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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69)화 (170/582)

제169화. 발아 發芽 (5)

이미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흩어진 구름이 다시 뭉치더라도 전과는 같을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변화를 겪은 것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불편했던 감정을 호기심과 어색함이 아니라 호감으로 연결한 순간부터, 덫에 걸려버렸단 걸 알기에는 소년은 미숙했다.

힐끔.

다비드가 진을 곁눈질했다.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진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살짝 커진 갈색 눈동자가 이내 익숙한 호선을 그렸다. 웃을 때 볼에 옅게 뿌려진 주근깨가 위로 밀려 올라갔다.

눈을 끔뻑이며 그 광경을 보던 다비드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나 방금 엄청 멍청한 표정 짓고 있었던 거 같은데.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비드가 손을 들어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입꼬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착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그걸 도와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비드는 정말 억울했다.

쟤는 왜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을 아는 거지? 음식은? 즐겨 입는 옷은 왜 또 아는 건데? 내가 지우개 잃어버린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러니까 나는 꼭, 네가 날 좋아하는 것 같잖아.

진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헷갈리는 건지도 모호했다.

딱 떨어지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온갖 애매모호한 감정과 생각 때문에 다비드는 매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발은 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결정적인 건 시간이 흘러, 봄에서 여름으로 조금씩 넘어가는 어느 날, 열린 교실 창문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을 만들어내는 날이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 한가운데서 다비드는 감정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다비드의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신이 나 재잘댔다.

- 그래서 우리 아빠가….

이보다 불편한 주제가 있을 수 있나.

주변을 흘긋, 보고는 최대한 아이들의 표정을 따라 했다. 이상하지 않게, 평범하게.

다비드는 몇 초 후 이 선택을 후회했다. 차라리 불편한 티를 낼걸.

- 다비드 너는?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면.

대여섯 되는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소년에게로 쏠렸다. 다비드는 제발 당황한 게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머리를 굴렸다.

거짓말할까?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면 그대로 말해?

내가 한 살 때 이혼해서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보내주는 게 다라고? 아빠 얼굴도 기억 안 난다고?

자신은 아무런 감흥 없지만, 타인에게는 다른 감상이 들 게 분명했다. 자존심이 드높은 소년은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시간은 흐르고, 분위기는 이상해져 갔다.

그때였다.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는 요즘 다비드가 매일같이 떠올리는 소녀의 것이었다.

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이야기하자, 금방 화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아무도 다비드에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비드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남들에게 불쌍해 보일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은 평소의 밝은 얼굴로 아이들과 떠드는 중이었다.

그러나 진을 유심히 관찰해온 다비드는 알았다. 진은 누군가의 말에 끼어드는 성미가 아니었다.

‘우연이 아니야.’

무언갈 눈치챘을까 싶어 부끄러웠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아마 수치스러움 탓일 거다.

‘그런데 쟤는 날 왜 도와줬을까? 내가 기분이 나쁜 건 어떻게 알았을까? 왜….’

시선이 따가웠는지, 진이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갈색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맑고 투명했다.

아.

다비드는 진의 감정을 내내 의심하고 끊임없이 검증하려 들었던 태도를 그만두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너는 날 좋아해.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괜히 어깨가 위로 올라가고 입꼬리가 푸들거렸다. 그날 이후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푸슬푸슬 웃음을 흘리던 다비드가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왜 고백을 안 하지?’

부끄러워서 그런가? 아니면 고백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구는 걸까? 사실 그 초콜릿이 그런 의미였다면….

다비드는 알 수 없는 조급증이 일었다.

혹여나 내가 찬 줄 알고 포기하면 어떡하지? 아니, 받아 주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는데.

앞뒤가 안 맞는 것도 모르고 생각을 이어가던 다비드의 귀에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다.

- 오늘은 네가 쿠키를 가져왔으니까 내일은 내가 가져올게!

다비드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생각해 보니, 답례하면 될 일이었다! 혼자만 먹고 입 닦는 건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 치사한 것 같았다.

그래, 초콜릿을 준비하는 거다. 초콜릿을 주면서 널 찰 생각은 아니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다.

다시 생각해도 훌륭한 계획이었다. 다비드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홀로 표정이 이리저리 변하더니, 이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다비드를 진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선.

‘초콜릿은 사주면 되겠지?’

룰루랄라 계획을 짜던 다비드가 멈칫, 굳었다.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는 건 너무 정성이 부족하지 않나…?’

필기체로 쇼콜라티에의 이름이 써진 고급스러운 검은색 상자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혹시 체온 때문에 초콜릿이 녹을까 황급히 손을 뗐다.

결국, 다비드는 엄마를 닦달해 직접 초콜릿을 만들었지만, 결과물이 너무 엉망이라 진에게 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엄마를 닦달해 유명한 쇼콜라티에의 초콜릿을 구매했다.

엄마는 굉장히 흥미로운 얼굴로 다비드의 닦달을 모두 들어주었다.

괜히 긴장이 되어 손바닥에 땀이 스며들었다. 서랍 속에 놓인 초콜릿이 나를 잊지 말라며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아, 알았다고.

초콜릿에게 조용히 하라며 속으로 일갈한 다비드가 진을 불렀다.

- 왜?

- …이거.

쭈뼛대며 내민 초콜릿 상자에 진의 눈이 커졌다.

- 초콜릿이구나! 나 주는 거야?

- 그, 저번에… 네가 준 초콜릿,

- 아, 그거? 그거 때문에 준 거야? 그럼 이거 엄마랑 나눠 먹어야겠다!

나눠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니 기왕이면 진만 먹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근데 거기서 엄마가 왜 등장하는 걸까?

다비드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진이 해맑게 말했다.

- 그 초콜릿 엄마가 짝꿍 주라면서 챙겨준 거거든! 다비드? 너 어디 안 좋아?

쿠과강!

어디선가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 천둥 번개는 다비드의 정수리에 직격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정신이 혼미한 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 다비드? 저기?

그러니까, 말하자면 첫 번째 전제부터 틀려먹었던 거다.

그 분홍색 하트 모양 초콜릿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진이 준 것도 아니었으니까!

기반이 되는 근거가 뒤집혔으니 그 위에 쌓은 증거들도 무용지물이었다.

다비드가 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깨끗한 눈이었다. 여태껏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아, 대차게 착각했다.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밤에 떠오를 때면 이불을 뻥뻥 걷어찼다. 진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미친놈. 찰 생각이 아니었고 포기하지 말라니. 정말 말했으면 그날로 학교 그만둘 뻔했다.

다비드는 다시금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문득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잘해준 건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원망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원망과 부끄러움, 그리고 뭔지 모를 감정으로 뒤범벅이 되어 도저히 진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다비드는 진을 피해 다녔다.

진이 옆자리인 이상 피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진은 다비드가 피하는 걸 알았는지, 무리해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비드는 마음 놓고 진을 피할 수 있었다.

가끔가다 ‘그래도 왜 피하는지 물어봐 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이성이 ‘너 미쳤냐?’ 물어와서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비드가 진을 피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는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우산이 없는 아이가 태반이었다.

다비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아이들이 옷이나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가리고는 스쿨버스로 뛰어갔다. 교문 앞에 선 다비드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잠깐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빨리 뛰어가서, 집에 가면 바로 샤워를 해야겠다.

다른 아이들처럼 손바닥으로 대충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려던 때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다비드, 우산 없지?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지척에서 태양처럼 밝은 미소가 보였다.

다비드는 숨을 들이켰다.

- 스쿨버스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아빠가 조금 늦게 와서 어차피 기다려야 하거든.

다비드가 미동 없이 있자 진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다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매를 찡그렸다.

- 혹시 내가 싫은 거면….

- 아니야!

곧장 나온 대답에 진은 조금 의외란 눈을 하다가 주근깨를 찡긋이며 웃었다.

- 그럼 갈 거지? 스쿨버스 출발하겠다. 얼른 가자.

다비드는 노란색 우산을 같이 쓰고 진과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손가락 한 뼘 정도의 틈이 있었다.

스쿨버스로 가는 길은 화단에 꽃이 가득 심겨 있었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에 한층 진해진 꽃내음이 풍겨왔다.

우산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커서 다행이다.

조용했다면, 다비드의 심장이 시끄럽게 굴고 있는 걸 진에게 들켰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진은 날 좋아하지 않는데 왜 여전히 심장이 뛰는 거지?

지금은 부끄러운 상황도 아닌데….

다비드는 처음으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소년이 혼란에 젖어 동요할 때였다.

- 어. 비 멈춘 거 같은데?

진이 우산을 옆으로 내렸다.

노란색 우산이 드리운 그늘이 사라지자, 살짝 숙인 고개를 따라 금가루 같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옆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잦아든 빗줄기 사이로 어슴푸레한 햇빛이 발그레한 뺨 위로 어렴풋이 흔들렸다.

화려한 머리색에 비해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갈색 눈동자는 빛을 받으니 언뜻 금색처럼 빛났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꽃들은 평소보다 선명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한 초록색의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톡.

잎사귀에 떨어진 빗방울이 끝에 대롱대롱 맺혔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다비드는 땅에 떨어진 게 빗방울이 아니라 심장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비드는 깨달았다.

바닷물이 증발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이 뭉쳐 빗물이 되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비가 꽃잎을 타고 떨어져 다시 땅에 스며드는 것처럼 섭리와 같은 깨달음이었다.

나는 널 좋아해.

받아본 적 없는 섬세한 관심이 좋았을까, 아니면 네 태양 같은 웃음, 혹은 상냥한 배려와 활발한 성격 때문일까. 어쩌면 그 모든 게 없었더라도 네가 좋았을 수도 있겠다.

이미 공정성을 잃어버린 판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번 벌어진 일에 대해서 원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만, 비에 젖은 꽃잎 같은 감정에 휘말리고 말았다.

* * *

이제 알겠다.

- 그게 아니면 안 되니까.

나도 있어.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게.

딩, 딩. 기타 줄을 퉁기며 놀던 진이 문득 다비드를 돌아보았다.

다비드는 얼핏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후련하게 웃었다.

* * *

도현은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책상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사람은 다비드였다.

“야. 고맙다.”

“…어?”

도현의 눈이 당황으로 인해 커졌다. 잠시 제 귀를 의심했지만, 잘못 들었다기에는 너무 또렷했다.

음, 그래.

다비드가 정말로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했구나.

침착하게 받아들인 도현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에이전시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결정한 거야?”

“응. 안 하기로 했어.”

그렇게 답하는 다비드는 아주 산뜻해 보였다.

‘결국 그렇게 됐나.’

도현은 조금 아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솔직히, 다비드와 함께 연기하는 건 재미있었다. 내심 그가 배우의 길로 들어서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도현은 애써 아쉬움을 접었다.

“왜 안 하는 건데?”

음, 접으려고 했는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다행히 다비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배우 되면 바빠지지?”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도 빠지고, 방과 후 시간도 할애해야 하고? 친구 만날 시간도 적어지고 말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영화 찍을 때 수업 자주 빠졌거든. 친구랑도 자주 못 놀았고.”

“그래서야.”

다비드가 씩 웃었다.

“네가 그랬잖아. 배우는 수단이고 연기가 목적이라고. 나한테는 배우가 적절한 수단이 아니야.”

가슴을 내밀며 말하는 폼이 꽤 당당하다.

다비드는 자신만의 확신을 찾은 거 같았다. 도현이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핀 후 슬쩍 물었다.

“진 때문이지?”

“무, 뭐? 어떻게 알았… 아니 이게 아니라!”

붉어진 얼굴을 한 다비드가 허둥지둥 대자 도현이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다비드가 조용히 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두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평범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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