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59)화 (160/582)

제159화. 로미오와 줄리엣 (14)

시청각실이 거의 다 채워졌다.

공연은 어디까지나 공연이지, 의무 관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 이후 단체 활동까지의 시간은 부스 운영도 없는 붕 뜬 시간이라 관람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줄리아가 미아의 옆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많이 왔네.’

자리는 이미 꽉 찼는데, 사람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자리가 부족해질 것 같아 일부 선생님들은 창고에 의자를 가지러 간 참이었다.

“미아 선생님, 오늘따라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이 많은 거 같지 않아요?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줄리아의 말에 카메라를 점검하던 미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소리예요, 줄리아. 줄리아의 제자 때문이잖아요.”

“제 제자요? 제가 맡은 반은 오늘 공연 안 하는데요?”

“줄리엣 말이에요.”

“…아?”

줄리아가 한 박자 늦게 깨달은 눈빛을 했다.

“그 애가 아이들 사이에서 워낙 인기가 좋잖아요. 우리 학교 애들 대부분이 작년에 유령의 집을 체험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보러 오는 아이들이 많고, 아이들이 보러 오니까 부모님도 따라오고, 뭐 그런 거죠.”

“아하.”

이제야 모두 이해가 가는 줄리아였다. 확실히, 줄리아가 맡은 반에서도 종종 아이들이 도현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줄리아는 미아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제 손에 든 카메라를 확인했다.

지난 이틀간 그랬듯이, 오늘 할 공연은 선생님들 몇몇이 촬영을 해서 간단한 편집 후에 홈페이지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보통의 학교에서 투박하게 촬영하여 올리는 것에 비해 이례적이었다. 선생님 중에서 영상 편집에 능숙한 사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줄리아는, 렌즈에 담긴 인물에 살짝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브랜드가 궁금해지는 원피스를 입고 날개 뼈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느슨히 묶어 내린 인물은, 도현의 어머니였다.

과연, 도현의 편입 첫날 유전자의 힘을 깨닫게 한 외모는 여전했다.

흔치 않은 동양인에, 더욱 흔치 않은 외모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서혜나 주변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런 부분까지도 닮았네.’

누가 쳐다보든 말든 무심하던 소년의 작은 얼굴을 떠올린 줄리아가 작게 웃었다.

* * *

시청각실은 종종 공연 용도로 사용되는 곳으로, 붉은 커튼과 조명까지 설치되어 연극 무대를 꾸미기에 제격이었다.

붉은 커튼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들도 저 뒤에 있을까?’

서혜나는 도현의 줄리엣 분장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직접 주문 제작했음에도 학교로 배송을 보내 한 번도 못 봤다.

그때.

마이크가 켜지며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하나 보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 듯 시끄럽던 공간이 점차 조용해졌다. 두근거리며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면서 무대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델마 아카데미 축제 공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3학년 연극 팀이 준비한 연극으로,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하였습니다. 감독과 유모 역할에 지니 레이시, 로미오 역할에 다비드 데니얼, 줄리엣 역할에 도현 리, 티볼트 역할에 니콜라스 가비… 담당 선생님은 해리 선생님이십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한 무대인 만큼,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시청각실을 가득 메웠다.

붉은 커튼이 젖혀지며, 두 달 동안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막이 올랐다.

* * *

무대는 두 공간을 나눠서 활용할 생각인 듯, 뒤에 뜬 스크린은 반으로 나뉘어 오른쪽에는 고풍스러운 중세 귀족 집 내부를, 왼쪽은 검은 화면을 띄웠다.

많은 걸 준비할 수 없는 초등학교 연극에서 스크린 활용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오른편에 띄워진 화면은 화려한 성 내부였는데 장식물에서 붉은색이 많이 보였다. 무대에 있는 소품도 붉은색이 주를 이뤘다.

터벅, 터벅.

누군가 걸어 나왔다.

여기저기서 귀엽단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 남자아이로 추정되는 아이는, 붉은 무늬가 가미된 흰 드레스를 입고 중앙에서 머리카락을 땋아 망으로 된 장식품으로 덮어 양 귀를 가린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당시 고딕 시대에 기혼인 여성은 저런 식으로 귀를 가리는 머리 모양을 주로 했는데, 양의 뿔이라고도 불렸다.

“유모!”

두리번거리던 캐플릿 부인이 다시 한번 외쳤다.

“유모!”

“아이고! 네, 마님!”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구불거리는 금발을 사자처럼 풀어 헤치고 붉은 두건을 쓴 유모가 나타났다.

“유모, 내 딸이 어디 있지? 그 애 좀 불러줘.”

“알겠습니다, 마님. 아가씨! 아가씨! 줄리엣 아가씨!”

굽실굽실하며 말한 유모가 무대 한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누가 찾으시나요?”

“세상에….”

정숙해야 함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건 서혜나뿐이 아니었는지, 연극이 시작하고 조용해졌던 공간이 시끄러워졌다.

조금 긴 붉은 드레스는 걸을 때마다 바닥에 살짝 끌리며 그 잔상을 남겼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길어진 머리카락 탓에 평소보다 더 희고 작아 보여서, 그 안에 이목구비가 들어가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머리에 두른 끈으로 된 띠는 머리카락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나뭇잎의 모양새를 하고 있어 숲의 요정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은 마치 아이를 위해 태어난 색깔 같았다.

서혜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붉은 계열 원색은 잘 안 입혔던 것을 후회하는 사이, 옆에 있던 엠버가 살짝 감탄을 담아 말했다.

“정말 예쁜 애네요.”

딱 그 말이 어울렸다.

남자와 여자는 호르몬 차이로 골격이 다른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아직 어려서인지 그런 성별에 따른 차이가 모호했다.

그렇게 줄리엣이 한바탕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무대로 걸어 나왔다.

“아가씨! 어머니가 부르세요.”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무슨 일이죠?”

“줄리엣, 내 자랑스러운 딸아. 네가 아직 열네 살이 안 되었지.”

“추수절이 될 때까지 2주일 하고 며칠 더 남았죠? 추수절이 지나면 아가씨는 열네 살이 된답니다. 세상에, 아가씨가 벌써 열넷이라니! 하늘에 맹세코, 아가씨는 제가 기른 아기 가운데 제일 예뻤어요.”

유모의 말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 능청스레 말한 유모가 꿈을 꾸듯이 양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전 아가씨가 결혼하는 걸 보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바로 그거야!”

캐플릿 부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란다. 내 딸 줄리엣, 말해보거라.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공손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줄리엣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찰나 스쳐 지나간 멈칫거림은 착각인 듯싶었다.

“…저로선 꿈도 꾸지 않은 명예랍니다, 어머니.”

“이젠 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야지. 이곳 베로나에는 너보다 나이 어린 명문가의 여자애들이 벌써 엄마가 되었단다. 내 경우만 해도, 나는 네 나이 또래에 네 엄마가 되었잖니. 그러니 간단히 말하마. 저 늠름한 파리스 백작이 너를 신부로 맞길 원하신다는구나.”

캐플릿 부인의 말이 길어질수록 줄리엣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줄리엣이 허옇게 질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모가 눈치 없이 호들갑을 떨었다.

“파리스 백작이라니! 그분은 정말 완벽하시죠. 밀랍 틀에 찍어낸 듯이요! 물론 아가씨는 재잘거리던 아기였을 때, 파리스 백작이 아가씨를 점찍어 자기 사람으로 삼고자 하자, 차라리 두꺼비를 보는 게 낫겠다고 했지만요! 아가씨는 제가 백작님이 두꺼비보다 아름답다고 할 때마다 백지장보다 창백해지셨지요! 지금처럼요!”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처음, 줄리엣의 등장으로 시선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점차 극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따라온 학부모들은 정말 공연에 관심이 있어서 보러 온 게 아니었다.

자기 아이가 나올 때 사진을 찍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그저 아이가 바란 대로 참석한 거였다. 초등학교 공연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초반부터 시선을 빼앗는 줄리엣의 등장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의 연기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서 조금씩 진심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그만, 그만! 조용히 하거라! 줄리엣, 베로나의 여름날에도 그분처럼 멋진 꽃은 볼 수 없단다. 물론 두꺼비도 마찬가지지. 어떠냐?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니? 오늘 밤 연회에서 그분을 보게 될 거야. 젊은 파리스 백작의 얼굴을 책 읽듯이 잘 살펴봐. 그곳에….”

긴 대사 탓에 재키가 몇 번이고 실수하고 까먹었던 구간이었다. 마지막 리허설을 했던 어제까지도 헷갈렸던 부분이기도 했다.

진이 조금 긴장된 눈으로 재키를 보았다. 도현은 담담하게 재키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세 사람이 공유한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그곳에 아름다운 붓으로 그린 듯한 기쁨을 찾아보거라. 이 아름다운 책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그분의 두 눈이라는 여백에 적혀 있는지 찾아보렴. 이 귀중한 사랑의 책은 제본 안 된 책과 같은 연인이라, 그저 표지만 덧씌우면 아름다운 책이 될 거야. 말해보거라. 그의 사랑을 좋아할 수 있겠어?”

도현은 객석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딱 눈앞에 있는 재키만이 볼 수 있는 미소였다.

온화하게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는 도현이 연습 때 아이들을 칭찬할 때마다 보여주던 눈빛이었다. 재키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옅게 상기되었다.

지금 있는 곳이 무대만 아니었어도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녔을 터였다.

도현은 눈빛을 갈무리하고는 다음 대사를 차분히 읊었다.

“눈으로 보아 좋아지는 거라면 좋아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마님!”

앳된 목소리가 울리고, 어린 하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마님! 모든 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입니다! 전 손님들이 당도하셔서 그분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니, 마님께서 따라와서 도와주세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짚던 캐플릿 부인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러겠다. 줄리엣, 준비를 마치면 연회장으로 오거라. 백작님이 기다리고 계신단다.”

하인과 캐플릿 부인, 유모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아주 작게 재키의 환호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도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오른쪽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넓은 무대 위에 홀로 선 줄리엣의 주변을 조명이 비췄다. 자연스레 줄리엣의 주변을 제외하고는 어두워졌다.

“눈으로 보아 좋아지는 거라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내면에 웅크린 것.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것. 그런데 어떻게 책을 읽듯이 그를 살펴보고 사랑할 수가 있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먼 객석까지 들릴 정도로 뚜렷한 목소리였다.

그사이, 새로운 인물이 무대 위로 올라오며 왼쪽의 검은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초저녁의 성문 앞 풍경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은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미오가 있는 왼편은 오른편과 모든 게 달랐다. 밤하늘은 푸른빛을 띠었고, 로미오의 복식도 하늘색이 섞인 남색이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며 왼편에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줄리엣이 있는 곳이 어두워졌다.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 머큐소가 로미오의 어깨를 툭 쳤다.

“로미오! 캐플릿 저택 앞까지 다 왔어. 안에 들어가면 춤을 춰야 해.”

“난 추기 싫어. 내 마음은 지금 바다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거든.”

우울에 잠긴 목소리였다.

고동색 눈동자에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은 수척해 보였다.

“그녀는 그만 잊어. 그 사랑은 네게 짐만 될 뿐이야. 오늘 무도회에서 다른 미인들을 잘 살펴보라고! 분명 마음이 바뀔걸?”

“세상에 로절라인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그런 행위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할 뿐이야. 절세미인이 온다고 해도, 그건 절세미인마저 능가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증명할 따름이지. 태양도 천지개벽 이래 그녀와 견줄 미인은 본 적이 없을 거야.”

상사병에 걸린 로미오가 반쯤은 슬픔에 잠겨, 반쯤은 꿈결을 헤매듯이 중얼거렸다.

그때, 줄리엣을 비추던 조명이 다시 켜졌다. 이번엔 양쪽의 조명이 모두 켜져, 로미오와 줄리엣 각각을 둥글게 비추는 상태였다.

홀로 고민하듯이 상념에 젖은 눈빛을 하던 줄리엣이 말했다.

“눈과 코와 입이 얼마나 조화로운지,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닮았는지가 사랑의 기준이라면 정말 덧없구나. 결국 사람은 늙고 꽃은 시드는 것을.”

목소리는 음악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충격적인 비주얼에 가려져 있었던 것들이 차츰 관객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흔히 생각하는 청초하고 가녀린 줄리엣과는 다른, 선명하고 곧은 눈빛. 그건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을 거란 기대 심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눈빛과 표정을 미아의 카메라가 고스란히 담아냈다.

같은 무대 위.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라진 로미오와 줄리엣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비 또한 섞일 수 없는 그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쯧! 양쪽 저울에 모두 그녀를 올려놓으니, 저울질해도 의미가 없지. 자, 가세. 내 눈부신 여인들을 보여줄 테니!”

머큐소가 로미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잡아끌었다. 로미오는 힘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함께 가겠지만, 그건 다른 여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야. 난 내 연인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 가는 거야!”

“그래, 그래!”

로미오와 머큐소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왼편의 화면과 조명이 꺼지고, 다시 무대에는 줄리엣만이 남았다.

자연히 시선은 줄리엣에게로 집중되었다.

줄리엣은 선언하듯이 말했다.

“아마 난 파리스를 사랑할 수 없을 거야.”

단단한 눈빛으로 관객석을 보던 줄리엣이 오른편으로 사라졌다.

오른쪽 화면에도 불이 꺼졌다. 이윽고 어두워진 무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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