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로미오와 줄리엣 (18)
소녀가 손에 쥔 것과 같은 꽃송이를 든 유모가 등장해 관 앞에 주저앉았다.
“아가씨. 결혼식은 취소되었어요. 아가씨가 쓰러지신 지는 이틀이 지났고요…. 티볼트 도련님이 돌아오신다는 편지도 받았어요. 그러니까 아가씨만 일어나시면 돼요. 너무 오래 누워 있으니 걱정되네요. 그놈의 결혼이 뭐라고…. 전 이제 아가씨가 결혼하는 걸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가씨가 건강하게 계셔주기만 한다면, 전 더 바랄 게 없겠어요.”
극의 초반.
아가씨가 결혼하는 걸 보면 더 바랄 게 없겠다던 대사와 완전히 반대되는 대사였다.
진이 가장 열심히 연습했고, 또 어려워하던 장면.
내내 괴짜처럼, 혹은 가볍게 굴던 유모가 진지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은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넋두리하듯이 늘어놓던 유모가 애틋하게 줄리엣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더니 인사를 하곤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줄리엣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두 눈이 떠졌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줄리엣이 제 머리맡에 놓인 꽃을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며칠이 지난 거지…? 여긴 내 무덤인가?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엣이 황급히 입을 다물고 다시 누웠다.
“줄리엣, 내가 왔소.”
방문자는 로미오였다.
로미오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줄리엣을 보았다.
“신부님께 들었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그 이야길 듣고 내 영혼이 얼마나 큰 기쁨에 휩싸였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로미오의 말 그대로, 목소리에는 짙은 기쁨이 묻어져 나오고 있었다.
로미오가 관 옆에 앉아 줄리엣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모를 뻔했습니다. 신부님이 보낸 전령이 전염병 때문에 제가 있는 곳에 오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혈육이자 내 가장 친한 친구께서 내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일이지요. 난… 난 사실 약재상을 찾아가 독약을 받아 올 생각이었습니다. 그걸 들고 당신의 무덤에 와서 죽음이나마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함께할 기회가 주어지다니, 아직도 꿈만 같군요. 줄리엣, 이제 당신만 눈을 뜨면 돼요.”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듣고 있는 사람이 다 안타까워지는 고백은, 차갑게 얼어 있던 줄리엣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줄리엣이 눈을 뜨려던 때였다.
“애통하구나. 그대의 신방은 무덤이고, 침상과 덮개는 흙과 돌이니. 내가 밤마다 성수로 그것을 적셔주고, 성수가 없다면 슬픔의 눈물로 적셔주리다.”
관객들은 새로운 등장인물이 누군지 바로 깨달았다.
줄리엣의 결혼 상대.
파리스 백작이었다.
꿀꺽.
클라이맥스로 다다르는 극에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묘지에 들어서던 파리스가 멈칫했다.
“누가 안에 있는 것인가? 누가 내 진정한 사랑에게 바치는 추모 의식을 방해하는 거지? 너는….”
두 사람이 마주쳤다.
“로미오? 추방당한 오만방자한 몬터규 놈이구나!”
파리스가 돌연 적개심을 보였다. 두 눈에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네놈이 내 사랑의 사촌 오빠를 공격해 영지에서 추방되는 불명예를 얻어 어여쁜 아가씨가 그 충격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고들 하지! 이번에는 시체에 무슨 짓을 하려고? 불경한 짓을 멈춰라, 이 사악한 몬터규 놈아!”
“잠깐! 그게 아니오! 그리고 난 추방령이 풀렸소!”
“그렇다고 한들, 이 자리에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거지? 지금 내 사랑의 사촌 오빠를 욕보이고도 모자라 시체에까지 복수하려는 게 아닌가?”
“진정하시오! 절대 그런 게 아니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보시게. 나와 줄리엣은….”
잠시 머뭇거리던 로미오가 폭탄선언을 했다.
“연인 사이요!”
“뭐, 뭐?”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던 파리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무슨 헛소리인가! 그녀는 내 약혼자야! 그런 말로 내 죽은 약혼자를 욕되게 하지 마라!”
흥미진진한 삼각관계에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뒤늦게 줄리엣의 무덤에 찾아온 티볼트가 기어이 검을 빼 드는 파리스와 로미오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싸워라! 싸워라!”
말리긴커녕 불을 붙이는 티볼트였다. 점점 소란이 커지자, 점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 결판을 내자! 내가 줄리엣의 연인임을 지금 증명하겠다!”
“남의 약혼자를 탐내는 극악무도한 놈을 처벌하고 말겠다!”
두 사람이 맞붙으려던 때였다.
“그만!”
무대가 조용해졌다.
시끌벅적 떠들던 사람들도, 로미오와 파리스도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줄리엣을 보았다. 구경꾼 중 한 사람은 너무 놀라 혼절하여 쓰러졌다.
관에 곱게 누워 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창백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줄리엣의 얼굴에 짧은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완전히 최악의 타이밍에 일어나 버렸다.
“다 엉망이야. 되는 일이 없어! 네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래!”
당황한 로미오를 노려보던 줄리엣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답지 않은 짓을 했을까.
어쩌면….
어쩌면 잠든 자신을 향해 진심을 속삭이던 로미오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연민인지 동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싸움을 말려 보겠답시고 멍청한 짓을 했다. 줄리엣은 제 선택을 격렬히 후회했다.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르던 줄리엣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 정리를 끝냈는지 단단해진 얼굴이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 엎어진 물은 도로 담을 수 없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일을 키우지 말아요. 난….”
모두가 줄리엣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줄리엣이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단단히 결심한 듯 비장하게 말했다.
“난 둘 다 좋아하지 않아요!”
참고 참아왔던 진심.
어떻게든 수를 써 결혼식을 물려보려던 게, 자꾸만 일이 커졌다. 오라버니의 추방부터 시작해서, 생사를 건 결투까지.
이제는 줄리엣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나니, 걱정보다는 후련함이 앞섰다.
내친김에 못을 박았다.
“난 두 사람 중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두꺼비도 비둘기도 다 싫다고요! 전 혼자 살 거예요!”
“주, 줄리엣…?”
“비켜! 유모! 유모 어디 있어!”
저를 잡으려는 파리스를 쳐낸 줄리엣이 유모를 찾아 떠났다.
정적이 흐르는 무대에 아연한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로미오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파리스를 뒤로하고 줄리엣을 따라 쫓아갔다.
“줄리엣! 잠깐만! 저와 얘기 좀 해요!”
애타는 로미오의 목소리와 영혼이 탈곡된 것 같은 파리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무대가 어두워졌다.
관객석에 침묵이 감돌았다.
‘뭘 본 거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붉은 막이 내려앉는 걸 보면서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 박수 치려고 할 때였다.
끝난 줄 알았던 무대의 막이 다시 올랐다. 웅성대는 소리와 마차가 지나가는 배경음이 들렸다.
“그 얘기 들으셨어요?”
영지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 캐플릿가 아가씨 일 말이죠?”
“그래요! 그 일!”
“세상에, 그런 일도 다 있다니. 참 별일이죠. 파리스 백작님만 완전히 물 먹은 거 아니에요?”
“에이! 솔직히, 전 캐플릿가 아가씨가 불쌍하던데요. 얼마나 결혼이 싫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어요?”
“왜요? 그 늠름하고 잘생긴 파리스 백작님이신데!”
“잘생긴 건 몬터규가 도련님이죠!”
두 사람이 누가 더 잘났다고 이야기하며 설전을 벌이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이 끼어들어 일침을 놓았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뭐 해요? 그 아가씬 둘 다 싫다고 하시는데!”
그러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캐플릿가 아가씨에게는 참 다행이에요. 베로나 영주님께서 아가씨의 사정을 듣고는, 아가씨가 원하지 않으면 결혼을 올리게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잖아요!”
“영주님이 아주 자비로운 처사를 내리셨죠! 그러고 보니… 그 후로 세 사람은 어떻게 되었대요?”
“모르세요? 그 파리스 백작님과 몬터규가 도련님이 매일같이 캐플릿가에 방문하며 아가씨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어! 저기!”
“티볼트, 내 친구! 잠시만 멈춰보오! 줄리엣은 요즘 뭘 하고…!”
“이 지긋지긋한 자식아! 그만 따라다니라니까!”
“그런 섭섭한 소리가 어디 있소! 우린 가장 친한 친구 사이 아니오!”
“그놈의 친구!”
진저리 치며 도망가는 티볼트와 그를 지겹게 쫓아가는 로미오, 그리고 그런 둘을 구경하는 영지민을 마지막으로 막이 내렸다.
* * *
짝.
짝짝짝짝!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넋을 놓았던 아까와 다르게, 금방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의례적인 박수가 아니었다. 삼 일간 축제를 진행하면서 나온 박수 소리 중에 가장 우렁찼고, 힘이 있었다.
잠시 후 막이 다시 열리고.
연극 팀의 모든 아이들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정가운데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이 서 있었다.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손을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모두 밝았다.
재밌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을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상이었다.
솔직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뻔한 내용을 예상했다. 모두가 아는 내용과 아이들의 귀여운 재롱 정도를 기대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연극은,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놀랍고도 기분 좋은 배반이었다.
“어떻게 이런 연극을 만들었지?”
누군가 의아한 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퀄리티의 완성도였다.
가볍고 유쾌하면서 무거울 땐 무겁고 동시에 중심 주제를 끝까지 가지고 가는 각본과 몇 번이고 감탄했던 아이들의 연기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의 재롱 잔치가 아니라, 진짜 연극을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참았던 감상을 늘어놓았다.
“줄리엣이 정말 너무 예쁘지 않았어요? 남자앤데 위화감이 하나도….”
“예? 남자애라고요?”
지금껏 도현의 성별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한차례 충격을 받았고.
“예쁜 것도 예쁜 건데 연기가… 세상에, 전 진짜 연극배우 보는 줄 알았어요.”
“저 애가 그 애잖아요! 그,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연소로 수상했다던!”
“저, 정말요?”
도현의 정체에 다시금 경악했다.
웅성거리는 시청각실 안.
영상을 마무리하며 카메라를 정리하던 미아가 말했다.
“진짜 재밌네요. 전 줄리엣 성격을 그렇게 바꿀 줄 몰랐어요. 사실 원작보다 좀 더 생동감 있고 입체적인 게 더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요! 해리 선생님이 기대하라길래 기대했는데… 기대보다 더 좋았던 거 있죠? 그리고 줄리엣도 줄리엣인데, 티볼트랑 로미오랑 친해지는 전개가 너무 독특하고 재밌지 않았어요?”
“아, 맞아요! 그 부분 진짜 좋았죠. 전 상상도 못 했어요. 티볼트랑 로미오라니. 아이들이라서 상상력이 좋은 걸까요?”
줄리엣의 바뀐 성격도 흥미로웠지만, 연극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유발했던 부분은 티볼트와 로미오의 케미였다.
미아와 줄리아가 오순도순 감상을 나누는 사이.
해리는 온갖 질문 폭격을 받고 있었다.
“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연습시킨 거예요? 어떻게 저런 공연을 할 수가 있죠? 동선도 한 번도 안 꼬인 데다가, 대사를 실수한 애들도 없었잖아요! 무슨 연기 특강이라도 한 거예요?”
선생님의 질문에 해리가 허허 웃었다.
‘연기 특강을 하긴 했지.’
해리는 연극 연습을 떠올렸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고 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능숙하게 꾀어서 다시 연습시키던 도현의 모습을….
“다 애들이 열심히 연습한 거죠. 전 한 거 없어요.”
해리가 이렇게 말해도 겸양의 말로 이해한 사람들이 자꾸만 비법을 물었다.
겸양이나 겸손이 아니라 진심인데 비법이 있을 리가….
‘아니, 있구나.’
해리의 시선이 무대를 내려가는 도현에게 닿았다.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웃음기를 띠었다. 저 잘했어요? 묻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해리가 엄지를 치켜올렸다.
도현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졌다.”
시끄러운 관객석 사이에서 유일하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릴리가 허탈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이내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니, 저건 사기 아니야? 저게 말이 돼? 이게 초등학교 연극이냐고!”
앨리슨이 릴리의 어깨를 도닥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질 거라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앨리슨이 고개를 저었다.
앨리슨은 원년 2HV의 멤버였다. 2HV 활동을 한 이라면, 이런 결과쯤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기대보다 뛰어났던 연극 수준뿐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릴리. 그래도 우리는 얻은 게 있잖아?”
“…그렇지?”
릴리와 앨리슨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그럼 내기하자. 이긴 사람이 맛있는 걸 사다 주는 걸로!
- 좋아!
순진한 진은 모를 것이다.
내기에는 함정이 있었다는 걸!
릴리의 입에서 나온 ‘내기’는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
축제 첫날, 도현이 반 부스에 방문했을 때 그들도 연극을 한다는 걸 들은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들은 앨리슨이 제안했다.
‘이기면 사주는 걸로 어때? 내 생각에는 우리가 질 것 같거든! 그리고 이기면 기분 좋게 동생한테 맛있는 걸 사주면 되는 거니까 나쁠 건 없잖아?’
그들의 계획대로, 순진한 동생은 홀랑 속아 넘어갔다.
“흐흐흐….”
릴리의 음흉한 웃음소리에, 진은 아이들과 웃으며 떠들다가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