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68)화 (169/582)

제168화. 발아 發芽 (4)

풀썩!

침대 위에 몸을 쓰러지듯 뉘었다. 보들보들한 이불에 머리카락을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셀리, 놀라운 일이 있어. 우리 아들이….”

희미하게 엄마가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꼬리가 우쭐 올라가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엄마의 자랑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

다비드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모르겠다.

기껏 이도현에게 물어봤는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된 느낌이었다.

다비드가 베개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벌떡!

흐물흐물하게 쓰러져 있던 다비드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으로 가서 선 후, 제 옷차림을 한번 점검했다.

‘머리카락이 조금 떴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살살 정리했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초콜릿 같은 색의 머리카락은 보기에 좋았지만, 조금만 뭉치거나 떡 져도 며칠은 안 감은 사람처럼 기름져 보이는 게 단점이었다.

“좋아.”

거울을 본 다비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울 속에는 호쾌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방구석에 놓인 기타 가방을 어깨에 멘 다비드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엄마는 여전히 거실에서 통화 중이었다.

“그러니까, 다비가… 어? 다비드, 어디 가니?”

“음악 학원 가는 날이잖아.”

“아, 참! 내 정신 좀 봐. 셀리,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다비드 학원에 데려다줘야 할 시간이네.”

몇 번 대화를 주고받던 엄마가 전화를 끊었다. 다비드는 괜히 애타는 기분에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는 재촉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지금 가도 안 늦는데 매번 유난이라니까. 나가자.”

뒷좌석에 기타 가방을 먼저 올린 후, 조수석에 탄 다비드가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낀 엄마가 다비드와 똑 닮은 초콜릿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어깨 뒤로 흘러내렸다.

핸들 위에 손을 얹고 손가락을 기분 좋게 까딱거리자, 길게 기른 손톱 위에 붙은 큐빅이 반짝였다.

잠시 후,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러면 우리 아들도 이제, 그 같은 학교에 도윤? 아닌데….”

“도현.”

“아, 맞아. 도현. 도현이라는 애처럼 슈퍼스타가 되는 건가?”

“몰라.”

시큰둥하게 답하던 다비드가 미간을 좁히더니 덧붙었다.

“그리고 걔가 무슨 슈퍼스타야?”

“그 정도면 슈퍼스타지. 요즘 걔 모르는 사람들이 없던데?”

“이 동네에서나 그렇겠지.”

“그런가?”

다비드가 극구 부인하자 그녀도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하긴. 네가 연기를 시작하면 분명 그 애보다 유명해질걸?”

“내가?”

“응. 허니비, 네가….”

“악! 그렇게 부르지 마!”

“어휴, 그래, 다비. 됐니? 조금 컸다고 까칠하게 굴고 말이야. 요만했던 주제에.”

소리 높여 웃는 엄마에 다비드가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나이가 몇 갠데!’

남들 앞에서 허니비라고 불리는 걸 들키면 그 순간 그의 이미지는 끝장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치는데, 부드럽게 좌회전을 한 엄마가 말했다.

“아무튼 다비. 솔직히 네가 그 애보다 못한 부분이 어디 있니? 저번 축제 때 보니까, 애가 예쁘긴 한데 너무 여자애 같더라. 다비, 네가 훨씬 더 잘생겼어.”

“…정말?”

“그럼. 네가 누굴 닮았는데, 당연한 일이지.”

다비드는 진의 옆에 있는 남자애와 자신을 비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쟤보단 내가 낫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안심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도현은 다비드가 최근 가장 비교를 많이 한 상대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도현은 델마 아카데미에서 아마 제일 잘난 놈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난 상대와 비교를 계속하다 보면, 아무리 자존감과 자존심이 높은 다비드더라도 조금쯤은 자격지심과 초조함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더 잘생겼다는 엄마의 말에 다비드의 얼굴이 풀렸다. 다비드가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너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게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네가 그쪽에 통 관심이 없으니까 내가 말을 안 했지. 그리고 그 애는 연기도 잘하긴 하던데… 별로 특별한 것도 없던걸? 너도 연기 배우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어.’

다비드가 멈칫했다.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부정할 뻔했다.

‘내가 걔 편을 왜 들어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엄마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만약 다비드가 도현과 같이 연극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2HV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듣고 수긍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도했건 아니건, 다비드는 도현이 연기하는 모습과 연기를 대하는 자세를 옆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붕붕 떠오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명함을 받고 나서, 에이전시에 연락할지 말지 고민한 후로 처음으로 해보는 생각이었다.

‘내가 걔만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연기 실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연기만 시작되면 미친 사람처럼 몰입하던 걔처럼, 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대사를 읊어놓고도 부족하다는 듯이 눈매를 찌푸리던 걔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

“응? 뭐라고 했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비드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기는 분명 재밌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열정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열정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비드의 주변에 비교군은 도현밖에 없었다. 아니면 니콜라스 정도였다.

두 사람은 자신의 길에 놀라우리만치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성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비드는 그걸 몰랐다.

자연스럽게 다비드는 도현과 니콜라스와 자신을 비교했고, 이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연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관심받는 게 좋을 뿐이었다.

자신감을 주려던 엄마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기 성찰을 하게 된 다비드였다.

“자, 도착했다.”

어느새 차는 음악 학원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린 다비드가 뒷좌석에서 기타 가방을 꺼내 들었다.

“이따가 다시 데리러 올게.”

“응, 잘 가.”

다비드가 손을 설렁설렁 흔들자, 엄마가 마주 인사하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다비드는 익숙하게 음악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온갖 악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데스크에서 인사를 하고 기타를 배우는 교실로 들어갔다. 조금 일찍 온 탓인지 아직 한 명밖에 없었다.

“다비드, 안녕!”

“어, 안녕.”

대충 인사해준 다비드가 의자에 앉아 기타를 꺼내 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딩-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딩, 딩, 딩. 반복해서 튕길 때마다 조금 엇나가던 음이 차차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작년 여름 방학에 진을 따라 배우기 시작했으니 기타를 배운 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다.

선생님은 다비드에게 박자 감각이 뛰어나다고 여러 번 감탄했는데, 정작 다비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비드가 기타를 배우는 건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디리링.

엄지손가락으로 위에서부터 줄을 쓸어내리자 조화로운 음색이 퍼져 나갔다. 튜닝을 맞춘 후 음과 음이 완벽하게 맞물려 떨어지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보면대를 하나 가져와 악보를 펼쳐서 고정해 놓는데, 딸깍이며 앞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다비드는 실내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에 얼굴을 활짝 폈다.

“진!”

“어? 다비, 일찍 왔네? 안녕.”

음악 학원에서 진은 학교에서보다 다비드를 좀 더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다비드의 애칭을 부를 때도 있었다.

진이 한쪽에 정렬된 보면대 하나를 끌고 와 자연스럽게 다비드 옆자리에 앉았다.

검은색 기타 가방에서 다비드보다 조금 밝은 색의 기타를 꺼내 튜닝을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옆얼굴을 살짝 가렸다.

다비드가 바보 같은 얼굴로 그 옆모습을 보았다.

그날도 그랬다.

맑은 하늘과 다르게 비가 내리는 이상한 날이었다.

* * *

초등학교 첫 입학식 날.

기념비적인 날이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싸운 다비드는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입학식에 같이 가주기로 했으면서 전날에 술을 너무 마셔서 속이 안 좋다며 안 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걸 보면서 다비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또래보다 큰 아이가 심술궂은 얼굴로 앉아 있으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는 음역대가 상당히 높다. 그게 여자아이라면 더했다.

하지만 그 애의 목소리는 특이하게도 조금은 낮고, 허스키한 편이었다. 그 목소리는 시끄러운 아이들 틈에서도 유독 튀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소리가 멎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던 순간.

- 안녕?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다비드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못 들은 줄 알았는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실내등 아래에서도 태양같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안녕. 내가 네 옆자리인가 봐.

- …안녕.

- 난 지니 레이시야. 진이라고 불러줘.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하는 여자애에 불쑥, 못난 마음이 튀어나왔다.

- 내가 왜?

스스로 듣기에도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말을 내뱉고 나서 한 박자 늦게 당황한 다비드가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비드는 조금 울고 싶었다.

아침부터 엄마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초등학교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애, 그것도 짝과 사이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보다 최악일 수가 없었다.

화를 낼까? 아니면 울까?

조금 체념한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진의 반응은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 음. 내가 그걸 바라니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나는 너랑 한동안 옆자리일 테니까 좋은 사이로 지내는 편이 낫고 말이야.

유들유들하게 웃는 낯이 혼연했다. 눈이 부실 지경인 머리카락과 다르게 평범한 눈동자는 여전히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걸까?

멍한 얼굴을 하던 다비드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떠름한 기색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잘 부탁한다고 말한 진이 뒷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인사한 것처럼 말을 걸기 시작하는 진을 힐끔, 힐끔 훔쳐보았다.

‘특이한 애.’

그렇게 생각하면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날 때부터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다비드가 옆자리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비드를 쳐다보고 있던 진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움찔!

어깨를 들썩인 다비드가 재빨리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채였다.

‘왜,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진은 틈만 나면 그를 쳐다보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건지… 불편해서 숨 쉬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잠깐, 나 지금 제대로 숨 쉬고 있는 거 맞지?

다비드는 이 감정을 불편함과 어색함이라고 이해했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 자꾸 쳐다보면 어색한 게 당연했다.

그러면 쳐다보지 말라고 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려고 할 때면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입술이 옴짝달싹을 안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괜히 미간을 좁혔다.

이 미묘하게 신경을 긁는 상황이 변화를 맞은 건, 밸런타인데이였다.

- 자, 선물이야.

다비드는 손바닥만 한 상자에 담긴 초콜릿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자에는 조그만 초콜릿이 네 개가 있었는데, 다비드의 시선은 그중에서 오른쪽 위에 있는 초콜릿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분홍색 하트 모양 초콜릿.

다비드의 얼굴색이 점차 하트 모양 초콜릿색으로 물들었다.

‘혹시….’

날 좋아하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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