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67)화 (168/582)

제167화. 발아 發芽 (3)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줄리엣과 로미오’]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연소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상을 수상해서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배우, 이도현의 근황이 공개되었다.

재학 중인 학교에서 축제 공연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에드워드 녹스의 SNS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서 Funny Video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최근 유튜브 조회 수가 육백만을 기록해….

(…)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잘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이 로미오를 더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면, 이 초등학교의 공연에서는 로미오보다는 줄리엣에 집중했다.

결혼과 외적인 사랑이 싫은 줄리엣과 낭만주의자 로미오, 거칠지만 동생을 아끼는 티볼트….

전하리 기자 [email protected]

한국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에 관한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졌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국의 아침 뉴스에서도 도현의 근황이 소개되었다.

한국은 아직 작년에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어린 배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건 비단 한국뿐만은 아니었다.

살랑.

시원한 바람이 조금 후덥지근해져 가는 공기를 환기했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잔디와 햇빛에 반짝이며 물결치는 수영장, 코끝을 스치는 코코아의 단내까지.

정원 테이블에 앉은 도현은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시끄러운 인터넷과 달리,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도현은 학교가 끝나고 이렇게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을 사랑했다. 조금만 더 읽고, 방으로 올라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생각이었다.

징-

[잠깐 통화가 가능할까요?]

도현은 문자를 확인하고 곧장 매독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매독스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 랜디 오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스터 리를 랜디 쇼 게스트로 초대하고 싶다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화제 된 연극 영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도현은 지난 기억을 꺼냈다.

에드워드가 소개해 준다고 했던 사람. 도현이 한 번 거절했던 토크쇼.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저번에도 도현에게 관심을 한번 보였을뿐더러, 이번에 유튜브는 도현이 생각하기에도 꽤 화제가 된 것 같으니까.

‘오히려 예상보다 연락이 늦은 편이지.’

이번 주 내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도현이 먼저 에드워드가 준 번호로 연락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Funny Video 측의 제안을 수락한 거였다.

해리와 다비드는 다비드의 선택을 따랐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저 다비드가 수락할 걸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거절했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도현이 설득했을 테니까.

- 저번에 에드워드 쪽으로 연락을 넣었는데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랜디 쇼는 문나잇 쇼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인기 있는 토크 쇼예요. 미국에 있는 토크 쇼 프로그램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죠. 가서 곤란한 일도 없을 겁니다. 랜디는 게스트를 존중해주는 진행자거든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현이 거절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토크 쇼의 이런저런 장점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건 헛수고였다.

“좋아요.”

도현은 거절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고민도 없이 나온 긍정의 답이 의외인지 매독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제 기분을 티 내지 않으며 차분히 말했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일정을 잡으면 알려 드리도록 할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은 도현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매독스의 염려가 아예 헛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허무하게 영화 출연이 취소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제안을 받았더라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거절했을 게 분명했다.

‘바보 같았지.’

도현은 그때의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기회가 있다면 잡아야 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특히, 도현처럼 올라갈 곳이 많은 사람은.

도현은 그걸 몰랐다.

축제가 끝난 후, 도현은 틈만 나면 생각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좋을지 홀로 고민했다.

명확한 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한 가지 행동 강령을 추가할 수 있었다.

도현이 첫 영화를 찍을 때, 유 역할을 따내기 위해 연습하면서 깨달았던 첫 번째 행동 강령은 주변을 잊지 말 것. 그리고 이번에 추가한 것은 최선을 다할 것.

광범위한 말이지만, 지금의 도현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홀짝.

도현이 코코아를 다시 한 입 마셨다. 달달한 초콜릿 향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맛이었다.

* * *

점심시간에 뒤뜰에서 진과 니키와 함께 노닥거리다가 반에 들어가자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 웅성대며 떠들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걸어간 도현은 그 중심에 있는 다비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줄리엣!”

누군가 도현을 반갑게 불렀다. 도현의 의아한 얼굴로 그쪽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헤더에게 묻자, 헤더가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다비드가 에이전시에 캐스팅됐어! 아까 학교로 와서 명함을 주고 갔어! 행정실에 따라간 애들이 봤대!”

“…진짜?”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진과 니콜라스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과연.

가까이 다가가니, 다비드의 책상 위에 곱게 놓인 명함이 보였다. 빳빳한 종이가 형광등을 받아 매끄럽게 반짝였다.

진의 시선을 받은 다비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조금 떨궜다.

“세상에! 다비드, 축하해! 너도 그러면 에이전시에 들어갈 거야?”

한동안 다비드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던 진이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의 질문에 다비드가 우물쭈물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

니콜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 눈물 연기를 보고도 캐스팅하다니. 눈이 발바닥에 달린 거 아니야?”

“넌 명함 안 받아서 질투하는 거지?”

다비드가 곧장 받아쳤다. 니콜라스가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받아도 난 그런 거 할 마음도 없거든! 수영하기도 바쁜데 무슨!”

“받고 나서 말하시지?”

“겨우 캐스팅된 거로 엄청 잘난 척하네! 도리는 이미 에이전시에 들어간 지 오래인 데다가 상까지 탔거든?”

거기서 왜 내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비드는 왜 또 졌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지 더더욱 모르겠다.

도현이 묘한 표정을 짓는데,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쳤다. 모여 있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도현도 자리로 가서 교과서를 꺼냈다.

이번 시간은 수학이었다.

* * *

“여기서 5를 곱하면….”

다비드는 도통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교과서 사이에 끼워둔 명함이 자꾸만 신경 한구석을 갉작였다. 결국 다비드는 명함을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KCL….

다비드가 심란한 눈으로 명함을 노려보았다.

Funny Video에 영상이 나가고 유튜브 조회 수가 오르는 걸 보면서, 엄마가 이러다가 우리 아들 연예인 되는 거 아니냐고 하기는 했다.

그때 다비드는 우쭐하면서도 괜히 민망해서 그럴 리 없다고 큰소리쳤다.

‘근데 진짜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싫은 건 아니다. 다비드를 찾아온 남자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좋다고 말할 뻔했다.

스타성이 보인다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스타로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에 진이 떠올라 솔직히 혹했다.

다비드는 방금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던 진을 떠올렸다.

‘그냥 한다고 할까?’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다비드의 눈이 은근슬쩍 진을 쫓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필기를 하는 도현에게 닿았다.

다비드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 일이 재생되었다.

- 매독스, 저 도현이에요.

능숙하게 에이전트와 이야길 주고받던 모습.

이어서 연극 연습 때 아이들을 지도하던 모습까지도 떠올랐다.

다비드는 자신이 유일하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다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좀….’

내면의 자존심이 그건 허락하지 못한다며 뻐팅기던 때였다.

- 너는 진을 왜 좋아해?

황당했던 기억이 자동 재생되었다. 뜬금없는 상대가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뇌리에 강하게 남은 기억이었다.

‘…쟤도 나한테 물었는데 난 못 할 게 뭐야!’

구실을 잡은 다비드가 얼굴을 폈다.

아무도 질문하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없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다비드였다.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 다비드는 아이들이 붙잡기 전에 빠르게 도현의 자리로 갔다.

“야.”

교과서를 정리하던 도현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에 희미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할 얘기 있는데 잠깐 나와.”

“…그.”

도현이 대답하려던 때였다.

“너 뭐야! 너 도리한테 시비 거냐?”

다비드가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이 명함으로 가득 차서, 도현의 앞자리가 니콜라스란 걸 까먹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무슨! 내가 아까 한 말 때문에 도리한테 괜히 싸움 거는 거지?”

아까 한 말?

다비드가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다가, 이내 니콜라스가 말싸움할 때 도현을 들먹였던 걸 떠올렸다.

다비드의 얼굴에 어처구니없음이 떠올랐다.

‘쟨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딴 걸로 사람에게 싸움을 걸진 않는다. 기가 막힌 다비드가 니콜라스에게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스, 그거 때문이 아닐 거야. 나 잠깐 다비드랑 대화하고 올게.”

못마땅해하는 니콜라스에게 낱개로 포장된 쿠키 하나를 까서 물려준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콜라스는 다혈질적인 성격과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한테 매너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자라 먹을 때는 말을 안 하는 편이었다.

니콜라스가 쿠키를 다 먹기 전에 도현이 다비드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무사히 반을 빠져나왔다.

도현이 너무 순순히 따라와서 다비드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라이브러리 존이었다.

아이들이 비밀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애용하는 장소였다. 도현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으러니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괜히 딴청을 피울 때였다.

“에이전시 때문에 그렇지?”

“어? 어, 맞아.”

“뭔데? 나도 별로 아는 건 없어. 웬만한 건 네게 명함을 준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아는 거라면 알려줄게.”

얘는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아니지. 명함을 받고 바로 다음 시간에 불렀으니 상황이 뻔했겠구나.

머저리같이 군 게 부끄러웠다. 괜히 제 머리카락을 한번 턴 다비드가 입을 열었다.

“그, 너는 배우 왜 한 거야?”

이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내내 잔잔하던 눈이 조금 커졌다.

“…하고 싶으니까?”

불성실한 대답에 다비드가 얼굴을 구길 때였다. 도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배우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연기가 하고 싶은 거지.”

“그게 달라?”

“글쎄….”

모호하게 답한 도현이 슬쩍 웃었다.

“배우는 내게 수단이고, 연기는 목적인 거야.”

뭐라는지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다비드는 대충 이해한 척을 했다.

“그럼 연기가 왜 하고 싶은 건데?”

“그게 아니면 안 되니까.”

이번에는 곧장 대답이 나왔다.

다비드를 보는 검은 눈동자와 흔들림 없는 목소리는 조금의 해석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했다.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인데, 왜인지 다비드는 몇 초간 도현을 쳐다보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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