 몰랐어. 멋진데.”
“아직 촬영은 시작도 안 했는걸요….”
도현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컨택을 받아 출연하게 된 거라 칭찬을 들으니 어색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축하할 일이지. 역시, 너는 배우가 될 운명인가 봐. 처음부터 연달아 영화의 주연을 맡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
에드워드가 띄워 주자 도현은 상당히 부끄러워졌다.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스타 앞에서 주름잡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볼을 옅게 물들인 도현을 서혜나가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잠깐 근황에 대한 잡담을 떠들었다. 에드워드는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나 지금 휴가를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쉬지 않을까 싶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드워드는 베니스 때부터 쉬지 않고 촬영을 이어온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네 영화에 관해서 얘기해야지. 지금 두 번째 영화인 거 맞지?”
“네, 맞아요.”
“부담이 많이 되겠는걸. 게다가 넌 데뷔작으로 주목도 많이 받았으니까 말이야.”
에드워드는 도현이 겪은 걸 이미 경험해봐서 그런지, 도현의 심정을 잘 공감해 주었다.
도현은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어땠어요? 두 번째 영화 촬영 때 말이에요.”
“내 두 번째 영화 촬영? 음….”
에드워드가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귀족적인 외모 탓에 그조차도 근심에 찬 모습으로 보였다.
“그땐 참 파란만장했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거야. 그때가 내가 스무 살 초반이었을 때였는데… 막 할리우드 드림을 가지고 상경한 어리버리한 애였지.”
“저처럼요?”
“무슨 소리야? 너는 야무진 편이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데, 그때 나보다 네가 더 침착하게 해 나가고 있어.”
에드워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음… 그래요, 계속 얘기해 주세요.”
칭찬에 별로 면역이 없는 도현이 화제를 돌렸다. 에드워드는 그걸 눈치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도현의 의도대로 하던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 나는 아주 의욕이 넘치고 용기 있었지.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보고 다녔거든. 한 여덟 번쯤 탈락 소식을 들었을 때였나… 한 영화의 주인공 오디션에 합격했어. 합격 소식을 듣고 바로 샴페인을 터트리며 파티를 벌였지.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
말투가 오묘한 게, 좋게 끝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현은 뒤에 나올 이야기의 결말을 대충 예상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해준 얘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어. 제작사도, 감독도, 극작가도, 배우도 모두 캐스팅이 완료된 상태였지. 모두가 나한테 성공할 일만 남았다고 말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어느 날 주말이었어. 감독이 자기 딸이랑 놀고 있었는데, 딸이 이렇게 말한 거야. 아빠, 난 이 영화가 싫어요!”
에드워드가 도현과 눈을 마주치고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설마….”
“맞아. 감독이 다음 날 그만두겠다고 에이전트에게 연락했지. 자기 딸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면서 말이야! 내 에이전트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는 그대로 정말 그만뒀어! 세상에, 그때 에이전트 표정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네.”
에드워드가 진심으로 웃긴지, 웃음기 그득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황당한 이유가 또 있을까?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도현이 물었다.
“그, 그 후로 어떻게 됐어요?”
“제작사에서는 새로운 감독을 찾으려고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결국엔 영화가 엎어지기 직전까지 갔지.”
말뜻을 바로 이해한 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엎어지진 않았단 소리네요?”
“눈치가 빠른걸? 맞아, 다행히 새로운 감독을 구할 수 있었지.”
“그럼 그 영화를 찍은 건가요?”
“그렇게 쉽게 풀리면 좋았겠지만.”
에드워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새로 온 감독이, 내가 주연 자리에 충분히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 내가 너무 상류층처럼 생겼다면서 제작사에 주인공 교체를 요구했지.”
도현과 서혜나는 그럼 교체된 거냐고 쉽사리 묻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들이 속으로 삼킨 물음을 눈치챘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 영화를 찍었으니까. 내가 그 역할에 어울린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일주일 동안 노숙한 후에 감독을 찾아갔거든. 결국 감독은 날 인정했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 감독은 나를 굉장히 좋아하지. 너도 만난 적 있을걸?”
“제가요?”
“응. 바네사 올슨, 기억나?”
도현의 눈이 커졌다.
바네사 올슨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만난 의 감독이었다!
서혜나가 감탄사를 흘렸다.
“세상에,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서혜나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굉장해요, 에드워드!”
“하하하, 참 시작 전부터 다사다난하긴 했지.”
에드워드는 웃으며 가볍게 말했지만, 분명 그 당시에 그는 힘들고 속상했을 터였다.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훌륭하게 이겨낸 덕분이었다.
도현은 다시 한번 에드워드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솔직히, 그동안 도현에게 에드워드 이미지는 ‘할리우드 스타’ 그 자체였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와 플래시 세례 속에서 등장한 첫 만남이 너무 인상에 깊게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도현은 에드워드가 그 ‘할리우드 스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넘어왔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듣기에 굉장히 황당하겠지만, 사실 이런 일들은 꽤 자주 일어나. 사실 나는 행운아인 편이지. 영화가 엎어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야. 물론 어린 딸이 싫다고 해서 엎어질 뻔한 건 흔치 않은 경우긴 하지만….”
“음, 그 아이가 조금 원망스러웠겠어요.”
“그땐 그랬지. 하지만 어쩌겠어. 어린애를 원망하는 건 너무 볼품없잖아.”
도현은 만약 자신이 에드워드 같은 상황이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에드워드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긴 어려울 것 같은데.’
정말 그랬다.
적어도 에드워드처럼 쿨하게 넘기진 못할 것 같았다. 도현은 아직 자신이 에드워드만큼 성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나길 그만큼 배포가 크지 않은 건지 잠깐 고민했다.
도현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에드워드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주자면, 몇 년 후에 파티에서 그 애를 만났어. 사실 난 그때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 애가 내게 다가오더라고. 놀랍게도- 그 애는 내 팬이 되었더라. 내게 사인을 받아 갔거든!”
어메이징 할리우드.
계속된 황당한 이야기에 도현은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서혜나도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에드워드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저녁을 먹어야 함을 깨달은 서혜나가 먼저 가 봐야겠다는 말을 꺼냈고 그로써 짧은 만남이 끝이 났다.
집에 돌아온 도현은 에드워드와 한 얘기를 곱씹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생각해도, 그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이야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