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로미오와 줄리엣 (10)
메리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도현은 자신이 줄곧 병원에서 살았던 것을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엄청난 친근감을 느낀 것도, 모든 걸 이야기하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성적인 사고 후에 이 사실에 대해서 이미 서혜나가 이야기를 했을 거라 판단했을 뿐이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아득바득 숨기려 들면, 누구든지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어차피 숨기고 싶었던 건 형과 관련된 기억들이지, 제 과거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부담스럽지 않게 마주쳐 오는 눈과 살짝 그에게로 쏠린 몸,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에 도현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를 누군가에게 스스로 밝힌 건 처음이라는 것을.
메리는 소년의 말을 도중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며 조용히 경청했다.
도현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길 털어놓다가, 어느 순간 홀린 듯이 예정해놓지 않았던 사실까지 이야기해 버렸다.
그건 반쯤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아무도 내 옆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말을 한 도현은 한 박자 늦게 실수했단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도현의 모든 언어적 행동과 비언어적 행동에 집중하고 있던 메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메리는 이 성숙하고 영리한 소년이 순간적으로 드러낸 틈을 파고들었다. 이때가 아니라면 다시 기회가 오는 시기는 상당히 먼 미래라는 직감이 들었다.
“괜찮아. 좀 더 이야기해 줄래?”
도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메리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듣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아니면 나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난 도현이 너한테 아무런 오해도 하지 않을 거야. 네 말을 분석하려 들지 않을 거고, 그냥 듣기만 하겠다고 약속할게.”
그녀는 도현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존중하겠단 의지를 보였으나,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메리는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며 언제든 말하고 싶을 때 얘기해 달라고 했다.
자세한 이야긴 듣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된 생각을 털어놓았단 것만으로도 큰 진척이었다.
그 사실에 집중하느라 메리는 보지 못했다.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 짧게 스쳐 지나간 회의감을.
도현이 제 앞에 놓인 허브티를 마시며 표정을 숨겼다.
메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단지 상담사라서가 아니었다. 세 번의 만남은 그냥 사람 자체로도 좋은 사람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유능한 상담사라고 해도, 자신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날 싫어했다고?
부모님도, 의사도, 간호사도, 간병인도, 하다못해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도현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이었지만, 메리에게는 다르게 들릴 게 뻔했다.
그녀의 치료 일지에 ‘자존감이 낮고 우울증이 심해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음. 대인 기피증도 의심됨.’이라고 적히겠지.
탁.
도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삼켰다.
이 상담이 내게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왕 시작한 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때때로 튀어나오는 회의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현은 속내를 능숙하게 숨기며 메리를 마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 * *
다비드는 생각보다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역할이 아주 적절했다는 말이 알맞을지도 몰랐다.
로미오는 엄청난 사랑꾼이자 로맨티스트였는데, 다비드도 그런 기질이 있었다.
게다가 아직 어리지만 잘생긴 태가 조금씩 나는 외모와 진한 초콜릿 같은 고동색 눈동자는 어딘가 감성적인 느낌이 있어서, 로맨스의 남주인공 역할로 아주 잘 어울렸다.
결과적으로, 일상을 연기하는 것에 가까운 수준이니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그 연기력이 돋보였다.
그건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도현의 연기력이 뛰어난 건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했는데, 다른 아이들이 도현의 옆에서 연기할 때면 유독 어색하고 튀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도현은 아직 주변 사람들까지 극에 어우러지도록 만드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 도현과 가장 많이 마주치는, 그것도 상대 역할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낸다는 건 행운이었다.
오늘도 도현과 다비드는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능숙하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진이었다.
“나를 연인이라고만 불러주세요. 나는 이제부터 영원히 로미오가 아닙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몸을 숨기고 제 비밀을 엿듣는 당신은 누구시죠?”
여러 번 맞춰본 연기는 생각보다 술술 넘어갔다.
줄리엣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로미오가 말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 축복받은 달을 두고 맹세할게요.”
도현이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나왔다. 방금까진 로미오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관객석을 보는 듯한 몸짓이었다.
지금부터 할 것은 방백이었다.
방백은 배우가 무대에서 혼자서 말하는 것으로, 독백과 달리 곁에 사람을 두고도 홀로 말한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방백을 듣지 못하고 오로지 관객만이 들을 수 있다.
일종의 연극적인 약속인 셈이었다.
사랑을 속삭이던 수줍은 얼굴에 짙은 불신과 회의감, 그리고 미약한 비웃음이 깃들었다.
“달님은 변덕스럽지!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계속 모양새를 바꿔가며 빙빙 도는걸. 꼭 그의 사랑과 닮았어!”
도현이 대사를 하는 동안 다비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사람이 방백을 듣지 못하는 척하는 건 방백의 효과를 증대시켰다.
“그는 알고 있을까? 그에게 불과 얼마 전까지 로절라인이라는 연인이 있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사랑이란 참 우습구나. 거짓된 맹세라도 받고 싶지 않을 정도야.”
나중에 무대가 좀 더 준비된다면 도현이 방백을 할 때 그의 주위만 불빛을 비추거나 음악을 멈추는 식으로 연극적 효과가 들어갈 것이다.
대사를 모두 읊은 도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비드에게 사뿐사뿐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다비드는 얼음 상태에서 깨지듯이 과장되게 몸을 움직여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능청스럽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로미오를 보고 부드러이 말했다.
“아니요, 맹세는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을 만나 기쁘긴 하지만 오늘 밤 이런 서약은 기쁘지 않아요. 너무 성급하고 무모하고 갑작스럽죠.”
이윽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장면이 끝이 났다.
짝짝짝!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진이 박수쳤다. 도현이 종종걸음으로 진에게 다가갔다.
“어땠어?”
“저번보다 훨씬 자연스러웠어! 완벽해!”
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도현은 퍽 성에 차지 않은 기색이었다.
방백은 관객들에게 무대 위 사람의 반응이 결핍됨을 분명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방금 다비드가 휴지 상태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도현은 좀 더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어, 더욱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음조의 변화만으로도 그게 일상적 대사와 다르단 걸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몇 번 허공을 보고 홀로 대사를 외치던 도현이 다비드를 돌아보았다.
“다비드, 한 번 더 맞춰볼래?”
“또?”
잠깐 질린 표정을 짓던 다비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요즘 연기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었다. 특히 도현과 연기할 때면 극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무척이나 재밌었다.
다비드는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 그때 느낀 감각과 묘하게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정도?
“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감독인 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든든한 두 배우를 지켜보았다.
* * *
축제 날이 가까워지자, 해리 반은 반 부스 준비로 바빠졌다.
도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 시간엔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엔 친구들과 놀면서도, 점심시간엔 반 부스 준비를 돕고 틈틈이 연극 준비를 하는 동시에 영화 대본을 분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축제가 있다고 해서 수업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라, 과제와 쪽지 테스트도 상시 있었다.
도현은 그 바쁜 와중에도 모든 과제와 테스트를 완벽하게 해내어서 모두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만약 도현이 짬을 내어 실력이 녹슬지 않게 바이올린 연습도 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 첫날이 밝았다.
도현은 본래 옷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으나,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엄마와 함께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쯤은 무의식중에 스며든 것이고 반쯤은 의도적인 일이었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다 보니 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진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처럼 패션계로 가고 싶을 만큼 흥미를 느낀 건 아니었다. 평소 옷을 입을 때 조금씩 신경 쓰기 시작한 정도였다.
도현은 캐주얼한 검은색 반바지에 그래피티 아트처럼 스프레이 페인트로 글자가 쓰인 살짝 도톰한 흰 맨투맨을 입었다. 살짝 큰 사이즈가 넉넉하게 몸을 감쌌다.
도현의 착장을 보던 서혜나가 신발에 포인트를 주자면서 초록색 하이캔버스를 가져왔다.
참고로 도현은 캔버스화가 색깔별로 있었다. 편안하고 이곳저곳 잘 어울려서 자주 신다 보니, 도현이 캔버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서혜나가 깔별로 사다 놓았다.
“잘 놀다 와.”
평소처럼 도현을 학교에 데려다준 서혜나가 선글라스를 살짝 들고는 인사했다. 눈에는 약간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델마 아카데미 축제에는 부모님들이 많이 왔는데, 서혜나는 축제가 진행되는 삼 일 내리 오기는 어려워서 도현의 공연이 있는 마지막 날에 오기로 했다.
“네, 집에 가서 어땠는지 얘기해 드릴게요.”
“그래. 꼭 이야기해 줘야 해!”
도현의 말에 아쉬움을 접은 서혜나가 한번 웃고는, 차를 몰고 멀어졌다.
도현은 차를 배웅하고는 반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아이들이 도현을 반겨주었다.
오늘은 도현의 반이 부스를 운영하는 날이 아니었다.
고로, 도현은 아이들과 뭉쳐서 이곳저곳을 놀러 다녔다.
처음에는 여덟 정도 되는 아이들과 다녔는데, 각자 가고 싶은 부스에 가다 보니 나중엔 넷으로 줄었다. 그리고 넷이서 간 부스에서 재키를 만났다.
재키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쩌다 보니, 최근 자주 뭉쳐 다니던 각본 팀 멤버가 다 모였다.
부스 체험을 위해 돌아다니던 도현은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바로 자신이, 의외로 아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부스 체험을 하러 반에 들어가면 꼭 한 명씩은 도현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작년에 같은 반인 친구도 있었고, 2HV 활동으로 친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니콜라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부스에 들어간 도현의 어깨를 누군가가 불시에 잡았다.
깜짝 놀란 도현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주근깨가 콕콕 박힌 광대를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안녕!”
“앨리슨! 여기가 앨리슨 반인가 봐요?”
도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맞아! 아이스크림 만들기 체험하러 왔니? 내가 다 먹어봤는데, 우유 아이스크림이 제일 나아. 아니면 초콜릿이나.”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앨리슨이 비밀 이야기를 해주듯 목소릴 낮췄다.
“과일은 너무 시더라고! 그리고 보관을 잘못해서 사실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중요한 이야기였다. 도현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는데, 한 소녀가 반가운 낯으로 다가왔다.
“어? 너는 백작님이잖아!”
도현은 금방 그녀를 떠올렸다. 할로윈 파티 때 음식 테이블 앞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릴리.”
“날 기억하고 있네?”
도현이 기억할 줄 몰랐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이 토끼 같았다.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할로윈 파티에서 통성명도 했잖아요.”
“와! 백작님이 날 기억하다니!”
릴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릴리는 무슨 아이스크림을 만들 거냐고 물어보더니,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라고 답하자 초콜릿을 왕창 주겠다고 말하며 재료를 가지러 갔다.
“뭐야, 너 아는 사람 많네?”
다비드가 의외란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성격도 차분하고 뭔가 또래 아이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겨서, 친한 몇몇하고만 대화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실제로도 그동안 봐온 결과 선을 긋는 타입 같았다.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현도 신기했던 탓이었다.
“그러게. 왜 많지?”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다비드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딴지를 걸었다. 도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