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65)화 (166/582)

제165화. 발아 發芽 (1)

계기는 사소했다.

축제가 끝나고 며칠 뒤.

일상으로 돌아온 도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영화 출연이 취소되었어요.]

그 짧은 문자에, 에드워드는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도현에게 이토록 잘해줄 이유는 없건만, 에드워드는 한결같이 도현에게 친절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얘기해주며 도현의 심정에 공감해 주었다. 도현은 그의 위로를 듣고 나서 자신이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그런 무례한 인간은 신경 쓰지 마. 네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 말에 도현은 자신이 에드워드에게 데이비스 감독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건 아닌지 잠깐 고민해야 했다.

-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올 거야. 장담하건대, 그 감독은 널 놓친 걸 분명히 후회하게 될걸.

여유로운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도현은 에드워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감각을 받았다.

- 그래도 좀 아쉽네.

- 뭐가요?

- 네 연기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말이야.

정말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에드워드의 위로에 고마움을 느끼던 차였다. 뭔가 해주고 싶어도 그와 자신의 위치 차이가 심해서 해줄 게 없었는데 그가 바라는 걸 들어줄 방법이 생각났다.

- 저 얼마 전에 학교에서 연극을 공연했어요. 그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을 텐데, 궁금하면 한번 보실래요?

- 정말? 어디서 볼 수 있는데?

-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요. ‘델마 아카데미 로미오와 줄리엣’을 검색하면 나올 거예요.

- 로미오와 줄리엣! 고전이지. 한때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말이야…. 너는 무슨 역할을 맡았어? 로미오?

- 어… 아뇨.

- 그래? 주연을 맡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럼 무슨 역할인데?

- 줄리엣이요.

- 오….

잠깐 침묵하던 에드워드는 잠시 후 아주 유쾌하게 웃었다.

- 이거 꼭 봐야겠는걸!

도현은 에드워드를 따라 웃었다. 그가 기뻐하는 걸 보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도현은,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몇 만이라고요?”

- 백오십만이요, 미스터 리. 지금도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고요. 아, 이제 백팔십만이네요.

하루아침에 유튜브 조회 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숫자를 기록했다.

에드워드에게 영상을 알려줄 때까지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전개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연극 영상을 본 에드워드는 곧바로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분이나 그에 대한 감상과 칭찬을 늘어놓더니 이 영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도현은 당연히 주변의 몇 사람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이해했다.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으나, 친구들과 열심히 만든 무대를 부끄러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도현의 생각과 달리, 자기 SNS 계정에 도현의 연극 영상 링크를 올렸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도현은 인터넷을 보고 있으면서도 영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 에드워드잖아요. 할리우드에서 몸값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스타요. 그의 계정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백오십만. 아니, 백팔십만.

도현에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숫자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연극을 봤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현은 이 문제를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도현과 같지는 않았다.

“우, 우, 우리 영상 본 사람 숫자 봤어…?”

니콜라스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기색이었다.

3학년 연극 팀 영상은, 말 그대로 학교에서 핫이슈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지칠 줄 모르고 오르는 뷰 수에 어디까지 오르나 내기하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줄리엣!”

옅게 주근깨가 뿌려진 얼굴 위로 흥분이 감돌았다. 달려온 건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도현은 그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도현이 태연히 말했다.

“알았어요.”

“정말?! 아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인터뷰를 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오, 맞아! 어떻게 안 거야?”

그야 뻔하니까요.

도현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근데 인터뷰이는 한 명 더 필요해! 아! 저기 있다! 로미오!”

친구들과 모여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던 다비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안녕, 로미오! 우리 안면 있는데 날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전에 벽화 낙서 범인으로 몰렸을 때도 봤고, 2HV 활동도 같이했거든! 혹시 내가 누군지 아니?”

갑자기 쏟아진 말에 당황하던 다비드가 답했다.

“이름은 모르고 얼굴은….”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넌 다비드 데니얼이지? 난 앨리슨이야! 앤이라고 불러도 되고! 너를 좀 인터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나, 나를?”

다비드가 입을 벌렸다.

“응!”

다비드는 잠깐 고민했지만, 그 옆에 있던 윌리가 다비드의 등을 떠밀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이들이 제게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왠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어깨가 으쓱했다.

내심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이 싫지 않았던 다비드는 옅게 상기된 얼굴로 수락했다.

“…왜 여기 있냐?”

“나도 인터뷰하기로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쟤도 주연이었지.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다비드가 머쓱함을 숨기려 괜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 둘 다 왔구나! 와줘서 고마워! 점심은 잘 먹었니? 여기! 너희 주려고 가져왔어!”

앨리슨이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간식거리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나름 이런 일에 익숙해진 도현은 편안하게 대답했지만, 처음 인터뷰를 해보는 다비드는 말을 버벅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중에 가서는 익숙해졌는지, 나름대로 유창하게 말했다. 도현은 다비드가 관심을 받는 일에 능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해 줘서 고마워! 줄리엣은 원래 인기 많은 거 알았는데, 너도 되게 인기 많을 거 같다! 아마 인터뷰 나가면 더 많아질걸!”

다비드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도현이 눈에 담았다. 요즘, 도현은 종종 진과 다비드를 관찰하듯이 보곤 했다.

앨리슨이 활기차게 인사하고는 떠났다. 도현과 다비드도 반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아리실에서 나왔다.

다비드의 뒷모습을 보던 도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다비드.”

“…왜?”

도현이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어깨를 움찔한 다비드가 아닌 척 태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싫… 아니, 뭔데?”

싫다고 말하려던 다비드가 재빨리 정정했다.

2HV부터 연극까지. 겹치는 활동이 많아지면서 절대 가까워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서로 보기만 해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윌리처럼 친한 친구가 된 건 아니었다. 이젠 그냥 반 아이 1 정도로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지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저 로봇 같은 애가 자신한테 물어볼 게 뭔지 궁금했다.

“조금 무례일 수도 있어.”

“아, 됐으니까 그냥 물어봐!”

“…진을 왜 좋아해?”

우뚝.

앞서 나가던 다비드가 멈춰 섰다. 도현을 보는 얼굴엔 당황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미안.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당황이 지나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다비드가 조금 날 선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음… 아니야. 내가 괜히 물어본 거 같다. 잊어줘, 미안.”

도현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물어본 건 큰 이유는 아니었다.

도현이 연기한 줄리엣은 사랑을 불신하지만, 동시에 이상적 사랑을 그리는 인물이었다.

그 역할을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도현은 자연스레 사랑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졌다.

도현은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랑. 형의 기억을 들춰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감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도현의 바로 옆에, 그 감정을 티가 나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진조차 그 감정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 것 같았다.

도현의 싱거운 대답에 다비드가 뭐 이런 애가 다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냥 처음부터 좋았어.”

던지듯이 말한 다비드가 휙 몸을 틀어 앞으로 걸어갔다.

도현은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지만, 그가 대답을 해줬다는 것 자체가 약간 신기해 조금 웃기도 했다.

다음 날.

학교 게시판에 도현과 다비드의 인터뷰가 올라갔다. 그리고 유튜브 영상 조회 수는 조금 더 올라, 삼백만에 약간 못 미치는 숫자를 기록했다.

그건 델마 아카데미에서 다시 한번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거기까진 익숙한 전개였다.

벨벨벨- 벨벨.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도현이 저번 쉬는 시간에 니콜라스와 하다 만 이야길 나누려는데, 해리가 도현을 불렀다.

“도현, 다비드. 잠깐 따라와 볼래?”

“저요?”

다비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의아한 마음으로 해리를 따라갔다. 해리가 교무실로 향하자, 옛날에 지은 죄가 있던 다비드는 괜히 긴장했다.

그러나 해리가 꺼낸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티비 프로그램에요…?”

“응. Funny Video라고, 화제가 된 영상이나 흥미로운 제보 영상을 모아서 방송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을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학교 측에서 올린 거라 학교로 연락했나 봐. 너희 생각은 어때?”

Funny Video.

나름대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고, 오랫동안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해리만 해도 볼 게 없어서 TV 채널을 휙휙 돌리다가 이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 있을 정도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도현이었다.

도현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을 추렸다.

“그, 저희한테만 물어도 괜찮은 건가요?”

“아, 너랑 다비드가 나오는 장면을 방송하고 싶다고 했거든. 그, 로미오가 밤중에 캐플릿 저택을 찾아간 장면 말이야.”

“아….”

도현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괜찮은지 아닌지만 말해주면 돼. 괜찮다고 하면 내가 부모님께 연락드릴게. 부담스러우면 거절하고.”

도현이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난….”

다비드가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해리가 그런 다비드를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고민될 만도 하지.’

누구나 주목받고 싶은 욕구는 있기 마련이다. 그게 초등학생 정도 되는 어린아이라면 더욱.

하지만 주목도 어느 정도여야지.

유튜브도 한참 난리 나고 있는 통에 TV 프로그램이라니.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해리의 눈에 도현이 들어왔다.

잠깐 예상치 못한 소식에 놀랐을 뿐,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니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아, 있구나.’

해리는 잠시 제 생각을 정정했다.

“저는….”

그때, 다비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