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60)화 (161/582)

제160화. 로미오와 줄리엣 (15)

부드럽고 우아한 왈츠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웅성거리는 효과음도 들리기 시작하고, 화면이 밝아지며 연회장 내부를 띄웠다. 이번에는 분할되지 않은 화면은 스크린 가득히 붉게 장식된 연회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텅 비었던 무대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저마다 꾸며 입은 신사 숙녀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췄다.

긴 지팡이를 든 캐플릿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의 양옆에는 줄리엣과 티볼트가 있었다.

“어서 오시오, 신사 숙녀분들! 환영합니다. 아가씨들은 춤을 추고, 신사분들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시오. 자, 악사들! 연주를 시작하게!”

음악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그때, 왼편에서 가면을 쓴 머큐소와 로미오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자, 얼른 둘러봐! 아름다운 미인이 가득하잖아.”

“그래 봤자 그녀보다 아름다운 이는 존재하지 않….”

귀찮다는 듯이 머큐소를 떼어 내던 로미오가 멈칫했다. 로미오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모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줄리엣이 있었다.

살풋 웃는 소녀의 얼굴에서 로미오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여인은 누구지?”

“누구 말이냐?”

“저기 저 아름다운 여인 말이야!”

“누굴 말하는 거야?”

머큐소가 어리벙벙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로미오가 가슴을 쳤다.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답답하기는!”

번뜩!

그 순간 티볼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빛낸 티볼트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님! 이 목소리는 우리의 원수 몬터규 집안 놈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연회를 망치러 온 게 분명합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요!”

금방이라도 허리춤에 찬 칼을 빼고 나갈 기세였다.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가 흥분했음을 알려주었다.

“어머.”

엠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집에서 뺀질거리는 사고뭉치 아들이 제법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캐플릿이 고개를 저으며 점잖게 말했다.

“가만히 있거라. 그는 점잖은 신사라고 했다. 덕스럽고 품행이 바른 청년으로 베로나의 자랑이라고 하더구나. 내 연회에서 그에게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내 뜻을 존중한다면, 못 본 척 넘어가자.”

“하지만 숙부님! 저런 악당은 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캐플릿이 짜증 난다는 듯이 목소릴 높였다.

“내버려 두라니까! 이 집의 주인이 너냐, 나냐? 손님들 앞에서 난장판을 벌인다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 괜히 난리 치지 말고 들어가!”

캐플릿이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무대에서 내려갔다. 무대에 남은 티볼트가 머큐소와 떠들고 있는 로미오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현실감 넘치는 연기에, 엠버는 사실 우리 아들이 연기 천재였나 잠깐 고민했다.

“이번에는 물러가지만, 다음번에 꼭 이번 치욕을 갚아주겠다, 로미오!”

이를 아득바득 갈며 일갈한 티볼트가 성큼성큼 걸어서 무대에서 퇴장했다.

커다랗던 왈츠 소리가 작아졌다.

오른쪽에는 유모와 줄리엣이, 왼쪽에는 머큐소와 로미오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각각 두 개의 조명이 두 사람을 둥글게 비추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두 개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유모가 줄리엣의 귀에 무언갈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줄리엣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몬터규? 몬터규 가문의 사람이 연회에 왔다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티볼트 도련님의 목소리가 워낙 커 저도 똑똑히 들었는걸요. 저 가면을 쓴 신사가 분명해요! 제가 저쪽을 몰래 가서, 신사분들이 무슨 이야길 하는지 엿들을까요?”

“엿듣는 건 숙녀의 도리가 아니야, 유모. 하지만… 그는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니, 무슨 상황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구나! 혹시라도 그가 연회를 망치면 큰일 나니까 말이야.”

유모가 저만 믿으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고 살금살금 로미오 쪽으로 걸어갔다.

관객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유모를 따라 이동했다.

소품 뒤에 숨고, 춤을 추는 신사 숙녀를 엄폐물로 삼다가 타박을 들으며 익살스레 걸어가는 모습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능청스럽고 자신감 넘치는 진이었기에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조금이라도 쭈뼛대거나 쑥스러워했으면 어색해졌을 연기를, 진은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이윽고, 유모가 로미오의 뒤편에 있는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섰다. 엿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한쪽 귀에 과장되게 손을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때마침 로미오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녀가 친구들 가운데 있는 모습은 마치 까마귀 떼 속 백설 같은 비둘기의 모습 같아! 그녀에게 춤을 신청해야겠어!”

“뭐? 너 로절라인은 벌써 잊은 거냐? 그녀에 대한 사랑은?”

어이없어하는 머큐소에 로미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내 마음은 사랑이 아니었어! 오늘 밤 전까지 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기가 차다는 듯이 로미오를 보던 머큐소가 몸을 틀어 관객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친구도 참 변덕스럽군. 납덩이 같은 무거운 사랑도 미인을 보면 변하나 보지!”

그 말에 몇몇 사람은 웃었고, 한편에서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최근 대학교 교양으로 듣는 수업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배우던 나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서도 로미오가 좀… 태세 전환이 빨랐지.’

어찌 보면 로맨틱하긴 하지만, 어이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극을 보면서 뭔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상당 부분을 원작 희곡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로미오의 비둘기 발언도 원작의 대사를 이용한 것이었다.

나르샤도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로미오가 진정한 얼빠이자 외모지상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희곡을 각색한 아이들의 생각도 동일한 것 같아서 재밌었다.

그사이, 로미오와 머큐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유모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갔다.

로미오가 했던 말을 유모가 고스란히 들려주자, 줄리엣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비둘기를 좋아하지 않아.”

“두꺼비랑 비교하면요?”

“땅을 뛰어다니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 외엔 차이를 모르겠구나.”

유모에게 간단히 일별한 줄리엣이 로미오를 쳐다보았다.

탐탁지 않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처음에도 호의보다는 경계가 어렸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이제는 한심함까지 어려 있었다.

“저 신사분도 눈으로 사랑을 하는 모양이지.”

이미 줄리엣의 독백을 들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줄리엣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로미오가 지금 제대로 마이너스 점수를 얻었다는 것도.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걸까.

관객들이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줄리엣이 읊조렸다.

“몬터규… 몬터규 가문이라.”

줄리엣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올리더니 눈을 빛냈다. 두 눈은 재밌는 장난을 치려는 악동처럼 짓궂게 빛났다.

“유모,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좋은 기회라뇨?”

“나는 파리스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어머니 말씀처럼 책을 읽듯이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내 마음속 사랑의 샘물은 바짝 말라 있을 뿐이야.”

“불쌍한 파리스 백작님! 몇 년 동안 아가씨만을 봐오셨는데!”

“조용히 하고 들어봐, 유모. 만약 몬터규 가문의 사람이 내게 청혼하면 어떨 것 같아?”

“가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혼인은 차일피일 미뤄지겠지.”

내내 생기 없던 얼굴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움과 흥미로움을 느끼면서도, 관객들은 생생하게 빛나는 줄리엣의 얼굴을 홀린 듯이 보았다.

그만큼이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는 줄리엣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가씨, 설마!”

“쉿! 조용히!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어!”

줄리엣이 검지를 입가에 세우며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주변인들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중앙에 로미오와 줄리엣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개의 조명이 하나로 합쳐지고, 부드러운 왈츠가 좀 더 로맨틱한 음율로 바뀌었다.

잠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고딕 시대 옷을 입은 아이 둘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건 상당히 귀여운 광경이었다. 두 아이가 외양적으로도 뛰어났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관객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잠시 후 한 발짝씩 서로에게 멀어졌다.

그다음, 꽤 유명한 대사가 로미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만남이자,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눈 장면이면서, 서로에게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원작대로라면 말이다.

“미천한 제 손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힌 거라면, 그 점잖은 죄가 바로 이것이니, 수줍은 순례자인 제 두 입술이 기다리다가 부드러운 키스로 거친 손자국을 씻어 내겠소.”

로미오의 말을 듣던 줄리엣의 얼굴이 차츰 굳어갔다. 누가 봐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줄리엣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매가 경련하듯 떨렸다.

“선량하신 순례자님, 손을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바른 신앙심이 당신의 손에 보였으니까요. 전 개의치 않는답니다.”

줄리엣이 부드럽게 로미오의 손을 놓으려는데, 로미오가 덥썩 그 손을 붙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위,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남주인공의 눈빛을 한 로미오가 진득하게 줄리엣을 바라보았다.

“성자들에겐 입술이 있고, 순례자도 마찬가지죠?”

로미오의 얼굴이 줄리엣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게 무엇을 시도하려는 건지 눈치챈 관객석에서 즐거움과 당황을 담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춤.

로미오가 다가온 만큼 줄리엣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얘가 왜 이래!

단순히 로미오의 호감을 이끌어낼 생각이었던 줄리엣은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줄리엣이 황급히 말했다.

“다, 당신은 순례자지만, 저는 성자가 아니랍니다!”

“그럴 리가! 나는 당신을 본 순간 성녀라고 확신했습니다!”

눈치 없이 열렬한 마음을 고백한 로미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잠시, 잠시만요!”

허옇게 질린 줄리엣이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유모를 보고 안색을 확 밝혔다.

“유모! 유모가 절 부르시네요!”

줄리엣이 유모에게 미친 듯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줄리엣의 사인을 눈치채지 못한 유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엣의 다급한 몸짓과 유모의 맹해 보이는 표정이 한편의 희극 같았다.

“네? 제가요?”

“응! 나 불렀잖아. 아아! 어머님이 부르시는구나. 맞지? 그럼 정말 아쉽지만 어머니께 가봐야겠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줄리엣이 멈칫했다.

뒤늦게 본인의 목적을 상기했는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로미오를 천천히 마주 보았다.

“아….”

짧게 탄식을 뱉은 줄리엣이 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철판을 깔기로 결심했는지 수줍은 척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께서 절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오늘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겠죠? 멋진 신사분, 다음에 또 뵐 기회가 있기를!”

“어, 어? 저기!”

로미오가 붙잡으려는 걸 민첩하게 쑥 피한 줄리엣이 뒤를 돌아 아련한 눈으로 ‘또 봐요!’라고 외친 후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무대에서 퇴장했다.

무대에 남은 로미오와 유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

잠깐 어벙하게 서 있던 로미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가씨의 어머님이 누구시오?”

“아가씨의 어머님은 바로 이 댁 마님이시죠.”

“그럼 그 숙녀분이 캐플릿 댁 따님이란 말이오?”

“그럼요. 전 아가씨한테 가봐야겠어요! 몬터규가의 도련님도 잘 돌아가시길!”

충격에 빠진 로미오를 두고 유모가 아가씨를 부르짖으며 퇴장했다.

무대에는 로미오가 혼자 남았다.

로미오가 불안에 잠긴 얼굴로 관객석을 보았다.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는 가문.

한눈에 반해버린 사람의 정체는 로미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잠시 로미오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로미오의 심정을 대변하듯, 아름답던 왈츠가 끊기고 서늘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캐플릿가의 사람이었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값비싼 거래야! 내 목숨을 원수에게 저당 잡히다니. 불길한 사랑의 탄생이야!”

혼잣말을 하던 로미오가 비틀거리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렇게 무대의 조명이 다시 한번 꺼지고, 붉은 막이 내렸다.

* * *

“후우….”

다비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쉴 시간이 주어지니, 무대 내내 긴장했던 게 한 번에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잘했어.”

재키가 다비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비드가 한숨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소품을 담당한 아이들이 빠르게 무대를 세팅 중이었다. 이제 조금 뒤면 다시 커튼이 열릴 것이다.

다비드는 우연히 맞은편에 서 있는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망할 자식.’

그가 했던 스파르타 연습이 떠오르면서, 다비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연기에 재미를 느낀 것과 별개로 쟨 너무 과했다.

조금 흥미를 보였더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연습을 시키던 도현을 상기한 다비드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래도.

그렇게 연습했는데 실수하면 안 되지.

오기가 차올랐다. 처음에 도현을 상대로 연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독한 연습 앞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무대가 모두 준비되었다.

다비드가 심호흡을 했다.

멀리서 진이 주먹을 쥐며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게 보였다. 곧바로 팔팔해진 다비드가 상기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열심히 해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