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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62)화 (163/582)

제162화. 로미오와 줄리엣 (17)

“흐읍… 배고파….”

나뭇가지로 몸을 지탱하고 비틀거리며 걷던 티볼트가 기어이 바닥에 쓰러졌다.

티볼트는 원래의 기백과 자신감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꼬질꼬질해진 상태였다. 조명이 쓰러진 티볼트를 비춰 더욱 처량해 보였다.

그때, 로미오가 나타났다.

초췌한 안색과 지친 분위기.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티볼트보다는 멀쩡해 보였다.

“이보게. 빵을 구해 왔으니 좀 먹어보시오.”

“됐어! 누가 네놈한테 얻어먹을까 보냐!”

“삼 일째 굶었지 않나. 내가 걱정스러워서 그렇소.”

꼬르륵!

로미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효과음이 울렸다. 로미오가 ‘거보시오’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티볼트는.

“큼, 흠… 그럼, 하, 한 입만.”

결국 배고픔에 굴복했다.

생활력이 제로에 가까운 티볼트와 그런 그의 수발을 드는 로미오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

반절로 나뉜 화면의 오른쪽에 불이 들어왔다. 여러 번 등장했던, 줄리엣의 방 풍경이었다.

또렷한 목소리가 관객석을 파고들었다.

“오라버니는 왜 사고만 치는 거야!”

줄리엣이 성큼성큼 걸어서 등장했다. 줄리엣의 머리 위에도 조명이 켜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로미오와 오라버니는 쫓겨났고, 난 이제 꼼짝없이 파리스와 결혼할 처지에 놓였어!”

한탄하듯 제 신세를 내뱉은 줄리엣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을 문지르는 손길에는 피로함이 가득했다.

도현의 연기를 보던 나르샤는 문득 한 가지 감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유독 도현이가 말할 때만 잘 들리는 기분이네. 발음 때문인가?’

도현은 한 음절도 뭉개지 않고 완벽한 딕션으로 대사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딱히 힘을 주어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다른 아이들이 대사를 칠 때는 가끔 무슨 문장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면, 도현이 하는 말은 곧바로 이해되었다.

‘배우가 다르긴 다르구나.’

나르샤가 가볍게 감탄했다.

“하… 바보 같은 오라버니. 시중드는 사람이 없으면 밥도 잘 못 먹을 텐데 뭘 하고 계시려나. 밖에서 혹시 로미오랑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에 화답하듯, 제집 안방처럼 비스듬하게 드러누운 티볼트가 혀를 찼다.

“에이, 오늘은 왜 빵이 반 쪼가리밖에 없는 거야?”

“구하기 어려웠소. 이것도 힘들게 구한 거요.”

“흥! 쓸모없는 자식! 내가 마음이 넓어 이걸로 봐주는 줄 알아! 짚단이나 더 가져와! 영 등이 배겨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빵을 베어 먹는 폼이 아주 얄미웠다.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는 줄리엣과 달리, 티볼트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로미오를 구박하며 부려먹는 티볼트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 티볼트에 로미오가 인내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거, 짚단이나 가져오라니까?”

티볼트가 발끝으로 로미오의 종아리를 툭툭 쳤다. 연습할 때는 없었던 행동이었다.

다비드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뭐? 불만 있냐?’

잠시 두 아이의 시선이 오갔다.

“하, 하… 그리하도록 하지.”

이를 꽉 깨문 다비드가 애써 대사를 읊고는 구석에 쌓인 짚단을 가져와 티볼트 등에 받쳐주었다.

제 동생에 대해서 논문도 쓸 수 있는 나르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무대를 보았다.

‘저거 진짜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코끝을 찡그리는 건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꼬숩단 표정의 티볼트를 보고 파르르 떨던 로미오가 심호흡한 후 말했다.

“줄리엣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소?”

“또 시작이야? 연락이 오면 알려 준다니까? 감히 몬터규가 놈이 내 동생을 탐내는 것을 봐주는 것만으로 내 인내심은 모두 쓰이고 있으니, 괜히 재촉하지 마.”

“그래도….”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진저리를 친 티볼트가 짚단 위에 드러누운 몸을 일으켜 무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로미오가 티볼트를 애타게 부르며 그 뒤를 쫓아갔다.

줄리엣이 무대 위에 홀로 남자, 분할되었던 화면이 하나로 합쳐졌다.

하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등장해 줄리엣의 몸에 드레스를 대보고, 머리를 손질하는 시늉을 했다. 또 다른 하녀는 전신 거울을 들고 와 줄리엣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신이 난 하녀들과 다르게 갈수록 창백하게 굳어가는 줄리엣의 낯이었다. 새신부의 설렘이 아닌, 생기가 빠진 우울함이 거기에 있었다.

특히, 줄리엣의 얼굴을 줌 인 해서 촬영하고 있던 미아는 그 섬세한 표정 변화를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캐플릿 부인이 유모를 대동하고 등장했다. 흡족한 눈길로 줄리엣을 보던 캐플릿 부인이 자애로운 투로 말했다.

“줄리엣, 드레스는 마음에 드니?”

“…네, 어머니.”

“곧 있으면 너도 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구나. 결혼식을 할 때까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가문의 식솔을 통솔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거라. 아, 그리고 곧 티볼트가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오라버니가요?”

“영주님께서 자애롭게도 추방령을 거두어 주셨다. 아마 네 결혼식 날 돌아올 것 같구나. 다행이지 않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던 줄리엣이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몬터규 가문의 사람도 돌아오는 건가요?”

“그래. 그도 돌아온다고 들었다. 하지만 줄리엣, 신경 쓰지 말거라. 몬터규 가문 사람이 너의 결혼식을 망치도록 두지는 않을 거란다.”

“네… 네, 그럼요.”

“그럼 식사 시간에 보자꾸나.”

“네, 어머니.”

캐플릿 부인과 하녀들이 사라지고, 유모와 줄리엣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유모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줄리엣의 얼굴에 점점 표정이 들어찼다.

“유모도 들었지? 돌아온대. 그가 돌아온대!”

“티볼트 도련님 말이에요?”

“아니! 로미오 말이야!”

시체처럼 질려 있던 얼굴에 혈색이 피어났다. 그건 생기 없이 말라붙은 꽃이 수분을 품고 부드럽고 촉촉한 꽃잎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딘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줄리엣은 기뻤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지된 줄 알았던 플랜 A가 아직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니!

“결혼식 날 돌아온다고 했지? 결혼식을 조금만 미루면 돼. 하루만, 딱 하루만 미루면 되는데!”

“어떻게요?”

“그걸 고민해 봐야지!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그래! 나와 로미오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지! 유모, 서둘러! 성당으로 가자!”

줄리엣이 몇 걸음 걷자, 화면의 배경이 오른쪽에서부터 물감이 퍼지듯이 바뀌었다. 풀밭이 넓게 펼쳐진 성당의 풍경이었다.

신부복을 입은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등장했다.

“신부님! 로런스 신부님이 맞으신가요?”

“오… 당신은, 캐플릿가의 아가씨가 맞으시죠? 여기엔 어쩐 일로….”

“도와주세요, 신부님. 신부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시 내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파리스 백작과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신부님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신부님께서는 저와 로미오의 사이를 아는 유일한 분이시니까요. 신부님, 전 로미오를 두고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줄리엣이 간절한 눈으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제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며칠. 딱 며칠만 결혼식을 미루면 돼요. 로미오가 곧 있으면 베로나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그가 돌아올 때까지만 결혼식을 미룰 방법이 없을까요?”

“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신부가 바구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냈다.

“이 연약한 꽃줄기에는 독과 약효가 모두 들어 있답니다. 냄새를 맡으면 기운이 돌지만, 맛을 보면 심장과 함께 모든 감각이 멈추게 되죠.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죽은 것처럼 보일 뿐.”

줄리엣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영민한 줄리엣은 그 꽃줄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이해한 것이다.

“그럼…!”

“이 꽃줄기로 만든 약을 먹는다면, 며칠 동안 죽은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괜찮아요! 제게 그 약을 만들어 주세요! 부탁드려요, 신부님!”

흥분으로 한층 높아진 목소리였다.

돌파구를 찾은 줄리엣의 환한 얼굴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무대가 다시 밝아졌을 땐, 로미오와 티볼트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하얀 종이를 든 로미오의 손이 떨렸다.

“말도 안 돼. 줄리엣… 내 연인, 내 심장, 내 영혼… 아아… 어찌 나를 두고 떠나 버렸는가? 내 영혼이 파도처럼 부서지는구나….”

로미오가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을 짚었다. 티볼트도 비통에 찬 표정으로 짚단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줄리엣… 줄리엣….”

로미오가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분명 슬픈 장면이었는데….

“흐윽, 줄리엣…!”

“푸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슬픈 장면이건만, 로미오의 울음소리가 너무 어색해서 블랙코미디처럼 우스웠던 탓이었다.

그래도 관객들은 열심히 연기하는 다비드를 위해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비통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니콜라스는 관객석에서 보이지 않게 제 허벅지를 꼬집으며 힘들게 슬픈 기억을 떠올렸다.

다비드는 처음 연기를 해본 거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연기했지만… 그의 연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바로 사랑 연기만 출중하다는 것.

사랑에 빠진 연기는 기가 막히게 해내면서, 이렇게 슬퍼하는 연기는 놀라우리만치 못했다. 티볼트와 싸우는 장면도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웃음을 참는 것이 한계에 다다라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다행히 지원군이 도착했다.

문이라도 있는 것처럼 노크하는 시늉을 한 아이가 말했다.

“캐플릿가의 티볼트 계십니까?”

티볼트가 비척비척 일어나 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나요. 무슨 일이요?”

“편지가 왔습니다. 여기, 받으시지요.”

편지를 받아 든 티볼트가 중얼거렸다.

“유모…? 무슨 일로….”

편지를 뜯어 읽는 티볼트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줄리엣이… 살아 있었구나! 역시, 그 애가 그리 죽을 리가 없지! 잡초보다 질긴 아이인데! 그럼!”

관객들은 티볼트의 대사로 인해서 편지에 적힌 글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완전히 살아난 티볼트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로미오는 이제 완전히 시체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흠… 이걸 저놈에게 알려주어야 하나?”

“아니, 내가 왜?”

“그래도… 저놈이 날 도와줬는데….”

“그래도 몬터규 가문 놈이잖아!”

티볼트는 자아분열이 온 것처럼 자신과 싸웠다. 그리고 싸움 끝에 승리한 것은, 티볼트 안에 남아 있던 양심이었다.

“그래. 연락이 오면 알려주기로 약속을 하기도 했고… 금수도 은혜는 안다는데 이 정도야 못 해줄까. 흠, 절대 저놈이 걱정되어 이러는 건 아니야!”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중얼거린 티볼트가 로미오에게 다가가 발로 허리께를 툭 쳤다.

“이보시오.”

“…놔두시오.”

“에이, 정신 못 차리는 비리비리한 놈이군!”

“그렇소. 난 정신 못 차리는 비리비리한 놈이지. 이대로 살아 무엇 하겠는가. 약재상을 찾아가야겠다.”

“약재상은 또 왜?”

“알 필요 있소?”

로미오가 까칠하게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던 티볼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시게. 줄리엣이 살아 있어. 죽은 게 아니라,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기 싫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비약을 마신 거야.”

“…….”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뭐?!”

커다란 로미오의 외침에 깨졌다.

“줄리엣, 내 연인이 살아 있다고?”

“누가 네 연인이야? 내 동생이지!”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로미오가 티볼트를 꽉 끌어안았다. 티볼트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진저리를 쳤다.

“미친놈!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티볼트의 반항에도 호탕하게 웃은 로미오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제부터 자네는 내 가장 친한 친구라네!”

“누구 마음대로 친구야! 이 정신 나간 자식!”

“그래, 그래. 얼른 짐부터 쌉시다! 베로나로 돌아가야지! 내 연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내 동생이라고!”

아웅다웅 다투는 두 사람 앞으로 붉은 막이 내려왔다.

* * *

다시 막이 열렸을 땐, 관처럼 보이는 곳에 줄리엣이 곱게 누워 있었다. 관은 정면을 향해 비스듬한 각도로 누워 있어, 관객석에서도 그곳에 누운 줄리엣의 모습이 잘 보였다.

“와….”

어딘가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수의인지, 아니면 결혼식 드레스인지 모를 하얀 드레스를 입고 관에 누워서 가지런히 배 위로 모아둔 손에 흰 꽃송이를 쥔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흰 옷가지 위로 흩어진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소녀의 안색을 더욱 희어 보이게 만들었다.

현실감 없는 외모 탓인가, 소녀는 관에 누워 있음에도 죽은 것보다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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