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로미오와 줄리엣 (19)
“후우….”
도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막 달리기를 마치고 난 후처럼,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아직 무대 위에 오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것이다.
그때, 재키가 말했다.
“우리… 잘한 거지?”
재키의 말에 아이들이 시선이 모조리 도현에게로 쏠렸다. 도현은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웃었다.
“완전. 최고였어.”
“우앗!”
도현의 말을 듣고 나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는지, 재키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리 실수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
“리허설 때도 실수했는데!”
아이들이 제각각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진이 재키에게 다가가 등을 팍, 쳤다.
“재키! 대사 잘 외우더라! 나 깜짝 놀랐어!”
“그치? 어제 이거 외운다고 잠도 늦게 잤단 말이야!”
재키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도현은 기뻐하는 아이들을 흐뭇한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다 같이 노력해서 무대를 만들고, 좋은 공연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었다.
즐거운 건 즐거운 거지만… 너무 집중해서 그런 걸까. 조금 피곤했다.
연극도 끝났으니 이제 쉴….
“야… 너 무대에서 나 잘 차더라?”
이를 부득부득 가는 다비드가 니콜라스를 노려보았다. 니콜라스가 얄밉게 웃었다.
“왜? 애드리브 몰라? 애드-리브?”
“애드리브는 무슨! 니 머리통을 내가 드리블해 줄까? 어?”
“드리블? 축구 하려고? 여기 공이 있나? 나도 끼워줘!”
…수 있을 리가.
도현이 잔잔하게 웃었다.
개판이었다.
“얘들아, 수고했다!”
해리가 밝은 표정으로 시청각실 뒤편에 마련된 공간에 들어왔다. 그는 아이들을 칭찬해줄 마음으로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정말 최고였….”
해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온갖 소품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다비드와 니콜라스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떻게 해야 그 짧은 사이에 이토록 난장판이 될 수 있는지 해리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해리의 시선을 받은 도현이 시선을 회피했다.
해리가 머리를 짚었다.
“이 자식들! 이렇게 난리를 쳐 놓으면 어떡해?”
잔소리를 하던 해리가 기가 죽어 눈치를 보는 아이들을 보고는 결국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해리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말했다.
“빨리 정리나 하자. 정리하고 나와서 축제 마지막 날을 즐겨야지.”
“네!”
처졌던 귀가 쫑긋 솟듯이 밝아진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현도 옆에서 거들었다.
드디어.
연극이 끝났다.
* * *
“혜나 씨. 혜나 씨?”
“…아, 네.”
멍하니 막이 내린 무대를 보고 있던 서혜나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 서혜나에 엠버가 살짝 웃었다.
“도현이가 정말 잘하긴 했죠?”
“…네! 정말로요. 정말….”
무대 위의 도현은 그야말로 생동감, 그 자체였다. 처음에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도현을 찍던 서혜나는 갈수록 팔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육지에 나와 있던 바다 생물이 물을 만나 생명력을 되찾듯, 드넓은 대양을 힘차게 헤엄치듯 그렇게. 도현은 무대 위를 휘젓고 있었다.
도현을 꽤 오래 보아 왔음에도 자주 본 적 없는,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서혜나는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압도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 빙의라도 한 듯이 연기하는 도현을 보고 받았던 충격과는 달랐다.
모든 걸 내보였던 영화와 달리, 이번 연극에서는 오히려 많은 걸 눌러 담은 느낌이었다.
홀로 튀지 않고 주변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연기하는 도현은 명백히 즐거워 보였다. 온몸에서 빛을 내뿜는 것처럼 찬란했다.
진심으로 무대를 즐기는 그 얼굴은, 사람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아 시선을 뗄 수 없게끔 만들었다.
“도현이가 연기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그건 비단 서혜나만의 감상은 아닌 것 같았다. 엠버가 한 말에 서혜나가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보았다.
엠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렇게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최고의 축복이죠.”
서혜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요. 하지만 니콜라스도 이번에 정말 멋지던데요?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어요. 몇 번이나 웃었는지 몰라요.”
“아, 그렇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사실 제 아들이 연기에 재능이 있었나 싶었다니까요.”
“진짜 있는 것 같은데요?”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두 학부모 사이로, 나르샤가 끼어들었다.
“내 생각에 그건 연기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걔 백 퍼센트 진심으로 즐긴 거라니까? 다비드 놀리면서 좋아하는 거 봤어요?”
나르샤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같은 시각.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리를 끝내고 공연과 공연 사이 쉬는 시간에 나온 터라, 시청각실은 시끌벅적했다.
‘엄마는 어디에 있지?’
도현이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도현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저 애가….”
도현을 두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 도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도리야. 다들 네 얘기 하는 것 같은데?”
“음….”
안 그래도 도현은 시청각실에 나온 순간부터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부담스러운지 조금 삐걱대며 움직였다. 니콜라스가 좀 질린 얼굴로 물었다.
“넌 신경도 안 쓰여?”
“그다지…?”
도현은 다른 의미로 관심받는 데 꽤 익숙한 사람이었다. 악의적인 관심도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악의적인 관심에서 무너지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무시하는 것.
그러다 보니 도현은 타인의 관심에 조금 무심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런 것도 있고.
“그리고 이건 우리가 잘해서 관심을 가지는 거잖아. 별로였으면 이렇게 쳐다보지도 않을걸.”
“그, 그런가?”
도현의 말에 니콜라스가 어깨를 조금 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번 연극이 꽤 괜찮았던 것 같았는데, 이런 소릴 들으니 좀 뿌듯하기도 했다.
“얘들아! 여기야!”
멀리서 나르샤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아이들이 쪼르르 그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아들!”
서혜나가 감격에 못 이겨 도현을 끌어안았다.
저번 겨울.
도현이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고 포옹을 하게 된 후로, 서혜나와의 스킨십이 좀 더 허물없어졌다.
정확히는, 그때를 기점으로 어떠한 경계선이 흐려진 것 같았다.
“우리 아들이 최고더라! 다 우리 도현이만 쳐다보더라니까? 이렇게 예쁘고 잘나서 어떡하지?”
도현이 뺨 언저리를 붉혔다.
서혜나의 주접이 버거운 이유는, 그녀가 언제나 진심이라서였다.
옆에서 엠버와 나르샤, 밀턴이 각각 니콜라스와 진에게 연극에 대한 칭찬과 감상을 늘어놓고 있었다. 진은 만족스러운 눈치였고, 니콜라스는 부끄러운 듯 몸을 자꾸만 비틀어댔다.
“내가 감독이기는 했는데, 도리가 제일 큰 역할을 하긴 했어!”
진의 말에 밀턴이 서혜나와 대화를 나누는 도현을 보았다.
‘대단했지.’
나올 때마다 존재감으로 시선을 모두 휩쓸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력이 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초등학교 축제에 와서 이런 공연을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누군가는 배우니까 연기를 잘하는 건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밀턴은 남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알고 있었다.
바로 도현이 H라는 것.
‘이거 좀 사기인 것 같은데.’
밀턴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짧게 웃었다. 의아함을 담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잘 봤다고 인사했다.
검은 눈의 소년도 웃으며 화답했다.
이후, 그들은 관객석에 앉아 다음 공연을 관람했다. 그 후에는 모두 강당에 모여 마지막 댄스파티를 벌였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 * *
축제는 끝났지만, 선생님들은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수상을 어떻게 할지도 정해야 하고, 축제로 인해 난리 난 학교도 정리해야 하고, 축제 기간에 말썽을 부린 아이들도 혼내야 하고, 상담을 원하는 학부모와 대면도 해야 했다.
그리고 특히 더 바쁜 사람이 있었으니.
“편집은 잘되어 가요?”
미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델마 아카데미 홈페이지부터 영상 제작 담당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숨은 능력자, 클로이가 피곤한 눈을 감았다 떴다.
“거의 끝났어요.”
어깨를 으쓱한 클로이가 말했다.
“미아 선생님이 잘 찍어주신 덕분에 편집하기 편해요.”
“클로이가 실력이 좋아서 그렇죠. 아, 지금 연극 편집하고 있었나 보네요?”
미아가 클로이의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
노트북 화면에는 막 관에서 몸을 일으킨 줄리엣이 있었다.
“네. 이건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몇 팀만 더 하면 돼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괜찮아요. 연극만 좀 오래 걸리지, 다른 팀 영상은 몇 분 안 걸려서 금방 해요.”
춤이나 노래, 합주 같은 건 편집하기도 쉬웠다. 가장 힘든 건 연극이었다.
그것도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편집된 영상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건가요?”
“음… 그렇긴 한데.”
클로이가 잠시 노트북을 내려 보았다. 관에 누운 줄리엣이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에만 올리긴 좀 아쉬워서… 다른 곳에도 올릴까 생각 중이에요.”
“하긴. 애들이 정말 열심히 공연하긴 했죠. 어디에 올릴 생각인데요?”
클로이가 살짝 웃었다.
“유튜브요.”
* * *
“…속았어!”
진이 분한 듯 책상을 내리쳤다.
방금 전.
축제가 끝나고 오랜만에 복도에서 릴리를 만난 진이 당당하게 가슴께를 내밀며 말했다.
- 상 우리가 탔는데, 내기는 잊지 않았지?
진의 말대로, 3학년 연극 팀은 축제에서 일등상을 수상했다. 그로 인해 학교에서 나온 지원금으로 모여서 파티까지 벌였다.
진의 말에 릴리가 여유롭게 웃었다.
- 당연히 안 잊었지. 그래서, 맛있는 건 사 왔니?
- 현실 도피하는 거야? 너희가 졌잖아!
- 아니, 제대로 현실 직시하고 있는데? 기억 안 나? ‘내기에서 이기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던 거?
- 그게 무슨….
잠시 반박하려던 진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에 릴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우승 축하해! 그럼 맛있는 거 기대하고 있을게!
얄밉게 눈까지 찡긋하고 멀어지는 릴리를 진이 넋이 나간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가 속았다니…!”
이를 바득바득 갈던 진이 이내 허탈한 표정을 했다.
“순진한 진. 이렇게 순진하고 착해서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지?”
처연한 투로 말하는 진에 니콜라스가 손가락을 들어 머리에 대고 빙빙 돌렸다. 쟤 미쳤냐는 뜻이었다.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진! 내가 사다 줄 수 있어! 내가 사다 줄까?”
“…어? 아니, 괜찮아.”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고동색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말하는 다비드에 진이 고개를 살짝 틀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니콜라스와 떠들었다.
진이 자신에게 별로 반응해주지 않자 다비드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도현이 그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아무래도 진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축제 날을 기점으로 달라졌지.’
지금도 니콜라스와 떠들면서 가끔가다 시선이 다비드에게 닿았다.
기가 죽은 다비드와 남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니콜라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현의 눈에는 보였다.
도현은 친구의 변화를 관찰하느라 몰랐다.
자신에게 찾아올 새로운 변화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