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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70)화 (171/582)

제170화. 발아 發芽 (6)

아, 긴장된다.

의자에 앉은 도현이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거울 속에는 약간 초조해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도현은 지금 <랜디 쇼> 스튜디오 대기실에 와 있었다.

첫 촬영 때도, 첫 오디션에도, 하다못해 첫 시상식과 첫 인터뷰까지. 모든 걸 태연한 심정으로 해냈던 강심장인 도현도 토크 쇼만큼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매니저를 구하지 않아서 에이전트인 매독스와 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미리 논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인터뷰랑 다를 게 뭐가 있냐면서 다소 시큰둥하게 굴었다. 그러나 도현이 보기엔 인터뷰와 토크 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인터뷰는 일종의 정보 전달이라면, 토크 쇼는 말 그대로 쇼였다.

인터뷰에서는 사람들을 웃길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인터뷰를 찾아보는 사람들은 모두 인터뷰이에게 궁금한 게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토크 쇼는 달랐다. 오히려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후우….”

도현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스타일링을 마친 머리카락이 눈가로 흘러내려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웠다.

“도현아, 긴장하지 마. 엄마가 보기에 우리 아들 오늘 진짜 완벽하거든.”

매니저 역할로 따라온 서혜나가 도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작 긴장하지 말라고 말하는 본인도 잔뜩 굳은 기색이라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서혜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줄리엣 영상으로 아들이 예쁜 건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았으니 이제 잘생김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하에 눈썹이 살짝 보이도록 한 스타일링 덕분에 반듯한 이마 선과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도현은 단정히 이마와 눈썹을 가리면 섬세한 눈매가 돋보여 중성적인 느낌이 강해지는 반면, 이마를 드러내면 보다 인상이 뚜렷하고 강해졌다.

거기다가, 조금 밝고 쾌활해 보이는 게 좋겠다는 도현의 의견을 따라 흰 티 위에 가슴 쪽에 가로로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가 있는 밝은 톤의 연노란색 카디건을 입었다. 그 덕에 피부가 한층 밝고 깨끗해 보였다.

누구 아들인지.

금방이라도 파도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청량한 소년이 거기 있었다.

웃으면 정말 예쁠 것 같은데, 긴장한 탓에 얼굴이 굳어져 있는 게 약간의 흠이었다.

서혜나는 긴장한 도현을 위해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번 토크 쇼 끝나고 시간 날 때 매니지먼트 회사 방문해볼까?”

“매니지먼트 회사요?”

“응.”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긴 하지만, 마침 필요성을 느낀 탓도 있었다.

그동안은 도현이 딱히 활동한 게 없어 느긋하게 굴었다. 그러나 오늘, 토크 쇼 스튜디오에 방문하면서 서혜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스튜디오는 온갖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어지러웠다. 다들 바빠서 이쪽에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서혜나와 도현은 그 낯선 분위기에 알아서 적응해야 했다.

매니저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도현도 그녀와 같은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니 도현의 얼굴이 점차 편안하게 풀려갔다. 안색이 좋아진 도현을 보고 서혜나가 싱긋 웃었다.

똑똑똑.

“도현 리. 5분 후에 나오세요.”

“알겠어요!”

큰 소리로 대답하자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멀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서혜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모습을 정돈했다.

스타일링은 모두 서혜나가 해주었지만, 메이크업은 스튜디오에서 도와주었다.

메이크업이라고 해봤자 피부 톤 정돈과 눈썹 정돈, 립밤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얼굴은 훨씬 깔끔해 보였다.

징-

[진 레이시 : 토크 쇼 힘내!]

[진 레이시 : 나 지금 니키 집에서 같이 TV 보는 중! 근데 그냥 집에서 볼 걸 그랬어. 니키 너무 시끄러워 :(]

[맥 버클러 : 야야, 엄마가 무슨 채널이냐는데.]

[맥 버클러 : 채널 어디 틀어야 해?]

징, 지잉-

아무래도 도현의 지인들은 모두 생방송을 챙겨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도현은 남은 시간을 체크하고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아빠 : 우리 아들 파이팅!!]

아빠의 응원 메시지까지 확인하고 도현은 핸드폰을 덮었다. 다시 고개를 든 얼굴에는 한결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요.”

“그, 그래!”

도현과 서혜나가 대기실을 나오자, 스태프가 금방 그를 데리러 왔다.

“미리 들어서 알고 있지? 랜디가 소개하면 바로 등장하면 돼.”

“알겠어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으며 걷자 금방 무대 뒤편에 도착했다.

무대에서 랜디가 무어라 말을 하고 있고, 맞은편에는 방청객들이 앉아 있었다. 그 주변에는 생방송 중인 카메라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작년에 혜성처럼 나타나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연소 수상자 타이틀을 단 배우이자, 화제의 <로미오와 줄리엣> 영상의 주인공, 도현 리입니다!”

짝짝짝짝!

방청객 쪽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스태프가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도현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박수 소리가 한층 진해졌다. 도현은 긴장하던 기색을 지우고 얼굴에 미소를 베어 물었다.

“반가워요, 리.”

“저도 반가워요, 랜디.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랜디가 도현에게 다가와 그를 살짝 껴안으며 말하는 것에 도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박수 소리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았다.

도현이 랜디를 응시했다. 편안한 의상을 입은 랜디는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드디어 보는군요.”

도현이 의아한 낯을 하자 랜디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 작은 신사분한테 몇 달 전에 러브콜을 보냈다가 대차게 차였거든요.”

“어… 그,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유들유들한 진행자와 당황한 게스트에 방청객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랜디가 짓궂게 물었다.

“당신이 신비주의로 불리고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신비주의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랜디가 자연스럽게 설명하듯이 방청객 쪽을 보고 말했다.

“여러분, 여기 계신 분은 시상식 인터뷰를 제외하고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습니다. 제 토크 쇼 말고도 다른 프로그램 출연 제안도 모두 거절했고요. 강조하지만, 저만 차인 건 아닙니다.”

확실히 도현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인기를 얻으면 그 기세를 타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비치는 게 보통의 경우인데, 도현의 행보는 완전히 잠적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아주 어렵게 모신 분이죠. 제 섭외력이 이 정도입니다.”

제 자랑을 하면서, 도현의 면까지 세워주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정말 신비주의인 건가요?”

“아니요. 그때는 그게… 그렇게 관심을 받는 줄 몰랐어요. 전 그냥 학교생활을 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러면 앞으로 우리도 자주 볼 수 있는 거겠죠?”

“물론이죠.”

자연스럽게 다음 출연 약속까지 잡는 랜디에 도현이 웃으며 답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도현의 첫 영화 로 흘러갔다.

“자, 그러면 영화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제가 이 영화를 보자마자 도현을 제 토크 쇼에 부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요. 제 토크 쇼 시청자들은 모두 영화 보셨죠? 제가 저번에 엄청 추천했는데… 안 보셨으면 지금이라도 보세요. 늦지 않았습니다.”

도현은 랜디가 자신의 토크 쇼에서 영화를 추천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다. 자연스럽게 영화 홍보를 해준 랜디가 어떤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자 뒤편에 있는 스크린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이 나왔다.

햇빛이 가득한 오후, 대낮의 교리실, 그러나 화사한 색감과 다르게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와 광기 어린 목소리. 방청객들은 어느새 조용히 영상을 관람했다.

유가 고해 성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짧은 영상 클립이 끝나자 랜디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시 봐도 소름이 돋네요. 저기에 있는 소년과 여기에 있는 소년이 동일인이라는 게 믿겨 져요? 전 저 부분만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몰라요.”

방청객들은 랜디의 말에 공감했다. 방금, 스튜디오를 압도했던 영상 속 소년과 화사한 얼굴로 앉아 있는 소년은 도저히 동일인 같지 않았다.

“도현이 아닌 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아요. 제 친구도 그러더군요. 이건 도현이라서 할 수 있는 연기고, 도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줬다고요.”

왠지 도현은 그 친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시나리오 때부터 작품에 참여한 게 연기에 도움이 되었어요. 덕분에 캐릭터를 이해하기 수월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우연히 공원에서 리암 호프 감독을 만나서 시나리오 참여부터 영화 촬영까지 했다고 했죠.”

“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공원으로 산책한 게 엄청 행운이었죠. 사실 리암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배우라는 직업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거든요.”

“정말인가요?”

랜디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저는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리암이 저를 설득해준 덕분에… 마음을 바꿨어요.”

“오, 도현이 그날 산책을 안 했으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단 소리군요. 여러분, 영화계가 큰 손실을 볼 뻔했어요. 물론 저도요.”

호들갑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랜디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도현은 랜디가 단순히 도현에 대한 흥미, 혹은 프로그램 때문에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이야기해 보니 도현에 대한 호감도 상당한 것 같았다.

상대가 호감을 드러내며 맞장구를 쳐주고, 열정적인 리액션을 해주니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그럼 감독과 공원에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건가요? 운명처럼?”

“그렇게 로맨틱한 만남은 아니었어요. 우리 장르는 코미디에 좀 더 가까웠거든요.”

짓궂게 물어오는 질문에 도현은 재치 있게 답했다.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무대를 보고 있던 서혜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긴장하는 아들의 모습에 새로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는데, 역시나.

도현은 어디서든, 무얼 하든 도현이었다.

좀 더 말해보라는 말에 도현이 천천히 그때의 일을 풀어놓았다.

공원에서 홀로 시나리오와 씨름하던 리암과 그걸 멋대로 읽었던 자신, 언쟁을 벌였던 일까지.

이미 리암에게 허락도 받아놓은 터라 도현은 편안하게 다 털어놓았다.

“자, 잠깐만요. 싸웠다고요? 당신은 그러니까… 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열 살이잖아요.”

도현이 덧붙였다.

“그땐 아홉 살이었고요.”

“오… 심지어 한 자리 숫자군요.”

방청객 측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 잘못이었어요. 제가 리암의 시나리오를 멋대로 읽고서 재미없다고 했거든요.”

랜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쪽도 보통은 아니군요.”

랜디가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도현도 방청객들을 따라 웃었다.

조금 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 랜디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오늘은 영화도 영화지만, 더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현. 요즘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을 알아요?”

“가장 유명한 사진이요?”

도현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방청객 사이에서 탄성과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현이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도현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영화 클립을 틀었던 스크린 한가득 한 소녀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손에는 하얀 꽃을 쥐고 관에 누워서 눈을 뜬 사진이었다.

티 한 점 없는 피부와 조명이 반사되어 별을 품은 것처럼 빛나는 검은색 눈동자, 손에 쥔 꽃잎보다 섬세한 얼굴선과 방금 눈을 뜬 터라 어딘가 어슴푸레하고 아련한 분위기까지.

“요즘 인터넷에서 세계에서 제일 예쁜 ‘소녀’로 유명한 사진인데, 알고 있었나요?”

도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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