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56)화 (157/582)

제156화. 로미오와 줄리엣 (11)

막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만든 도현이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렸다. 릴리가 초콜릿을 왕창 준 덕에 촘촘히 박힌 초코칩들이 달았다.

부스를 돌아다니면서 놀고 나서, 점심시간에는 강당에 모였다.

할로윈 때처럼, 강당에 뷔페가 차려져 있었다.

델마 아카데미는 시설과 선생님이 모두 훌륭했지만, 특히 축제 같은 행사를 할 때 장점이 더욱 도드라졌다. 부유한 사립학교다 보니, 초등학교 축제 음식도 하나같이 탐스럽고 맛있어 보였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공연 관람 시간이 있었다.

오늘은 1학년과 4학년이 공연을 했는데, 1학년이 준비한 율동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좋은 호응을 받았다.

신나게 놀다 보니 축제의 첫 번째 날이 지나갔다.

* * *

두 번째 날은 첫 번째 날과 좀 다르게 흘러갔다. 다음 날 있을 연극 준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3학년 연극 팀이 연극 무대로 배정받은 공간은 시청각실이었다.

시청각실은 무대처럼 튀어나온 공간이 있고 영화관처럼 넓고 폭신한 의자가 있어서, 연극 무대로 쓰기에 제격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이 있어 화면을 띄워 무대 배경으로 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얘들아, 옷이 도착했어!”

해리가 커다란 상자를 가져오며 말했다.

내일 연극을 위해 미리 주문해 놓았던 분장용 옷들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아, 도현아.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렴.”

“그럴게요.”

처음, 도현은 분장용 옷을 대여해주는 가게에서 빌리고자 했다.

그러나 도현에게 이 이야길 들은 서혜나가 의욕에 불타올라, 아이들에게 맞춤옷을 제작해 주었다. 제 아들이 연극을 하는데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아이들 치수를 참고해서 새로 제작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지만, 다행히 연극 전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해리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현을 보며 뒷목을 긁적였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부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학교 축제 연극에서 브랜드 협찬을 받는 건 그에게도 참 신선한 경험이었다.

‘보통 그렇게까지는 안 하니까….’

조금 남다른 서혜나의 아들 사랑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 차올랐다. 너나 할 것 없이 상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해리는 아이들에게 옷이 상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여러 번 당부하고 나서야 상자를 열어주었다.

도현은 ‘줄리엣 역’이라고 써진 검은 봉투를 열어 제 옷을 펼쳐보았다.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방향으로 가자고 결정했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은 고딕 말기에서 르네상스 초기로 설정했다. 따라서, 패션도 16세기 초 유행을 참고했다.

도현의 옷은 붉은색 드레스였다.

당시 유행대로 브이 네크라인이 파져서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고, 치마가 시작하는 지점이 가슴 밑부분으로 상당히 높은 하이웨스트 디자인이었다.

16세기 초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행했던 거대하게 부풀린 치마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전체적인 실루엣은 슬림했다.

도현은 그 점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안에 파딩게일을 이용해 치마를 크게 부풀린 형태의 드레스는 정말 불편하게 생겼으니까.

“으악! 이게 뭐야!”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다비드가 레깅스를 들고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비단 다비드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유행했던 여성 복식이 도현의 드레스와 같았다면, 남성 복식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땐 발레리노 복장과 비슷했다.

상의는 몸에 딱 맞는 푸르푸앵이라는 재킷이었고, 하의는 호즈-스타킹-를 입었다.

도현이 엄마에게 듣기론, 딱 이 시대에 푸르푸앵이 짧아져서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땐 조금 민망한 복식이 되었다고 했다.

급소인 신체 부위를 지키는 동시에, 당시 호즈가 양쪽이 따로 만들어져 밑위에 바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코드피스라는 샅주머니를 사용했다고.

그러나 아이들의 옷은 다행히도 평범한 흰색 레깅스에 당시 트렁킨 호즈라고 불린 부풀린 바지가 있었다.

도현이 못 볼 걸 본 표정을 짓는 니콜라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 봐. 트렁킨 호즈를 입으니까 그냥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입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있는 척 말해봤자 호박 바지잖아!”

“…….”

도현이 니콜라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랬다.

트렁킨 호즈는 부풀렸다가 무릎 위에서 오므라드는 형태로, 쉽게 말하자면 호박 바지였다.

“나보고 호박 바지를 입으라고?”

“입, 어보면 괜찮을 수도 있어.”

“…너 지금 웃음 참았지?”

도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느스름하게 눈을 좁힌 니콜라스가 도현을 노려보았다.

도현이 결백한 얼굴로 말했다.

“절대 내 옷이 더 낫다는 생각은 안 했어.”

“그래… 야!”

뒤늦게 도현이 놀린 걸 깨달은 니콜라스가 도현의 양어깨를 붙잡고 짤짤 털었다.

도현은 가게 앞에서 흔들리는 에어 풍선처럼 흔들리면서 아까부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니콜라스가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데, 해리가 아이들의 주의를 모으며 말했다.

“자! 얘들아! 이왕 옷이 왔으니까, 입어보고 마지막 리허설을 해볼까?”

도현의 어깨를 쥐었던 니콜라스의 팔이 뚝 떨어졌고, 철천지원수라도 보듯이 옷을 노려보던 다비드가 창백한 얼굴로 해리를 보았다.

“정상적인 바지 입으면 안 돼요? 이건 너무… 웃기잖아요!”

“웃기다니! 귀엽기만 한데.”

어른인 해리의 눈에는 호박 바지를 입은 3학년 아이들이 귀여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다비드의 반항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도현은 절망하는 두 사람을 보며 조금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도현이 줄리엣 분장을 한다는 것을 가지고 종종 놀렸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아이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재키가 도현의 옆에 다가왔다. 줄리엣의 어머니, 즉 캐플릿 부인 역할을 맡은 재키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주인공인 줄리엣을 도현이 맡은 영향인지, 아이들은 성별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배역을 선택했다. 재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편하다!”

재키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도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안에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일까.

‘좀 많이 긴 윗도리를 입은 것 같다’가 감상의 전부였다. 건조한 감상이었다.

“자, 도현아. 넌 이것도 써야지.”

해리가 내민 건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트려진 통가발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줄리엣은 긴 머리카락이 맞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도 줄리엣을 긴 머리카락으로 등장시켰고.

‘이왕 16세기 복식에 맞췄으니 끝까지 완벽하게 시대 반영을 하는 편이 낫지.’

도현이 순순히 가발을 받고는 제 머리에 써보았다. 처음 써보는 거라 잠시 헤맸는데, 해리가 도와주어 제대로 쓸 수 있었다.

“와….”

막 유모 역할 옷을 입고 나온 진이 도현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내 예상보다… 훨씬 예쁘잖아!”

진의 말대로였다.

눈처럼 흰 피부에 붉은색 드레스와 검은 머리카락은 묘하게 조화로웠다.

본래 ‘줄리엣’ 하면 떠오르는 청순가련한 이미지와는 좀 달랐지만… 살짝 서늘한 인상이 프라이드 높은 어디 귀족 집 아가씨 같았다.

뭔가 도현의 주변만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저곳만 파티장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은 도현의 눈이 깜빡이며, 긴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졌다가 올라가는 것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진이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다가,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외쳤다.

“세상에… 순간 반할 뻔했어!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로미오가 왜 하루 만에 청혼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예쁠 수가 있어? 응? 도리야, 말해봐!”

진은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옆에서 온갖 찬양과 주접을 늘어놓는 진에게서 도현은 익숙한 엄마의 향기를 맡았다.

진의 청혼 발언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 다비드가 제 옷을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고 뛰쳐나왔다.

“네, 네가 더 예뻐!”

물론 다비드도 눈이 달렸으니 도현에게 줄리엣 분장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다비드가 보기엔 진이 훨씬 더 예뻤다.

도현처럼 완전히 붉은 드레스는 아니지만, 붉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드레스에 마찬가지로 붉은색 두건을 쓴 진은 객관적으로도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태양 같은 금발과 붉은색 두건의 색 조합이 무척 화려하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와서, 중요한 얘기라도 하는 듯 비장하게 말하는 다비드에 진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도리보다 예쁜 애가 어떻게 존재하겠어!”

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다비드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네가 더 예뻐 보이는데.”

목소리는 조금 떨렸으나 눈빛은 거짓 한 점 없다는 듯이 또렷했다.

진의 얼굴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붉어졌다. 두 꼬마가 얼굴을 붉힌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엑! 내 손!”

멀리서 니콜라스가 괴로워하는 소리에 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 고마워.”

간신히 대답한 진이 삐꺽대는 몸을 움직여 다비드에게서 멀어졌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다비드에게서 등을 돌린 진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다비드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모르는 애가 없을 정도로 티를 내고 다녔다.

좀 불편하긴 했어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 날 좋아하는 건, 사실 멋진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뻔뻔한 성격이어도 이런 상황에는 면역이 없었다.

‘귀여운 것들.’

한창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는 해리가 아이들의 풋풋한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은 좋은 것이었다.

* * *

리허설은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춰보는 건 여러 번 해보았는데도, 막상 복장까지 다 챙겨 입고 연기하니 느낌이 색달랐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몇 배는 집중해서 실력을 발휘했고, 자잘한 몇 가지 실수를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 있는 연극을 해냈다.

스크린에 띄운 화면은 해리가 타이밍에 맞춰서 변경했는데, 진이 몇 날 며칠 딱 맞는 사진을 찾은 보람이 있는지 꽤 그럴듯해 보였다.

리허설이 끝나고 아이들은 옷을 도로 갈아입었다. 레깅스를 벗은 다비드와 니콜라스는 행복해했다.

‘둘이 다투지만 않으면 잘 맞을 텐데.’

도현은 두 사람이 들었다면 진저리쳤을 생각을 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은 강당으로 갔다.

강당에는 어제와는 다른 메뉴가 휘황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방금까지 리허설을 해서 잔뜩 배가 고팠던 아이들이 신이 나서 음식을 담았다.

그때였다.

“너희도 연극 한다며?”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 릴리?”

“안녕, 백작님.”

릴리가 방긋 웃었다. 옆에는 앨리슨도 있었다.

“저번에 초콜릿 고마웠어요.”

“특별히 맛있는 초콜릿만 많이 준 거야! 그리고 나한테 친근하게 말하지 마. 난 지금 선전 포고하러 온 거란 말이야.”

“네?”

갑작스런 말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앨리슨이 특유의 쏘아붙이듯 독특한 어투로 말했다.

“너희 이번 축제에서 연극 한다며? 사실 오늘 우리도 연극을 골랐거든! 오, 그런데 그 사실 아니? 같은 종목은 한 팀만 상을 준다는 거 말이야!”

“그 상, 우리가 받을 거야. 우리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

앨리슨의 말을 이어받아 릴리가 말했다.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올라가 있었다.

“물론 백작님 연기가 뛰어난 건 알지만, 연극은 다 같이 하는 거잖아?”

릴리는 자신이 있었다.

‘멈춰버린 백작의 성’의 체험자이자 열렬한 백작님 팬으로서 도현의 대단함을 인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들은 5학년이고 이들은 3학년이었다.

전체적인 퀄리티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같은 종목이라면 더욱 두드러질 터였다.

“우리도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 아마 우리 팀이 이길걸?”

진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진과 릴리가 눈싸움을 했다. 도현은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는데, 두 사람 다 장난스러운 기운이 있었던 탓이었다.

“좋아. 그럼 내기하자. 이긴 사람이 맛있는 걸 사다 주는 걸로!”

“좋아!”

갑작스러운 내기가 성립되었다.

도현은 재밌는 이벤트 정도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저기… 얘들아?”

도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불렀다.

3학년 연극 팀은 현재, 5학년이 공연 중인 연극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진이 연극 팀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교묘하게 내기에 대해서 말하며 아이들의 승부욕을 불태운 결과였다.

“내일 꼭 저것보다 잘하고 말겠어!”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진심인 진이 불타올랐다.

휙!

공연을 보던 진이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도리야! 내일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연기해야 해! 난 너만 믿고 있어!”

“으, 응….”

도현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진이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두드렸다.

‘열심히 해야겠다….’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든 도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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