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로미오와 줄리엣 (13)
“도현아, 이 옷 어때?”
도현은 신이 나서 이 옷 저 옷을 가져와 도현의 앞에 대보는 서혜나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축제가 진행되는 이틀 동안, 서혜나는 도현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드디어 오늘.
그 아쉬움을 풀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서혜나는 은근슬쩍, 도현과 시밀러 룩으로 사두었던 옷을 추천했다.
한창 도현을 임신했을 때, 아이가 태어나면 셋이서 옷을 맞춰 입고 놀러가는 걸 꿈꿨었다. 여유를 되찾고 달라진 일상에 익숙해지자 잊고 있었던 소망을 떠올린 서혜나는 지체 없이 시밀러 룩을 구매했다.
서혜나가 기대에 찬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별생각 없이 엄마가 추천한 옷을 입었다.
패션 브랜드 대표라는 직함에 걸맞게, 서혜나의 패션 감각은 뛰어나서 추천하는 대로 입으면 항상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옷을 입고 나온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엄마 옷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서혜나는 맵시 좋은 데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도현이 입은 데님 재킷과 질감과 색감이 똑같아 보였다.
“도현아, 준비 다 했으면 갈까?”
“네.”
뭐, 옷이 비슷하면 어떤가.
도현은 금방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소소한 소원 성취를 해낸 서혜나가 작게 주먹을 쥐었다.
이따 같이 사진을 찍고 남편에게 보내 자랑할 생각으로 가득 차 싱글벙글 웃었다.
‘사진 받고 또 혼자 시무룩하겠지?’
이제는 완전히 생활에 적응하다 못해, 상황을 이용해서 남편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서혜나였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맣게 모를 도현이 차에 올라탔다.
“어?”
도현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아니면 공연 때문인지, 니콜라스의 가족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니콜라스의 어머니가 와 계셔서 깜짝 놀랐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변호사로, 듣기로 대형 로펌에 소속되어 있으며 상당히 잘나간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바빠서 니콜라스의 집에 종종 놀러 가는 도현조차 딱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그때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상당히 다정한 성격이었던 것이 인상에 남았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니콜라스의 어머니, 엠버도 도현을 보았는지 반가운 낯을 했다. 이어서 도현의 옆에 있는 서혜나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엠버 가비예요. 그동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기쁘네요.”
“니콜라스 어머니시군요! 반가워요, 서혜나예요. 혜나라고 부르시거나, 발음이 힘들면 나나라고 불러주세요.”
“혜나. 확실히, 발음이 좀 어렵긴 하네요. 그래도 무척 예쁜 이름이에요.”
엠버는 드물게도 서혜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미국인이었다. 그에 서혜나는 좀 더 호감을 느낀 것 같았다.
엠버의 옆에는 나르샤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니콜라스랑 투덕거리고 있어서 도현은 작게 웃었다.
“도오리! 니키!”
포니테일로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진이 발랄하게 뛰어왔다. 그 옆에는 밝은 하늘 아래서 진처럼 화사한 금발을 자랑하는 밀턴도 함께였다.
밀턴과 엠버는 친분이 있었는지 익숙하게 안부 인사를 나눴다.
어른들끼리 대화하는 사이, 아이들은 오늘 있을 연극에 관해서 떠들었다.
“벌써 오늘이라니…!”
살짝 볼을 붉히며 말하는 진에 도현은 긴장한 거라고 오해했다.
“열심히 했으니 잘될 거….”
“5학년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때가 온 거야!”
진이 눈을 번뜩 빛냈다.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아,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진은 격려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잠깐 제 친구를 과소평가했던 도현이 반성했다.
“도현, 너도 알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낌없이 보여줘야 해!”
진은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처럼 어색하게 웃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가볍게 웃으며 긍정하는 반응을.
“어… 도리야?”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도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은 순간 덜컥했다.
‘혹시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
도현은 대체적으로 겸손했지만, 딱 한 가지, 연기에 관한 부분에서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였다.
“응.”
잠시 아래를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진은 잠시 걱정하던 것도 잊고 까마귀의 깃털같이 검은 눈동자를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늘 바다처럼 고요하던 눈에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착각이 들었다.
곧이어, 날카로운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아주 예쁜 웃음이었는데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진은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입이 웃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하려고.”
검은 잉크로 도화지에 새기듯 선명한 목소리였다. 진을 보며 말하고 있지만, 그건 잉크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새기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열심히 할 거야. 뭐든지 말이야.”
이번엔 입꼬리도 나붓하게 올라갔다.
매섭게 튀는 것 같던 불꽃이 스러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있는 도현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 우리 내기에서 이기자.”
그 목소리는 익숙한 도현의 것이라, 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안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도현의 태도가 바뀐 게 의아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좋은 변화였다.
도현이 의욕적일수록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이 커지니까.
진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응! 그러자!”
* * *
연극은 연극이었고, 축제는 축제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팀은 점심시간 한 시간 전까지 자유였다.
모여서 리허설을 한 번 더 진행해도 되었으나, 공연 바로 전 리허설에서 실수한다면 본 공연 때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다는 해리의 지론으로 인해서 축제를 즐기게 되었다.
도중에 다비드의 엄마도 만났는데, 그녀가 진을 보고 ‘네가 우리 아들이 짝사랑하는 애구나?’라는 거대한 폭탄을 떨어트려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비드가 새빨개진 얼굴로 엄마에게 항의했고, 진은 밀턴의 지긋한 눈길을 받으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어! 저기! 저거 맛있겠다! 니키, 저거 먹으러 가자!”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노력이 가상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서혜나가 도현을 곁눈질하다가 슬쩍 떠보았다.
“우리 아들은 관심 가는 친구가 없니?”
서혜나의 질문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의도를 깨닫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초등학교 3학년.
슬슬 또래 아이들이 연애에 관심이 생길 시기이기는 했다. 반 아이들이 종종 모여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자 서혜나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제 아들의 연애사가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라도 관심이 가는 애가 생기면 엄마한테 말해줘야 해?”
“그럴게요.”
도현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했다.
도현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연애라니. 그건 도현에게 아득히 먼 이야기였다.
그런 건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저 자신만으로도 벅찬 도현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애들이잖아.’
아무리 도현의 인격이 중심이라고 해도, 도현은 형의 인격과 어느 정도 결합한 상태였다.
도현의 입장에서 또래 아이들은, 솔직히 말해서 가끔 까마득히 어린 애들로 느껴졌다.
도현이 아이들에게 화도 잘 안 내고 친절한 건 성격 탓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이 이유 때문이었다.
소란이 가라앉고.
도현은 본격적으로 엄마와 함께 축제를 쏘다녔다. 3일 동안 열리는 축제는 운동장에 푸드트럭도 와 있을 정도로 꽤 본격적이었다.
퀴즈도 풀고, 장난감 소총으로 인형 맞추기도 하고, 첫 번째 날 먹었던 아이스크림 부스에 한 번 더 가서 초콜릿 서비스를 몽땅 받아 오고, 보드 게임도 한판 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찰칵!
“우리 아들은 어떻게 어떤 각도로 찍어도 완벽하지?”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서혜나는 내내 도현의 사진을 찍었다. 전문 사진 기사도 이 정도로 열정적으로 찍지는 못할 터였다.
더욱 인상 깊은 건, 그 피사체가 된 도현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밀턴과 엠버가 존경과 괴이함이 반반 섞인 눈으로 모자를 쳐다보았다.
지난 이틀간 쌓인 한을 푸는 것처럼 사진을 잔뜩 찍고 만족스러워하는 서혜나를 보던 도현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엄마,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그렇게 됐니?”
서혜나는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도현을 붙잡지는 않았다. 이후에 있을 공연이 무척이나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점심도 따로 먹는다고 했지?”
“네.”
두 달 동안 애쓴 아이들을 위해 해리가 점심은 따로 주문했다고 했다. 분장용 옷을 입고 강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애매해서 겸사겸사 사는 것이긴 했다.
“으음, 어쩔 수 없지. 엄마는 밀턴 씨랑 엠버 씨랑 나르샤랑 같이 먹을게.”
“네, 맛있게 드시고 이따가 봐요.”
도현은 서혜나의 배웅을 받으며 아이들과 함께 시청각실로 향했다.
시청각실에 가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고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우와!”
니콜라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춘 햄버거와 감자튀김, 피자가 잔뜩 널려 있었다.
“빨리 먹고 다 먹은 애들은 옷부터 갈아입자. 옷 입기 전에 꼭 손은 깨끗이 씻고. 알겠지?”
“네!”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직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옷을 갈아입고 먹다가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도현은 이미 군것질을 잔뜩 한 터라 피자 한 조각에 감자튀김 몇 조각만 먹고 끝냈다.
도현과 똑같이 군것질한 니콜라스는 피자 한 조각에 더해서 햄버거 하나까지 해치워, 도현은 조금 존경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 * *
1시 15분.
시청각실에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오늘 첫 공연은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 팀이었다. 이 연극 준비 때문에 공연 장소도 시청각실로 정해졌다.
첫 공연에 이어 무대를 정리한 후, 2학년과 4학년 팀의 공연이 차례로 있을 예정이었다.
해리가 시청각실 뒤편으로 아이들을 모았다. 분장을 모두 끝마친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해리를 쳐다보았다.
“얘들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해리가 운을 띄우자, 이제 곧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극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난 다비드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무대도 완벽하게 체크했고,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어. 두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잖아?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너희들이 해온 노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가 부드럽게 말해도, 아이들 얼굴에 떠오른 불안함과 긴장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짝!
“내가 감독이잖아? 감독으로서 말하는데, 너희들 다 잘할 수 있어! 내가 확신해!”
어깨를 당당히 편 진이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두 눈은 그 말처럼 확신으로 가득 차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도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 한마디에 아이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감독인 진이 아이들을 이끌었다면 도현은 지도하고 다독였다.
연기에 자신 없어 하는 아이들도, 제대로 외우지 못해 버벅이는 아이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도와주었다.
게다가 함께 연습했던 아이들은 도현의 연기를 수없이 보았다.
“줄리엣, 네가 보기엔 우리 잘할 것 같아?”
재키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도현에게 집중되었다.
“응.”
이번엔 좀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할 거야. 나도 확신해.”
여전히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동자에 도현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실수하더라도 내가 도와줄게.”
그 말에 재키의 얼굴이 확 펴졌다. 다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선생님이나 다름없었던 도현이 한 말이기에 효과가 좋았다.
해리가 웃으며 말했다.
“자, 자. 들었지? 그러니까 연습한 대로만 열심히 하자!”
“네!”
자신감을 되찾은 아이들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