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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72)화 (173/582)

제172화. 발아 發芽 (8)

도현은 오늘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걱정했던 토크 쇼도-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성공적으로 끝났고.

오늘 낮에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했는데, 도현을 담당할 매니저의 첫인상이 무척이나 좋았던 덕분이었다.

그는 도현을 보자마자, 도현이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보았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한국의 것이라 찾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봤다는 소리에 도현은 조금 놀랐다.

“이 로스트비프 정말 맛있네요.”

주황색이 섞인 갈색 머리의 순박한 인상의 남성, 오스카가 감탄하며 말했다.

서로 친분도 다지고 필요한 이야기도 할 겸, 도현과 서혜나, 그리고 도현의 첫 매니저인 오스카 셔먼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오스카는 아역 배우 전문 매니저라고 했다. 아직 도현이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는 만큼, 도현의 전담 매니저가 아닌 여러 아역 배우를 담당하는 오스카가 매니저로 정해졌다.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인상 덕에 어려 보였지만, 오스카는 매니저로 일한 지 벌써 오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매니저로는 조금 독특하게도 아동교육학과를 졸업한 탓에 전공을 살려 아역 배우들을 맡게 되었다는데, 확실히 그 말이 사실인지 도현을 보는 눈빛이 아주 따뜻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게 한눈에 보이는 성격과 얼굴에 서혜나도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식사 시간 내내, 오스카는 도현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알레르기부터 싫어하는 음식과 특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 등등….

“지금까지는 에이전트랑 곧장 이야길 했다면, 앞으로 대부분의 일은 저를 통할 거예요. 활동이 생기면 제가 항상 동행할 거고요.”

도현은 서혜나가 은근히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웃음을 삼켰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도현.”

“저도요. 그리고 말은 좀 더 편하게 해주셔도 돼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할게.”

오스카가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는 신기할 정도로 매독스와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매독스는 공적인 일을 중시하고 깐깐한 느낌이라면, 오스카는 털털하고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그가 매니저인 이상 진짜 허술한 성격일 리는 없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매니저보다는 친근한 사촌 형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도현은 사촌 형은 물론 사촌조차 만나본 적 없어서 그게 무슨 느낌인지 대충 추측할 뿐이었지만.

오스카와 헤어진 도현은 서혜나의 차에 탔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도현은 그 말에 긍정했다.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킨 서혜나가 가운데에 있는 시계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1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가는 데 조금 걸리니까 자고 있어도 돼.”

“네, 알겠어요.”

오늘은 도현의 상담 예약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도현은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부드러운 차의 진동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서혜나가 틀어놓은 재즈 팝이 귓가에서 느릿하게 웅웅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메리가 반겨주었다. 서혜나는 익숙하게 보호자 대기실에 들어가고 도현은 메리를 따라 상담실로 향했다.

메리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현을 보고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좋아 보여.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방금 제 매니저가 될 분을 만나고 왔거든요. 혹시 잘 안 맞는 사람이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좋은 분이었어요.”

“오, 그건 정말 좋은 소식이네. 조금 더 얘기해 줄래?”

도현은 메리의 말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메리는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도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탁.

메리가 도현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자, 향긋한 허브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같은 종류의 허브를 집에 사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집에서 마시면 지금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다.

상담에 대한 회의감과는 별개로 상담 때마다 찾아오는 티타임은 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은 이 순간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허브 향은 향긋했고 티타임 상대는 상담사라는 것만 잊으면 완벽함에 가까운 대화 상대였다.

오스카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도현은 문득,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특별했던 일이 떠올랐다.

도현은 별다른 고민 없이 말을 꺼냈다.

“저 이번에 토크 쇼에 나갔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랜디 쇼>라는 프로그램에요.”

“아, 물론 알지. 가끔 챙겨 보는걸? 사실, 도현이 나온 방송도 봤어.”

“아, 정말요?”

“도현이 저번에 토크 쇼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잖아. 그래서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봤는데, 아주 잘하던데? 보면서 몇 번을 웃었는지 몰라.”

아주 귀여웠다며 덧붙이는 말에 도현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지난번 상담에서 메리에게 토크 쇼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던 도현이었다. 괜히 엄살을 부린 기분이 들어 도현이 멋쩍어졌다.

“솔직히… 걱정한 것보다는 별일 아니더라고요.”

“정확히 어떤 기분이었어? 토크 쇼에 나가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

“좀 어렵고 낯설긴 했는데,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제 말에 집중했거든요.”

“그건 멋진 경험이었겠는데.”

“네, 마치….”

도현이 적당한 말을 찾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마치 그 순간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요.”

그래, 딱 그런 느낌이었다.

“주인공이라… 좋은 말이네.”

메리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말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지. 나도 그렇고, 도현도 말이야.”

메리가 도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도현은 그동안 삶의 주인공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을까?”

그래도 너무 방심했나 보다.

지난번, 세 번째 만남 이후로 도현은 도통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잔뜩 털을 세운 고슴도치처럼 말을 아꼈다.

메리는 도현이 충분히 경계심을 풀 수 있을 만큼, 자극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훅 치고 들어왔다.

“…네.”

도현이 머뭇거리다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엔 망설임이 짙게 묻어 있었다.

말해도 될까, 아닐까.

찻잔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도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련된 일도 아니고, 형이 얽힌 일도 아니다.

말해도 되는 문제다.

결론을 내린 도현이 찻잔을 내려다본 채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 삶은, 저는,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보잘것없었어요.”

메리는 가만히 경청했다. 도현은 어색한 심정으로, 처음 동화책을 읽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주인공은, 그렇잖아요. 보통 멋진 모험을 하거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고… 혹은 남들은 겪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거나 평범함 속에서도 특별하게 살아가는 이들이잖아요. 그런데 전… 아니었거든요.”

말을 한 도현이 아미를 찌푸렸다. 말하고 나서 보니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았다.

도현은 잠시 할 말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층 더 침착해진 채였다.

“제가 주인공을 부러워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듯이 저도 그랬을 뿐이니까요.”

도현이 이쯤에서 말을 아끼려는 걸 눈치챘는지, 메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도현이 가지지 못한 게 뭐였는데?”

계속해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색이요.”

메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와 살짝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현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혹은 메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갈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어요. 벚꽃 같은 분홍색부터, 연한 노란색, 보라색, 뜨거운 빨간 색…. 각자 삶과 영혼의 색을 가지고 빛나요.”

그건 메리에게 설명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메리는 도현을 방해하지 않도록 숨소리를 죽였다.

“저는 하얀색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저 하얗기만 한… 모든 색이 사라진 색. 그게 제 색이었어요.”

겉보기엔 세상의 축복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소년 같았다.

부유한 집안과 외모, 재능, 지능까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진 소년의 속내는 막상 하얀색처럼 허무했다.

메리는 소년이 작은 품 안에 숨겨왔던 아득한 공허를 엿본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색을 가지고 싶었어요. 색을 가지면…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도현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도현은 지금 메리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되짚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책을 읽었어요. 거기엔 늘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주인공이 있었어요. 그들이 가진 색이 부러워서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저도 그 색에 물들 것만 같았어요.”

잠깐 말을 멈춘 도현이 이내 옅게 웃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웃음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별거 없어요.”

“지금은? 지금도 도현의 색은 하얀색이니?”

메리와 눈을 마주친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살짝 커진 눈으로 그녀를 보던 도현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아니요.”

이번에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보다 선명했다. 도현이 푸르르게 웃었다.

“저도 색이 있더라고요.”

잔잔한 호수처럼 맑은 하늘빛.

언뜻 드넓은 대양을 닮았고, 때론 구름이 흐르는 하늘 같은.

노을과 아주 잘 어울리는 색.

그게 자신의 색이었다. 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영혼의 색채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메리는 이 복잡하고, 그만큼 매력적인 소년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게 비단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만큼 소년은 찬란해 보였다. 누군가 보았다면 왜 다른 사람을, 책 속의 주인공을 부러워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담자와 내담자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진실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 * *

“오늘 상담은 어땠어?”

“좋았어요.”

차에 시동을 걸던 서혜나가 고개를 들었다.

항상 ‘괜찮았어요.’라고 답하던 도현에게서 처음으로 나온 다른 대답이었다.

“…그거 다행이네.”

잠시 표정을 정돈한 서혜나가 씩 웃고는 시동을 걸었다. 차는 집을 향해 시원하게 내달렸다.

도현은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는 하늘을 구경했다. 오늘따라 맑은 하늘은 차의 움직임을 따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오늘의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게 될까, 아닐까. 도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가늠해 보려다가 이내 생각을 멀리 치워내고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미래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 * *

세상에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일은 마치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엮여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미국 시트콤 에서 특별 출연 제안이 왔다.

“? 나 그거 완전 재밌게 보고 있는데!”

“너 그러면 노라도 만나? 노라 엄청 예쁘잖아!”

차례로 진과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가 옆에서 부럽다며 계속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노라라는 배우가 니콜라스가 좋아하는 배우인 것 같았다.

옆에서 다비드도 관심을 보이는 걸 보아하니, 그냥 니콜라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배우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그렇게 단번에 인기 스타로 만들어준 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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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고전이자 전 세계적인 명작 을 기반으로 새롭게 만든 시트콤이었다.

원작처럼 매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가 주인공이며 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가 주된 배경이었다. 그곳에서 자매들이 벌이는 사건 사고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루는데, 시즌 1이 인기리에 끝나 지금은 시즌 2가 방영 중이었다.

진과 니키, 다비드의 반응을 보아 알 수 있듯이 현재 미국의 10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도현이 이 프로그램에 특별 게스트로 초대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다양한 요소가 작용한 결과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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